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 가면 흔한 모습이 아닌 독특한 모양의 석탑이 있는데 바로 국보 제102호 충주 정토사터 “홍법국사탑(弘法國師塔)”이 그것입니다. 흔히 석탑의 몸돌들을 보면 네모난 모양인데 견주어 약간 찌그러진 공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공모양의 몸돌로 인해 ‘알독’이라고 불리기도 한 이 탑은 새로운 기법을 보여주는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승탑입니다. 등근 몸돌에는 가로ㆍ세로로 묶은 듯한 십(十)자형의 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그 교차점에는 꽃무늬로 꾸몄습니다. 또 삿갓 모양으로 깊숙이 패인 지붕돌 밑면에는 비천상(飛天像)이 조각되어 있지요. 그뿐만이 아니라 가운데받침돌에는 구름을 타고 있는 용이 섬세하게 새겨져 있고, 윗받침돌에는 아래와 대칭되는 솟은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습니다. 높이 2.55m의 이 탑은 고려 목종 때의 승려인 홍법국사의 탑으로, 홍법국사는 당나라에서 수행하고 돌아와 선(禪)을 유행시켰으며, 고려 성종 때 대선사(大禪師)를 거쳐 목종 때 국사(國師)의 칭호를 받았습니다. 이 탑은 원래 충청북도 중원군(현 충주시)의 정토사 옛터에 있던 것인데 일제가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박랍회)를 경복궁에서 열면서 같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조선 초기 안평체의 이용(李瑢, 안평대군), 중기 석봉체의 한호(韓濩, 석봉), 말기 추사체의 김정희와 더불어 원교체(圓嶠體)라는 독특한 필체를 이룩한 이광사(李匡師, 1705~1777)는 조선 4대 명필의 한 사람입니다. 전남 구례의 지리산 천은사 일주문에는 그 이광사가 물 흐르는 듯한 수체(水體)로 쓴 ‘智異山泉隱寺’(지리산 천은사)'라는 편액이 걸려있지요. 절 천은사는 원래 이름이 감로사(甘露寺)였는데 숙종 때 고쳐지면서 샘가의 구렁이를 잡아 죽이자 샘이 사라졌다고 해서 ‘샘이 숨었다’는 뜻의 천은사(泉隱寺)로 이름을 고쳤습니다. 그러나 그 뒤 원인 모르게 불이 자주 일어나자 마을 사람들은 절의 수기(水氣)를 지켜주는 구렁이를 죽였기 때문이라고 두려워했는데 이광사 글씨의 편액을 붙인 뒤로는 불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전합니다. 지금도 고요한 새벽 일주문에 귀를 기울이면 현판에서 신비롭게도 물소리가 들린다고 하니 당시 이광사의 글씨는 신비스러운 경지에 다다른 것이 분명하지요. 이광사는 글씨를 쓸 때 소리꾼에게 노래를 시켜 노랫가락이 맑고 씩씩한 우조(羽調)면 글씨도 우조의 분위기로 쓰고, 평조(平調)면 글씨도 평화롭고 담담한 분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모레 일요일은 24절기 가운데 열째 절기인 ‘하지(夏至)’입니다. “하지가 지나면 오전에 심은 모와 오후에 심은 모가 다르다.”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농촌에서는 하지 무렵 모심기를 서두르는데 하지가 지날 때까지 비가 내리지 않으면 기우제(祈雨祭)를 지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농사가 나라의 근본이었기에 비가 오지 않아서 농사짓기가 어려워지면 임금이 직접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지요.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기우제”가 무려 3,122건이나 나올 정도입니다. 기우제의 유형은 몇 가지가 있는데 먼저 산 위에 장작을 쌓아놓고 불을 놓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는 산에서 불을 놓으면 타는 소리가 천둥 치는 소리같이 난다는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도 하며, 연기를 통해 천신에게 기원을 전한다고도 합니다. 또 신을 모독하거나 화나게 하여 강압적으로 비를 오게 하기도 합니다. 부정물은 개, 돼지의 피나 똥오줌이 주로 쓰이지요. 전라도 지방에서는 마을 여인네들이 모두 산에 올라가 일제히 오줌을 누면서 비를 빌기도 합니다. 아이들이 짚으로 용의 모양을 만들어 두들기거나 끌고 다니면서 비구름을 토하라고 강압하기도 하는데 아이들은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용서받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아픈 생활에서 때때로는 웃어도 보아야겠다. 