[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얼음이 얼어붙는 추운 날에 거동하면 몸을 상하게 할 염려가 이미 적지 않고, 더군다나 지금은 전염병이 갈수록 심해지니, 모시고 따라가는 문무백관들이 모두 재소(齋所, 제사 지내는 곳)에서 밤을 지낼 수가 없고, 빽빽하게 따르는 군졸들 또한 어찌 모두가 아무렇지 않을 수 있겠으며, 길을 가득 메우고 임금의 행렬을 구경하는 사람들 또한 병에 전염되지 않는 사람이 없지 않을 것이며, 수레가 지나가는 길 좌우에 또한 반드시 바야흐로 병든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이는 《숙종실록》 숙종 24년(1698년) 12월 12일 기록으로 돌림병(전염병)이 심해지니 임금이 거동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말리고 있는 내용입니다. 지금 온 나라에 코로나19가 퍼져가고 있음 사람들 모두 전전긍긍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조선시대는 어땠을까요? 검색어로 살펴보니 전염병 702건, 여역(癘疫) 418건, 염병(染病, 장티푸스) 154건, 천연두 74건, 여기(癘氣) 47건, 역병(疫病) 27건, 홍역 17건 등이 나왔습니다. 특히 《영조실록》 영조 19년(1743년) 12월 29일 기록에는 “이 해에 여러 도에 여기(癘氣)가 크게 번져 사망자가 6, 7만 명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강세황이 태어난 지 300해가 되던 때인 지난 2013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조선시대 위대한 화원 강세황전”이 열린 적이 있었습니다. 강세황은 보통 물러나 쉴 나이인 61살에 노인과거에 장원급제한 뒤 왕릉을 지키는 벼슬인 능참봉으로 시작하여 6년 만에 정2품 한성부판윤에 오르는 초고속 승진을 했지요. 그러나 이 초고속 승진은 누가 뒤를 보아준 덕이 아니라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을 때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의 능력을 스스로 인정하여 갈고닦아 드디어 사람들의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 강세황에게는 자신이 직접 그린 국립부여박물관 소장의 강세황 자화상을 비롯한 몇 점의 초상화가 전해옵니다. 특히 개인 소장인 보물 590-2호 ‘강세황상’은 정조 임금이 아끼던 신하 강세황이 71살이 되어 기로소(조선시대 고위 퇴임관리들의 예우를 목적으로 설치한 기구)에 들어간 것을 기려 궁중화가인 이명기에게 명하여 그린 것입니다. 그래서 그림 오른쪽 위에는 정조가 짓고, 문신 조윤형이 쓴 제문이 적혀있습니다. 이 작품은 조선 초 이후 왕실에 공헌한 신하들을 위해 궁중화가를 시켜 그리던 공신초상의 형식을 따르고 있지요. 다만, 이 작품은 전통적인 화풍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서재필 박사는 남 먼저 자전차를 타고 다니엿다. 그는 갑신년 김옥균 정변 때 멀니 미국에 망명하야 그 나라에 입적까지 하엿다가 그후 13년만에 정부의 초빙에 의하야 귀국함에 미국에서 타던 자전차를 가지고 와서 타고 다니엿는데 그때에 윤치호 씨는 그에게 자전차 타는 법을 배워가지고 또 미국에 주문을 하야다가 타고 다니엿다. 우에 말한 것과 가티 그 때만 하야도 아즉 일반의 지식이 몽매한 까닭에 그들의 자전타 차고 다니는 것을 보고 퍽 신기하게 생각하야 별별 말을 다 하되 서 씨는 서양에 가서 양인의 축지법을 배워가지고 하루에 몃 백리 몃 천리를 마음대로 다니더니 윤 씨는 대데가전의 차력약(借力藥)이 잇서서 남대문을 마음대로 훌훌 뛰여 넘어 다니녀니하고 또 자전차를 안경차니 쌍륜차니 하는 별명까지 지여섯다.” 위는 일제강점기 잡지 《별건곤 제16~17호(1928년 12월 1일 발행)》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것을 보고 축지법을 써서 하루 몇백 리 몇천 리를 마음대로 다닌다고 합니다. 그런데 구한말 조선에 온 선교사이며 의사였던 알렌이 1908년 펴낸 책 《조선견문기》에도 선교사들이 자전거를 처음 탄 이야기가 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독립운동가 단재 신채호 선생은 세수할 때 고개를 빳빳이 든 채로 물을 찍어다 바르는 버릇 때문에 마룻바닥, 저고리 소매와 바짓가랑이가 온통 물투성이가 됐다고 합니다. 선생은 자기가 옳다고 믿는 일이면 절대로 뜻을 굽히지 않았는데, 특히 일본이 지배하는 땅에서는 고개를 숙이지 않겠다며 꼿꼿이 서서 세수를 한 것입니다. 1936년 오늘(2월 21일)은 단재 선생이, 차디찬 감옥에서 순국한 날입니다. 