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오늘은 24절기 가운데 넷째 춘분(春分)입니다. 이날은 해의 중심이 춘분점 위에 왔을 때인데 흔히 낮과 밤의 길이가 같다고 하지요. 사람들은 춘분 무렵이 되면 봄이 왔다고 하지만, 이때는 음력 2월이라 꽃샘추위가 남아 있는 때로 "2월 바람에 김치독 깨진다", "꽃샘에 설늙은이 얼어 죽는다"라는 속담에서 보듯이 이때 한차례 남은 추위는 동짓달처럼 매섭고 찹니다. 선조들은 춘분을 '나이떡 먹는 날'이라고 했습니다. 나이떡은 송편과 비슷한 떡인데 온 식구가 모여 앉아 아이들은 크게 빚어서, 어른들은 작게 빚어서 나이 수만큼 먹었지요. 또 머슴들에게 한해 농사를 잘 지어달라고 나이떡을 빚어 먹게 했는데 그래서 '머슴떡'이라고도 했습니다. 또한, 춘분 무렵엔 '볶음콩'을 먹기도 했는데 볶은 콩을 먹으면 새와 쥐가 사라져 곡식을 축내지 않는다고 믿었지요. 天時忽忽到春分 세월은 문득 흘러 춘분 절기 왔어도 東北都無吉語聞 동북엔 좋은 소식 들려옴이 전혀 없네 山雨溪風渾漫興 산속 비 계곡 바람 부질없는 흥취이니 不如終日醉醺醺 온종일 술에 취해 지냄이 더 낫구나 조선 중기 문신 이정암(李廷馣)의 한시 ‘춘분’입니다. 봄이 왔어도 환한 소식은 없고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중요무형문화재 제69호 “하회별신굿탈놀이”에 보면 <초랭이>가 등장합니다. 초랭이는 여기서 양반의 하인으로 등장하는 인물인데 초랑이ㆍ초란이ㆍ초라니라고도 합니다. 이 초랭이는 무색 바지저고리에 쾌자((快子, 옛 군복의 일종으로 등 가운데 부분을 길게 째고 소매는 없는 옷)를 입고 머리에는 벙거지를 씁니다. ‘방정맞다 초랭이 걸음’이라는 말처럼 점잖지 못하게 까불거리며 촐랑거리는 역을 하지요. 춤을 출 때도 활달하고 생동감 있게 움직입니다. 초랭이탈은 하회탈 가운데 가장 작은 20×14cm에 불과한데 광대뼈는 입매를 감싸면서 왼편은 위쪽이 툭 불거져 있고 오른편은 아래쪽이 곡선의 볼주름을 이룹니다. 그리하여 왼쪽 입매는 화난 듯 보이지만 오른쪽은 웃는 모습이 되어 기가 막힌 불균형입니다. 또 앞으로 툭 불거져 나온 이마, 올챙이 눈에 동그랗게 파여 있는 동공(瞳孔-눈동자), 끝이 뭉툭하게 잘린 주먹코, 일그러진 언챙이 입을 비롯하여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는 온갖 못생긴 것을 한데 모아놓은 듯한 얼굴이지요. 초랭이는 놀이에서 여인과 놀아나는 중을 비난하고, 양반과 선비를 우스갯거리로 만듭니다. 특히 양반과 선비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무궁화를 조선의 명화라 하지만은 사실로는 진달네(杜鵑花)가 조선의 대표명화와 가튼 감이 잇다. 진달네는 색깔이 아름답고 향취가 조흘뿐 안이라 전조선 어느 곳이던지 업는 곳이 업서서 여러 사람이 가장 넓히 알고 가장 애착심을 가지게 되는 까닭에 조선에 잇서서 꼿이라 하면 누구나 먼저 진달네를 생각하게 된다. 조선의 봄에 만일 진달네가 업다면 달업는 어두운 밤이나 태양 없는 극지(極地)보다도 더 쓸쓸하고 적막하야 그야말로 ‘춘래불이춘(春來不似春, 봄이 왔으되 봄 같지 않구나)’을 늣기게 될 것이다." 위는 일제강점기에 나온 잡지 <별건곤> 제20호(1929년 4월 1일)에 실린 이야기입니다. 머지않아 산에는 진달래로 뒤덮일 것입니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듯이 진달래 꽃잎이 휘날리면 보는 이의 맘을 싱숭생숭하게 만듭니다. 이 우리 겨레의 꽃 진달래는 다른 이름으로 참꽃 또는 두견화라고도 하는데 이 꽃잎을 청주(淸酒)에 넣어 빚은 술을 두견주라고 부르지요. 진달래술, 곧 두견주는 꽃의 향기뿐만 아니라, 혈액순환개선과 혈압강하, 피로회복, 천식, 여성의 허리냉증 등에 약효가 인정되어 신분의 구별 없이 가장 널리 빚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1915년 3월 4일 매일신보는 “난 경성 서대문이올시다.”라는 제목의 조선총독부 기관지답지 않은 기사를 실었습니다. 서대문이라고도 불렸던 돈의문의 철거를 의인화해서 ‘영원히 사라질 서대문’을 안타까워했지요. 기사는 “나는 1421년(세종 3년) 팔도장정 30만 명의 손으로 탄생한 성문 8곳, 곧 8형제 중 둘째 되는 돈의문이다”로 시작됩니다. 그러면서 “이름 덕분에 몇백 년 먹어도 갓난아이처럼 ‘새문 새문’ 소리를 듣더니…여러분과 인연이 끝나 경매되어 팔린답니다.(가운데 줄임) 조국에 변란이 일어나면 무능한 나도 국가의 간성(干城, 방패와 성)노릇을 해서 성밑에 몰려드는 적군의 탄환과 화살을 온몸으로 견뎌내고 지엄하게 한성의 서편을 지켰는데 다만 경매 몇푼에….