웃어야 별수는 없겠지마는 그렇다고 울고만 있을 것도 아니다. 우리는 형편도 그렇게 되지 못하였지만 웃음을 웃을 줄도 모른다. 자! 좀 웃어보자! 입을 크게 벌리고 너털웃음 웃어보자. 그렇다고 아픈 것을 잊어서도 아니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벌써 1년이나 전부터 취미와 과학을 갖춘 잡지 하나를 경영해 보자고 생각하였었다.“ 이를 보면 마치 지금 우리의 상황을 두고 독백하는 듯한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이는 1926년 11월 1일 자로 창간된 대중잡지 《별건곤(別乾坤)》의 편집후기인 〈여언(餘言)〉의 일부분입니다. 《별건곤》은 3·1만세운동이 낳은 큰 잡지 《개벽(開闢)》이 1926년 8월 일제의 탄압으로 강제 폐간당하자 그 대신 나온 잡지이지만, 《개벽》과는 그 성격을 전혀 달리하여 취미와 실익을 위주로 한 대중잡지였지요. 특이한 《별건곤》이란 제호를 보면 ‘건곤(乾坤)’은 ‘천지(天地)’와 같은 뜻이고 보니 ‘별천지(別天地)ㆍ별세계(別世界)’ 쯤으로 보면 되겠습니다. 그런데 《별건곤》이 취미잡지라고는 하지만 그 창간호 여언(餘言)에, 취미라고 무책임한 독물(讀物, 읽을거리)만을 늘어놓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那將月姥訟冥司(나장월모송명사) 월하노인과 함께 가 옥황상제에게 하소연하여 來世夫妻易地爲(내세부처역지위) 내세에는 내외가 처지를 바꾸어서 我死君生千里外(아사군생천리외) 나 죽고 그대는 천 리 밖에 살아남아 使君知我此心悲(사군지아차심비) 그대가 나의 이 슬픔을 알게 할까? 이는 추사 김정희의 <도망(悼亡)> 곧 ‘죽은 아내를 생각하여 슬퍼함’이라는 한시입니다. 추사가 제주도로 유배를 가 있는 사이 그의 나이 57살인 1842년 11월 13일 본가 예산(禮山)에서 아내 예안 이씨가 죽었습니다. 그런 줄도 모르는 추사는 계속 아내에게 편지를 썼지요. 그 가운데는 특히 제주도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다며, 젓갈 등을 보내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습니다. 현재 전해지는 추사의 한글편지는 40통인데 그 가운데 대부분이 아내에게 쓴 것이라고 하지요. 부인이 죽은 지 한 달이 지난 뒤인 12월 15일에야 부인이 죽었음을 안 추사는 죽은 부인에게 반찬 투정했음을 알고 대성통곡을 했습니다. 그리곤 ‘죽은 아내를 생각하여 슬퍼함’이란 한시를 쓴 것입니다. 그러면서 ‘혼인을 관장하는 월하노인(月下老人)을 데리고 저승에 가 옥황상제에게 하소연하여 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옛사람들은 집안 곳곳에 신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집을 다스리는 성주신을 비롯하여 부엌에 있다는 조왕신, 장독대의 터주신은 물론 심지어 측간(뒷간)에도 신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또한, 문에도 신이 있는데 이 신은 문신(門神)으로 문전(門前) 또는 수문장신(守門將神)이라고도 불렀습니다. 특히 제주도 사람들은 이 문신이 늘 문을 지켜서 집안의 모든 일을 수호한다고 생각하여 아주 중요한 신으로 모셨지요. 그런데 문신에게 굿을 할 때 외우는 “문전본풀이”에 따르면 “아버지는 집의 출입로에 대문 대신 가로로 걸쳐놓는 정낭의 신이 되고, 어머니는 부엌의 조왕신이 되고, 계모는 측간신이 되고, 아들 일곱 형제 가운데 첫째에서 다섯째까지는 오방토신(五方土神)이 되어 집터를 지키고, 여섯째아들은 뒷문전이 되고, 똑똑하고 영리한 막내아들은 일문전(마루방 앞문 신)이 되었다.”라고 합니다. 이 “문전본풀이”를 바탕으로 조왕(부엌)과 측간은 멀리 띄어서 지었는데 어머니(부엌신)와 계모(측간신)를 떼어 놓으려는 것이지요. 그뿐만 아니라 측간의 돌 하나 나무 하나도 부엌에 가져오지 않는 관습이 있습니다. 지독한 여자들의 질투를 고려하여 집을 지은 것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쪽 찐 머리에 똬리 얹어 / 함지박 이고 어머니 우물가는 길 / 누렁이 꼬리 흔들며 따라나서고 / 푸른 하늘 두레박에 넘실거릴 때 / 이남박 가득 하얀 햅쌀 / 일렁이며 돌 고르던 마음 / 아! 어머니 마음 이는 신수정 시인의 <이남박>이란 시입니다. ‘이남박’은 예전엔 어느 집에나 있던 물건입니다. 쌀, 보리 같은 곡식을 씻거나 돌을 일 때 쓰는 물건이지요. '이남박'을 북한에서는 '쌀함박', 강원도는 '남박' 또는 '쌀름박', 경상북도는 '반팅이'라고 불렀습니다. 크기는 일정하지 않지만, 대체로 윗지름 30∼70㎝, 깊이 15㎝, 바닥지름 15∼20㎝가량이고, 안쪽에는 여러 줄의 골이 가늘게 패어 있어서 쌀을 씻을 때 골이 진 부분에서 가벼운 마찰이 생겨 돌 등을 걸러내고 곡식을 깨끗이 씻을 수 있지요. 