선생은 일제강점기 드물게 언론, 역사, 그리고 독립운동 세 분야에서 두드러진 활동을 한 분이지요. 먼저 언론인으로서는 황성신문의 논설위원에 이어 대한매일신보의 주필이 되어 일제의 침략상을 폭로하고 침략 논리를 적극적으로 비판하는 애국계몽운동의 실천적 지식인으로 크게 이름을 떨쳤습니다. 그리고 사학자로서는 식민사관에 맞서서 역사의식을 갖추는 것이 곧 애국심을 키우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독사신론(讀史新論)》과 《조선상고문화사(朝鮮上古文化史)》, 《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草)》를 펴냈으며, 특히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총론에서 ‘역사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 기록’이라는 그의 유명한 민족주의 사관을 극명하게 이론화하여 밝혔습니다. 선생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몇 년 전 KBS ‘불후의 명곡’ 프로그램에는 국가무형문화재 조통달 명창과 그의 아들로 가요계의 한 획을 그은 가수 조관우 그리고 그의 아들 피아니스트 조현까지 3대가 함께한 무대가 큰 화제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조관우는 어려서 이모할머니로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춘향가’의 보유자 박초월 명창 손에서 자랐다고 하지요. 결국, 박초월 명창의 뛰어난 음악성은 3대를 이어간 셈입니다. 1913년 오늘은 그 박초월 명창이 태어난 날입니다. 박초월 명창은 전라남도 순천에서 태어나 전라북도 남원에서 자랐는데 김정문(金正文)ㆍ송만갑(宋萬甲)ㆍ임방울(林芳蔚)ㆍ정광수(丁珖秀) 등 당대의 명창들에게 판소리를 배웠습니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좋은 목소리에 성량도 풍부하여 일찍부터 이름을 떨쳤지요. 1930년 전주 전국남녀명창대회에서 1등을 한 뒤 여러 음반회사와 계약을 맺고 「흥보가」ㆍ「심청가」ㆍ「춘향가」 등을 취입하였습니다. 1955년에는 현 서울국악예술학교의 모체인 ‘한국민속예술학원’을 박귀희(朴貴姬) 명창과 함께 설립하고 교사로서 많은 신인을 양성하였지요. 1962년 초대 한국국악협회 이사장을 맡았으며, 1971년 국악협회 상임고문, 1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오늘은 24절기의 둘째 우수(雨水)입니다. 우수라는 말은 눈이 녹아서 비가 된다는 말이어서 이제 추운 겨울이 가고 드디어 봄을 맞게 된 것이지요. “우수 뒤에 얼음같이”라는 속담이 있는데 이는 슬슬 녹아 없어짐을 이르는 뜻으로 우수의 성격을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이 무렵에 꽃샘추위가 잠시 기승을 부리지만 “우수 경칩에 대동강도 풀린다.”라는 속담이 있듯이 우수와 경칩을 지나면 아무리 춥던 날씨도 누그러져 봄기운이 돌고 초목이 싹트지요. "꽃샘잎샘 추위에 반늙은이(설늙은이) 얼어 죽는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계절에 나누는 전래의 인사에도 "꽃샘잎샘에 집안이 두루 안녕하십니까?"라는 것도 있지요. 이 꽃샘추위를 한자말로는 꽃 피는 것을 샘하여 아양을 피운다는 뜻을 담은 말로 화투연(花妬姸)이라 합니다. 하지만, 우수가 되면 봄기운이 서리기 시작하는데 풀과 나무가 깨어나는 모습이 엿보입니다. 이때는 논밭을 둘러보고 새해 농사 계획 세우며, 삽질 한 번, 낫질 한 번으로 몸을 풀지요. 특히 이 무렵에는 농사일 한발 앞서 장을 담가야 합니다. 장 담그는 일은 시골 살림에서 매우 중요한 일인데 이웃과 장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이야기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농상공부길(農商工部通り)에 신축 낙성한 경성고등연예관에서 (2월) 18일 관민 수백 명을 초대하여 활동사진 개장을 피로한다.” 이는 1910년 2월 18일 신문에 난 기사입니다. 이 경성고등연예관(高等演藝館)은 일본인 와타나베가 세운 조선에 처음 등장한 영화관입니다. 경성고등연예관은 현재의 을지로2가 KEB하나은행 본점 옆 황금정 63통 7호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이 극장은 프랑스의 파테영화사에서 수입한 당시로써는 각종 첨단 영사장비를 갖추고 있었다고 합니다. 내부는 이른바 ‘기석’(奇席)이라는 일본식이었는데, 2층은 다다미, 아래층은 긴 의자로 배치하였지요. 