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임금이 승하한 뒤, 첫째 아들인 왕세자가 즉위한다.’ 얼핏 보아 당연한 듯 보이는 이 명제는 실현되지 못한 적이 훨씬 많았다. 조선 역사에서 임금이 승하한 뒤, 적장자로 왕위를 계승한 왕세자는 겨우 일곱 명에 불과했다. 조선왕조 스물일곱 명의 임금 가운데 문종, 단종, 연산군, 인종, 현종, 숙종, 순종만 적자이자 장자로 왕위를 계승했으며 그나마 요절하지 않고 꽤 오랜 기간 정사를 제대로 펼친 임금은 현종과 숙종뿐이었다. 웬만한 기업에서도 ‘가업 승계’와 ‘후계자 양성’은 상당히 어려운 일인데, 한 나라를 물려줘야 하는 봉건시대에 ‘왕세자 책봉’은 가장 중요하면서도 어려운 일이었다. 더구나 조선 후기로 갈수록 서자 출신 왕자들만 많거나, 서자 출신 왕자조차 거의 없거나, 적자 왕자는 있으나 군주가 지녀야 할 자질이 현저히 떨어지는 등 왕통을 잇기가 점점 어려워졌다. 고고미술사학과를 졸업하고 오랫동안 전문 역사 연구자의 길을 걸은 지은이 이준호는 임금이 되지 못한 왕자들의 비극적인 인생을 한 권의 책, 《비운의 조선 프린스》에 담았다. 물론 임금이 되지 못한 왕세자 가운데서도 천수를 누리며 잘 살다 간 이가 더러 있지만, 겉으로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조선 시대 아마도 가장 무능했던 임금 가운데 선조가 뽑힐 것입니다. 그는 무려 41년이라는 긴 세월을 통치했던 임금이지요. 임진왜란을 겪으며 온 나라가 쑥대밭이 되고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 허덕인 것은 물론이거니와 전쟁이 끝나고 발표한 공신 목록을 보면 한심하기 그지없습니다.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선무공신은 18명인데 자신이 도망치기에 급급한 상황에서 그를 수행한 호성공신은 무려 86명이나 되었기 때문이지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운 의병장인 정인홍, 김면, 곽재우, 김천일, 고경명. 조헌 등은 공신 목록에서 빠졌고 의주로 피난 가는데 일조한 마부나 의관과 같은 미천하고 별 공로도 없는 사람들은 공신 책봉을 받습니다. 난리 통이라지만 백성을 버리고 야반도주한 것도 창피한 일인데 그 도주를 도운 사람들 86명에게 공신을 내려주다니…. 참으로 부끄러운 역사입니다. 그리고는 나라를 지킨 위대한 장군과 의병들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왜적을 평정한 것은 오로지 명나라 군대의 힘 덕분이었다. 조선의 장수들은 그저 중국 군대 뒤를 졸졸 따라다니거나, 혹은 요행히 잔적의 머리만 얻었을 뿐이다.” 이것이 목숨을 바쳐 싸운 전장의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얼마 전에 가족여행으로 처음으로 싱가포르를 방문해 저녁 식사를 하는 옆자리에 박세리 선수 일행이 와 있는 것을 발견하고 인사를 나누는 기회가 있었다. 필자는 방송국의 기자였지만 대한민국의 골프사를 바꾼 세계적인 영웅인 박세리 선수를 가깝게 본 것은 처음이다. 그래서 굳이 내 소개를 하며 인사를 했고, 이에 박세리 선수는 감사하게도 (죄송, 약간 취기가 오른) 필자는 물론 필자의 손주들과 기념사진도 찍어주는 호의를 베풀어주었다. 박세리 선수와는 아주 특별한 사연이 있다. 30여 년의 기자생활 중에 유일하게 골프 취재, 그것도 박세리 선수가 우승한 대회를 취재하였으니 바로 2001년 8월 초 런던에서 열린 브리티시 오픈이었고 그 때 필자는 런던특파원으로 있었다. 당시 특파원은 골프 등 스포츠는 보통 취재대상이 아니어서 그 주에 나는 여름휴가를 간다고 일요일에 출발하는 동유럽 여행팀에 돈도 다 낸 상태였다. 그런데 막판에, 그것도 토요일에야 취재지시가 내려 난감한 상황이 되었다. 대회 3일째에 박세리 김미현 두 한국 선수가 1, 2위를 다투고 있어 취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휴가여행 일정은 아침 일찍 폴란드로 출발하는 것이었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전 국민이 책장에 한 권쯤 가지고 있을 법한 국민 베스트셀러다. 다들 주말에 시간은 많아졌으나 어디로 가야 좋을지 잘 모르던 시절,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는 ‘답사’라는 새로운 즐길거리를 열어주었다. 다들 별 관심이 없던 문화유산에 새롭게 눈을 뜨는 계기를 마련해주었고, 우리나라 곳곳에 참 보물 같은 곳이 많다는 사실을 알려주기도 했다. 그러나 문제는, 책이 좀 두껍다. 아마 책장 한 편에 꽂아두고도 처음부터 끝까지 완독한 이는 드물 것 같다. 