지금은 ‘석발기’라는 돌 고르는 기계가 있어 쌀에 돌이 섞이는 일이 없지만, 예전엔 자그마한 돌이나 잔모래가 으레 섞이곤 해서 쌀을 잘 일어야 했기에 이남박은 꼭 있어야 하는 조리기구였습니다. 한 그릇의 밥이 밥상에 오르려면 우물가로 함지박에 쌀을 이고 나가 조리로 인 다음 이남박에 담아 졸졸졸 물을 여러 번 흘려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텔레비전 사극에 보면 정갈한 사랑방에서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글을 읽는 선비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때 선비가 책을 올려놓고 보는 앉은뱅이 작은 책상을 서안(書案)이라 하고 그 옆에 벼루와 먹 그리고 붓을 넣어두는 상자가 있는데 이를 ‘연상(硯床)’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서안과 연상은 옛 선비들 사랑방에 꼭 놓여있었던 가구였습니다. 높이 16∼30㎝의 작달막한 연상은 윗부분에 뚜껑을 덮고 그 안에 벼루를 넣어 둡니다. 어떤 연상은 뚜껑이 없이 벼루를 바로 쓸 수 있게 해놓은 것도 있는데 이 이름은 따로 ‘연대(硯臺)’라 합니다. 그리고 아래로는 서랍을 두어 붓이나 먹, 연적을 넣어두기도 합니다. 또 문갑이나 서안과 겸한 것들도 눈에 띕니다. 그밖에 벼루와 먹을 보관하는 작은 함이 있는데 이는 벼룻집[연갑(硯匣)]이라고 하지요. 연상을 만드는 재료로는 은행나무ㆍ소나무ㆍ먹감나무가 가장 많이 쓰였으며, 모과나무로 만든 투각장식의 연상과 나전칠기 연상은 매우 화려한 고급품입니다. 또한, 대쪽 같은 선비의 품격을 나타내는 대나무 연상도 많습니다. 벼루 10개와 붓 천 자루를 갈아치웠다는 추사 김정희와 명필 왕희지(王羲之)ㆍ안진경(顔眞卿)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우리의 위대한 반찬 김치는 그 종류가 자그마치 500여 가지에 달한다고 합니다. 그만큼 우리 겨레는 김치와 함께 살아온 거죠. 그런데 김치는 세계 5대 건강식으로 뽑히고, 미국과 유럽 일대, 중국, 일본에서도 김치의 인기가 커가고 있다고 합니다. 그 김치는 형태별로 통김치, 숙김치(삶은 무와 절인 배추에 굴, 배, 고춧가루, 새우젓, 대파 등을 넣어 담그는 김치), 깍두기, 소박이, 물김치, 보김치(한 보시기 분의 김치를 덩어리지게 담아 백항아리에 익히는 것) 따위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무로 만드는 깍두기의 유래는 무엇일까요? 1940년 홍선표가 펴낸 《조선요리학》을 보면 200년 전 정조임금 사위인 홍현주(洪顯周)의 부인(숙선공주)이 임금에게 처음으로 깍두기를 담가 올려 칭찬을 받았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각독기(刻毒氣)라 불렀으며, 그 뒤 여염집에도 퍼졌는데 고춧가루 대신 붉은 날고추를 갈아서 쓰면 빛깔이 곱고 맛도 더욱 좋다고 하지요. 깍두기에는 감동젓무, 걸무깍두기, 명태서더리깍두기, 무송송이, 숙깍두기, 비늘깍두기 따위가 있는데 이 가운데 ‘감동젓무’는 무와 배추에 잔 새우로 담근 감동젓(곤쟁이젓), 생굴, 낙지, 북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조선 민족아! 우리의 철천지원수는 자본제국주의 일본이다. 2,000만 동포야 죽음을 결단코 싸우자 만세! 만세! 조선독립만세!” 이는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인산일(因山日, 장례일)을 기해 만세시위로 일어난 <6·10만세운동>의 한 격문입니다. <6·10만세운동>은 사회주의 계열과 민족주의 계열이 연합하여 만세시위를 계획하였지만, 사전에 일제 경찰에 들켜 무산되었습니다. 하지만, 확산해온 학생운동 조직은 준비과정에서 일경에 들키지 않았지요, 먼저 조선학생과학연구회 중심의 사직동계가 주도했는데 화요회계와 통동계가 연합하여 태극기 300장과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깃발 30장을 만들었으며, 명함인쇄기 한 대를 구해 초안한 격문 1만여 매를 인쇄했습니다. 6월 10일 순종의 장례 행렬은 창덕궁에서 발인을 마친 뒤 종로ㆍ동대문을 거쳐 금곡 유릉(裕陵)으로 가는 장례 행렬의 연도에는 30만 명의 군중이 몰려들었지요. 이때 학생들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격문 1,000장과 태극기 30여 장을 뿌렸습니다. 일제는 군대 1만 명을 서울에 긴급 투입했으며, 인도에 총검으로 무장한 군인과 기마 경찰, 헌병을 집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