수용인원은 6백명 정도였고, 일본인 영사기사를 영화상영을 위해 고정배치 하였습니다. 특등석 1원, 1등석 50전, 4등석 10전으로 비싼 입장료였지만 경성고등연예관의 영화상영은 상당한 인기를 얻었다고 하지요. 경성고등연예관은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본격적인 영화전문극장으로 조선에 처음 선보인 것이었으며, 조선에 영화가 보급되는 과정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다만, 극장의 소유주가 일본인이며, 일본 자본에 의해 세워졌다는 사실은 일본인이 조선의 영화시장을 본격적으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151년 전 오늘(2월 17일)은 독립운동가면서 ‘임정의 수호자’란 별명이 붙은 이동녕(李東寧) 선생이 태어나 날입니다. 선생은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상해로 건너가 임시의정원의 초대 의장을 맡아 임시정부 수립의 산파역을 맡았습니다. 그리고 통합 임시정부의 내무총장에 이어 국무총리와 대통령 대리, 국무령, 주석 등을 역임하면서 20여 년 동안 임시정부를 이끌었지요. ‘임정의 수호자’란 말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분입니다. 특히 1925년 국무령제 개헌 직후 선생은 잠시 내각 수반인 국무령을 맡았다가 김구 선생을 지원하여 그 내각을 성립시켰습니다. 이에 김구는 《백범일지》에 "금일의 오인(吾人)을 있게 한 이면에는 이동녕의 지원이 있어 가능하였다."라고 고백하였는데 1932년 이봉창ㆍ윤봉길 의거도 백범 김구가 선생과 상의하여 결행한 것이라고 합니다. 선생은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김구와 함께 광복군 창설을 위해 노심초사하다가 지병인 천식이 악화되어 급성폐렴증세까지 나타나 결국 꿈에도 그리던 조국 광복을 바로 앞두고 낯선 이국땅 기강에서 1940년 3월 13일, 71살의 나이로 순국하고 말았지요. 그러나 운명하는 그 순간까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음식을 담은 그릇을 올려놓는 작은 상, 소반의 크기는 너비가 50센티미터 안팎입니다. 한 사람이 소반을 받쳐 들고 부엌에서 마당을 지나 대청을 오르고 안방이나 사랑방으로 옮겨가는 데 큰 힘을 들이지 않아도 될 만큼의 크기지요. 또 소반의 좌우 폭이나 지름이 성인의 어깨너비보다 크지 않아 양팔에 부담을 주지 않도록 만들었습니다. 게다가 높이도 25~30센티미터 안팎으로 몸을 많이 구부리지 않아도 되며, 팔을 움직이는 데도 큰 불편이 없지요. 이처럼 이리저리 옮겨야 하는 가구이기 때문에 재목은 가벼우면서도 튼튼한 것들을 썼는데 주로 은행나무, 가래나무, 피나무, 오동나무, 소나무 따위입니다. 또 무게를 지탱하기 위하여 목재의 연결부분을 슬기로운 짜임으로 튼튼하게 짜 맞추어 가늘지만, 소반과 그 위에 놓인 그릇과 음식들의 무게를 지탱할 수 있도록 했지요. 그뿐만 아니라 옮기기 편하게 하려고 그릇을 올려놓는 천판이 밖으로 나와 따로 손잡이 없이 양손으로 잡을 수 있도록 설계되었습니다. 그런데 소반의 특징 가운데는 다리도 빼놓을 수 없지요. 다리는 구조적으로 튼튼하게 하되 시각적으로 안정감을 주는 동시에 아름다운 모양새로 만들었습니다. 그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한국의 정서와 아름다움이 가장 돋보이게 나타난 예술품의 하나로 사람들은 ‘백자 달항아리’를 꼽습니다. ‘백자 달항아리’ 가운데 국보로 지정된 것은 용인대학교박물관에 국보 제262호가 있고, 삼성미술관 리움에 국보 제309호 있으며, 국립고궁박물관에 국보 제310호가 있습니다. 그런데 ‘백자 달항아리’들의 원래 문화재 이름은 ‘백자대호’였지요. 여기서 ‘대호(大壺)’란 ‘큰항아리’를 말하는 것으로 참으로 무미건조한 한자말입니다. 그러나 ‘백자 달항아리’를 사랑했던 대표적인 예술가인 화가 김환기 선생과 미술사학자 최순우 선생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밤하늘에 둥실 떠 있는 보름달 같은 백자’라며, ‘달항아리’라고 부르기 시작하여 차츰 많은 사람이 이 정감있고 서민다운 냄새가 물씬 풍기는 이름 ‘달항아리’에 공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문화재 이름은 ‘달항아리’로 바뀌게 됩니다. 소설가 알랭 드 보통은 그의 책 《영혼의 미술관》에서 조선의 백자 달항아리를 ”표면에 작은 흠들을 남겨둔 채로 불완전한 유약을 머금어 변형된 색을 가득 품고, 이상적인 타원형에서 벗어난 윤곽을 지님으로써 겸손의 미덕을 강조한다. 가마 속으로 뜻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