관심 가는 지역을 사 보았더라도 조금씩 발췌독하다 상당한 분량에 눌려 슬그머니 책을 놓았을 수도 있다. 만화로 보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가 더없이 반가운 까닭이다. 《만화 문화유산 답사기》는 그 제목처럼, 유홍준 원작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누구나 쉽게 만화로 접할 수 있도록 각색한 책이다. 물론 기존의 내용을 모두 담아내진 못했다고 해도, 각 지역의 핵심 문화유산을 쉽게 파악할 수 있는 데다 책의 묘미라 할 수 있는 문화유산에 대한 참신한 관점도 잘 담겨있어 일거양득이다. 이번에 소개하는 4편, ‘경주’에서도 그런 관점이 잘 녹아있다.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평판이란 주위 사람들이 자신에 대하여 내리는 평가가 축적된 결과물입니다. 그러니 하루아침에 평판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주변에 몇몇 사람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지요. 성실하고 배려하며 감사하는 삶을 살았을 때 오랜 세월에 걸쳐 드러나게 되는 것이 평판입니다. 그러니 사람에 대한 평판은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 자신이 살아온 삶의 결과이니까요. 한비자는 사람을 다섯 가지 잣대로 잴 것을 권고합니다. 1. 누구와 만나고, 누구와 친한가? 2. 돈이 있을 때는 어디에 쓰는가? 3. 돈이 없을 때는 어떻게 행동하는가? 4. 위기에 처했을 때 어떠한 행동을 하는가? 5. 사람을 등용할 때 누구를 선택하는가? 친한 것을 따지는 것은 그 사람의 성향과 코드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대개 자신과 맞는 사람과 친하게 마련이지요.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말씀도 있으니까요. 2, 3번은 돈의 문제입니다. 씀씀이로 그 사람이 어떤 것을 소중하게 여기는지 가늠할 수 있어요. 곧 소비 성향에 그 사람의 가치체계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위기에서의 행동이 중요합니다. 사람은 위기가 닥치면 본성이 드러나기 마련입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이번 주말이 크리스마스이브, 그리고 그다음 날 일요일이 크리스마스다. 우리말로는 성탄절이라고 하는데 웬일인지 성탄절이라고 하면 너무 딱딱하고 엄숙한 것 같아 신세대들은 크리스마스라는 표현을 더 선호하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성탄절 즈음해서 많이 듣는 말이 '할렐루야'일 것이다. 교회에서 말하는 대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짐으로써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하느님의 그 아들이 이 땅에 태어난 날이니 얼마나 기쁘고 고마운가? 그야말로 구세주이신 신의 영광을 찬양해서 마땅한 날이기에, 할렐루야라는 말로 기쁨을 표현한다. 그렇게 교회 안에서도, 밖에서도, 기도하면서도, 또는 심지어는 거리에서 전도를 강요하는 분들에게서도 이 말은 자주 듣는다. 할렐루야(Hallelujah)는 고대 히브리어에서 ‘찬양하다’를 뜻하는 ‘hallel’과 유태교의 신 ‘Yahweh’의 준말인 ‘yah’가 합쳐진 말이라고 하니 글자 그대로 신을 '찬양하다', '찬양하라'의 뜻이 된다. 필자는 기독계인 대광고등학교를 다녔는데, 그 학교는 한 해에 한 번씩 세종문화회관에서 음악회를 하며 그때 헨델의 오라토리오 '메시아'에 나오는 '할렐루야' 합창곡을 꼭 불렀고,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작은 그릇 위에 큰 그릇을 포갤 수 없고 얕은 물에 큰 배를 띄울 수 없습니다. 무언가를 담아낸다고 하는 것은 이미 담기는 것보다 커다랗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탈무드에 못생긴 그릇 이야기가 나옵니다. 총명하지만 못생긴 랍비가 공주와 만납니다. 공주는 생김새를 비꼬아서 말하지요. "뛰어난 총명이 못생긴 그릇에 들어있군." 이 말을 들은 랍비가 묻습니다. "왕궁에 술이 있습니까? 그 술은 어떤 그릇에 들어있죠?" "그야 술 항아리에 들어 있지요." "왕궁에는 훌륭한 그릇이 많은데 보잘것없는 항아리를 쓰시다니…." 그 말에 공주는 술을 금 그릇으로 옮깁니다. 술은 곧 상해버리고 말았지요. 랍비는 말합니다. "대단히 귀중한 것이라도 싸구려 항아리에 넣어두는 것이 좋을 때가 있습니다." 