(가운데 줄임) 도끼와 연장이 내 몸을 파괴한다는 생각을 하니 소름이 죽죽 돋아난다.”라고 이어집니다. 이로부터 3달여가 지난 6월 10일 마침내 돈의문은 일제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고 흔적도 없이 사라지지요. 당시 조선총독부는 경성(서울)을 정비한다는 명목 아래 ‘시구개정’이라는 이름으로 도성 안 각종 도로 정비를 추진 중이었는데, 이 사업의 하나로 돈의문이 철거되었습니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판소리 유파에는 크게 서편제, 동편제와 중고제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가운데 서편제는 영화 ‘서편제’로 많이 알려진 것으로 소리가 애절하고 기교적이고 붙임새도 다양하고 소리의 꼬리도 길어져서 아기자기한 맛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동편제 소리는 대마디 대장단을 선호하며 잔 기교보다는 소리 자체를 통성으로 꿋꿋하고 튼실하게 내 쇠망치로 내리치듯이 마친다고도 하지요. 그런데 중고제는 그 맥이 별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는데 《한겨레음악대사전》에서 중고제(中高制)의 설명을 찾아보면 “동편제(東便制)나 서편제(西便制)가 아닌 그 중간에 해당되는 유파라는 뜻의 중고제는 경기도 남쪽 지방 및 충청도 지방에서 성행(盛行)한 유파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중고제는 서산지역의 심정순, 심화영 등 심씨 일가에서 전승해왔으며, 후기 5명창 가운데 고종의 총애를 받은 이동백과 김창룡 등이 중고제 명창으로 유명했지요. 판소리의 음악적 구조나 선율상의 특징을 분석하고 연구한 전문가들은 중고제 소리의 특징을 무엇보다도 평탄하게 선율이 진행된다는 점을 들고 있습니다. 또한, 그 음악적 특징이 독서체여서 억양이 분명하고 노래 곡조가 간결하다는 점, 장단이 변화함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흰 저고리 고름 날리며 / 일본 칸다구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 모여 칼 찬 순사 두려워 않고 / 2·8 독립의 횃불을 높이든 임이시여! 그 불씨 가슴에 고이 품고 / 현해탄 건너 경성 하늘 아래 모닥불 지피듯 독립의지 불붙이며 / 잠자는 조선여자 흔들어 깨워 스스로 불태우는 장작이 되게 하신 이여!“ 위는 이윤옥 시인의 <잠자는 조선여자 깨워 횃불 들게 한 ‘김마리아’> 시의 일부입니다. 오늘은 김마리아(1892.6.18-1944.3.13) 선생이 고문후유증으로 눈을 감은 날입니다. 지난해 6월 18일 서울 정신여고를 방문한 일본 고려박물관 이사 도다 미츠코(戶田光子) 씨는 “김마리아 열사가 생전에 입었던 흰 치마저고리를 직접 보고 눈물이 왈칵 났습니다. 특히 저고리 앞섶 길이가 서로 다른 이유를 설명 들었을 때 일제 경찰의 악랄한 고문이 얼마나 심했나를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서울 정신여고 김마리아회관 안의 전시실에 전시된 선생의 저고리 안섶과 겉섶의 길이가 다른 까닭은 일제의 고문으로 한쪽 가슴을 잃었기에 정상인들이 입는 저고리를 입을 수 없어 특별히 지은 옷이기 때문입니다. 김마리아 애국지사는 동경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조선시대에 유행했던 돌림병 곧 전염병은 염병이라고 했던 장티푸스와 천연두, 홍역, 호열자(콜레라를 음차하여 부르던 이름) 등이 주된 것이었다고 합니다. 천연두, 곧 두창은 ‘마마’라고 하는 극존칭을 썼을 정도로 무서워하던 병이었고, 감히 두신(痘神)을 모욕할 수 없다고 해서 약을 쓰지 않기도 했습니다. 재미난 것은 호열자가 돌 때는 집 대문에 고양이 그림만 달랑 붙여 놓았다고 하는데 그 까닭은 쥐가 물어서 호열자가 생기기 때문에 쥐가 무서워하는 고양이 그림을 붙여 놓으면 호열자를 물리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지요. 요즘 코로나19 확진자와 접촉한 사람은 14일 동안 격리한다고 하는데 의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조선시대에는 활인서에서 취할 수 있는 전염병 대책으로 사람들을 병막이나 피막이라 불리는 임시 건물에 격리 수용하는 것이 전부였다고 합니다. 《인조실록》 인조 23년 2월 10일 기록에 보면 “양쪽 활인서에서 출막(돌림병에 걸린 사람을 따로 막을 치고 격리시킴)시킨 환자는 모두 696명인데, 죽은 사람이 8명이고, 완전히 나은 사람이 271명이며, 지금 병막에 남아 있는 사람이 413명이라고 합니다.”