담는 것과 담기는 것도 오묘합니다. 담기는 것은 담는 것의 모양에 따라 형태가 변화되지요. 또한 무엇을 담고 있느냐에 따라 그릇의 명칭이 바뀌기도 합니다. 물잔, 포도주잔, 커피잔, 찻잔…. 와인은 어디에 담아도 와인이고 커피는 어디에 담아도 커피일 텐데 우린 굳이 용도를 한정시켜 생각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담고 있는 생각과 마음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옛사람이 살던 집. 그곳엔 특별한 정취가 어린다. 때로는 집주인의 인품이, 때로는 집주인의 인생역정이, 때로는 집주인의 마음 씀씀이가 물씬 배는 것이 옛집이다. 그곳에 살던 사람은 떠났어도, 집은 그 자리에 남아 주인의 인생을 묵묵히 보여준다. 박광희가 쓴 책, 《옛 사람의 집》은 대원군, 기대승, 조식 등 한 시대를 풍미한 조선 최고 지식인과 권력자 11인의 삶과 영욕을 그들이 살았던 ‘집’을 통해 조명한 책이다. 다들 사극이나 역사책에서 한 번쯤 접했을 인물이지만, 그들이 살다 간 ‘집’이 주목을 받은 적은 별로 없었다. 그래서 이 책은 더욱 특별하다. 비록 지은이가 스스로 서문에 밝혔듯 백성보다 조금 더 가지고 누렸던 사회적 지배 계층의 공간에 치우쳐 있다는 한계가 있지만, 당대 최고 지성들의 삶과 생각을 집을 통해 들여다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책에 소개된 집은 하나같이 쟁쟁하다. 덕혜옹주가 살다 간 창덕궁 낙선재, 흥선대원군의 운현궁, 추사 김정희의 추사고택, 정약용의 여유당과 다산초당, 기대승의 애일당, 이내번의 선교장, 양산보의 소쇄원, 남명 조식의 산천재, 명재 윤증 고택, 맹사성과 맹씨행단, 정여창 일두고택 등 11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10. 23. 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 고맙게도 KBS 강석훈 기자가 문상을 와주었습니다. 강기자는 자기가 쓴 책이 곧 나온다더니, 10. 31. 초판이 나오자마자 나에게도 책을 보내주었습니다. 바로 《조선의 大기자 연암》이란 책입니다. 대(大)기자라니? 연암을 좋아하고 열하일기를 애독한 나로서는 순가 ‘대기자’에 혼란스러웠으나, 이내 강 기자가 연암을 ‘대기자’라고 부르는 것을 알 것도 같았습니다. 머리말에서 강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열하일기는 대기자의 면모와 식견, 실력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대장정의 르포르타주다. 르포르타주는 어떤 사건이나 현상에 대한 단편적인 보도가 아니라 특정 주제나 지역 사회를 심층 취재한 기자가 취재 내용과 식견을 바탕으로 뉴스와 여러 에피소드, 논평 등을 종합적으로 완성한 기사이다.” ‘그래! 기자의 관점에서는 《열하일기》에서 연암의 대기자의 면목을 읽어낼 수 있겠구나!’ 그런데 강 기자는 연암이 능숙한 대기자의 필치로 《열하일기》를 썼을 뿐 아니라, 연암 스스로 《열하일기》에서 자신을 ‘기자’라고 했답니다. ‘으잉? 이건 무슨 말이야? 당시에는 ‘기자’라는 개념도 없을 때 아닌가?’ 1780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지난 2년여 동안 집 뒤편 둘레길을 돌면서 하루하루 신경을 쓴 것이 있다. 바로 둘레길 입구에 세워져 있던 작은 돌탑의 존재였다. 굵은 돌 10여 개 남짓을 위로 쌓아 올린 돌탑이 하나가 서 있다가 어느 날 보면 누군가가 무너뜨려 놓았다. 돌탑은 두 개일 때도 있었지만 역시 세워지면 곧 무너졌다. 그렇게 세우고 무너트리는. 말하자면 돌탑 전쟁이 일 년 넘게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일대 계곡은 큰비가 오면 물이 넘치고 토사가 휩쓸려가 이에 대해 계곡의 바닥을 파고 굵은 돌로 물길을 새로 만드는 사방작업이 2년 전 봄 여름에 있었는데 그 공사가 끝난 뒤 가을 계곡 옆 언덕배기에 누군가가 작은 돌탑을 처음 만들어 세웠다. 그런데 며칠 뒤에는 그게 무너져 있었고 이에 다시 세워졌다가 며칠 뒤 무너지는 일이 반복되었다. 해가 바뀌면 무너뜨리는 분이 참고 넘어가 줄까 했지만, 여전히 세우고 부수고 하는 신경전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돌탑을 쌓는 분은 남이 일껏 힘들게 만들어놓은 돌탑을 왜 그렇게 부수려 하느냐고 경고성 글을 쓴 종이를 달았는데 부수는 분은 경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부수는 바람에 종이도 땅에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