라는 내용이 보입니다. 《중종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지창토벽 紙窓土璧 흙벽에 종이창 내고 종신포의 終身布衣 평생 벼슬하지 아니하며 소영기중 嘯咏其中 시(詩)나 읊으며 살아가리 단원 김홍도의 그림 <포의풍류도(布衣風流圖)>의 화제(畵題)입니다. 그림 속에는 쌓아 올린 책과 다발로 묶인 두루마리, 중국자기로 보이는 귀가 둘 달린 병, 벼루와 먹 그리고 붓과 파초 잎, 술이 들었음직한 호리병 등이 보입니다. 선비는 비파를 연주하는데 앞에는 또 다른 악기 생황도 보이지요. 특히 이 그림의 주인공 선비는 망건 위에 쓰는 네모반듯한 사방관을 썼지만, 맨발 차림을 하고 있어 초탈한 모습을 보입니다. 이 그림은 그림의 이름처럼 벼슬하지 않은 선비의 망중한을 그린 작품이라고 하며, 단원 자신의 모습을 그렸다는 평도 받습니다. 그런데 이 방 안에 있는 것들이 당시에는 여간한 사람이 가지고 있기 어려운 진귀한 물건들이었다고 합니다. 더구나 파초 잎 옆에 놓인 아가리가 나팔꽃 봉오리 모양의 도자기는 기원전 11∼12세기 중국 상나라의 청동제기로 매우 비싼 것이었습니다.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어렵게 살았으면서도 단원은 매화 화분 하나를 큰 병풍 두 개 값에 해당하는 돈으로 사들일 만큼 수집하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나라에서 불교를 믿지 않으니, 가지고 있은들 어디에 쓰겠느냐? 달라는 대로 주는 것도 괜찮으니, 그것을 의논하여서 하라.” 그러자 노사신(盧思愼)은 말하기를, “‘대장경’은 국가의 긴요한 물건이 아니니, 내려주는 것이 편하겠습니다.” 이는 성종실록 244권 21년(1490) 9월 24일 치에 나오는 ‘일본에 대장경을 퍼주라.’라는 기록으로 이대로 했었더라면 우리나라에 그 귀한 고려대장경은 남아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한국의 국보 제32호인 《팔만대장경》은 목판본이 1,516종에 6,815권으로 모두 8만 1,258매이며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과 속장경(續藏經)은 몽골의 침입 때 불타버린 뒤 1236년(고종 23) 만들기 시작하여 1251년 9월에 완성되었습니다. 이는 현존하는 세계의 대장경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일 뿐만 아니라 체재와 내용도 가장 완벽한 것으로 오자(誤字)와 탈자(脫字)가 거의 없기로 유명합니다. 그 팔만대장경은 유교나라이기에 ‘가지고 있어야 쓰일 데가 없는 물건“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지만 일본에서 그 가치를 일찌감치 눈치채 끈질기게 대장경을 달라고 요구하기 시작했지요. 고려 우왕 14년(1388) 포로 250명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책ㆍ두루마리ㆍ옷ㆍ옷감ㆍ제사그릇 따위를 넣어 두는 길고 번듯한 큰 궤(櫃)를 우리말로 반닫이라고 합니다. 앞판의 위쪽 반만을 문짝으로 하여 아래로 잦혀 여닫기에 반닫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반닫이는 곳에 따라 철장식을 쓴 남한산성반닫이, 개구멍 여닫이문을 쓴 남원반닫이, 은입사(쇠나 구리 같은 금속에 은실을 써서 무늬를 넣는 세공기법) 되고 광두정(대가리가 둥글넙적한 장식용 못)을 쓴 통영반닫이, 숭숭이(박천) 반닫이, 제비추리 경첩을 달며 안쪽 윗부분에 세 개의 서랍이 있는 전주반닫이, 백통과 놋쇠로 조촐하게 장식한 서울반닫이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이 가운데 쇠판에 숭숭 구멍을 뚫어 무늬와 글자를 새긴 기하학적인 특성의 장식을 단 이름도 예쁜 ‘숭숭이반닫이’도 있지요. 평안도 박천지방에서 만들어 ‘박천반닫이’라고도 부르는데 추운 지방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단단한 나무보다는 무른 피나무를 써서 반닫이가 변형되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또 장식의 변형이나 빛깔이 변하는 것을 막으려고 소피에 삶았다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박천 지방의 공예기술이라고 합니다. 반닫이는 모서리를 여러 갈래로 나누어 서로 물리게 하는 사개짜임으로 맞추어 궤짝을 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