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의문당(疑問堂). 추사가 유배 시절 대정향교에 써 준 현판이다. 현판을 지그시 바라보면 학문하는 자는 매사에 의문을 가지고, 호기심 어린 눈으로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는 대학자의 엄하고도 따뜻한 격려가 느껴져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게 된다. 그러나 문득, 추사의 인생에 불어닥친 거센 풍파가 머리를 스친다. 이것은 과연, 권학문(勸學文)에 관한 것인가. 추사가 평생 고관대작으로 부귀를 누렸다면 그것이 가장 유력한 해석이겠다. 그러나 추사는 혹독한 유배 시절을 거치며 자신의 인생에 대한 풀리지 않는 의문을 가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최선의 답을 찾기 위해 몸부림쳤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현판에는 훨씬 더 심오한 뜻이 담겨있는 것이 아닐까? 《제주 유배길에서 추사를 만나다》라는 이름의 책은 제주대 교육학과 양진건 교수가 유배문화를 연구하며 쓴 학술서 겸 교양서이다. ‘추사 인생 톺아보기’라 할 수 있는 이 한 권을 읽으면 그가 어찌하여 유배됐으며, 섬에서 보낸 8년 3개월의 시간은 어떠했으며, 어떤 마음가짐으로 그 지난한 세월을 견뎠는지 충분히 그려볼 수 있다. 교육학 전공자인 저자에게 유배문화는 낯선 주제였지만, 유배문학을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조선조 2대 정종 2년인 1400년 3월 15일, 임금은 권근(權近)을 정당 문학(政堂文學) 겸 대사헌(大司憲)으로 발령을 내었다. 나흘 후인 3월 19일 대사헌 권근(權近·1352∼1409)은 경연(經筵)에서 임금에게 “신이 본래 혼미하고 우직하며, 젊었을 때 일을 경험하지 못하여 관리들의 이치(吏治)에 서투릅니다. 전하께서 신을 비루하게 여기지 않으시고, 외람하게 사번부(憲司)의 장이 되게 하시니, 진실로 황공하고 진실로 기쁘나, 중외에 웃음을 남길까 두렵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도 한 가지 얻는 것이 있으니, 어찌 올릴 사항(事項)이 없겠습니까? 원하건대, 전하께서 관대히 굽어 실피셔서, 혹시 올리는 말이 이치에 해롭지 않거든 특별히 유윤(兪允)을 내려 주소서.”라고 인사를 올렸다. 그리고 보름 후인 4월 5일에 봄 가뭄이 심해지자 임슴에게 말하기를 “금년에 봄이 가무니, 벼나 곡식들이 풍성하지 못할 징조인가 두렵습니다. 신이 언관(言官)으로서 감히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근심하고 두렵게 생각하여, 다시 금주령을 내려 나라의 비용을 절약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라 금주령을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한국문화의 아름다움, 그것은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써진다. 저자는 이런 아름다움을 알아보고 그에 흠뻑 취할 수 있는 안목을 지녔다. 또, 자신이 발견한 아름다움을 더없이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는 필력도 갖췄다. 글쓴이 정목일은 이처럼 아름다움을 보는 안목과 그것을 표현하는 필력을 두루 갖춘 서정수필의 대가다. 그는 1975년 《월간문학》으로 등단한 이래 한국의 아름다움을 곡진히 풀어내는 서정수필을 써왔다. 그래서 펴낸 책도 여럿이다. 《한국의 아름다움 77가지》, 《나의 한국미 산책》에 이어 이번 책 《맛 멋 흥 한국에 취하다》까지, 일상에서 만나는 한국문화의 아름다움을 특유의 섬세한 안목으로 꾸준히 포착해왔다. 그의 글을 읽다 보면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꽃 한 송이, 도자기 한 점, 병풍 한 폭에 담긴 지극한 아름다움을 새삼 느낄 수 있다. 이 책에서는 1장 ‘한국 문화재의 미’, 2장 ‘한국의 생활미학’, 3장 ‘한국의 춤’, 4장 ‘한국의 꽃’, 5장 ‘한국 계절의 미학’, 6장 ‘달빛 서정’의 여섯 가지 주제로 한국미의 다양한 면모를 두루 보여준다. 1장 ‘한국 문화재의 미’에서는 달항아리, 백자와 홍매, 고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모든 식물은 다 나름대로 이름이 있는데, ‘이름 없는 풀’이라고 한다면 그 풀에 대한 모독입니다” 이런 말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인 적이 있다. 그래 나에게도 이름이 없고 "어이 거기 이름 없는 사람?"하고 부르면 "왜 멀쩡한 남의 이름을 놔두고 그렇게 부르는거야?"라며 짜증이 날 것이다. 우리 주위에 있는 그 많은 아름다운 꽃이나 나무들 이름, 우리는 과연 얼마나 알고, 얼마나 불러 주고 있을까? 이런 의문이 든 것은 십 년도 더 전인 2009년, 부산에 있을 때 일간신문에서 이런 글을 본 이후였다. "와! 신갈나무, 너 참 튼튼하게 생겼구나, 얼레지 오랜만에 만나네. 기린초가 있는 것을 보니 붉은점모시나비도 찾아오려나?" 이름을 안다는 것은, 숲을 이루고 있는 구성원들을 비로소 하나하나 구분하여 알아본다는 의미이며, 식물과의 인연의 시작을 말한다. 시인의 말처럼 그가 내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비로소 꽃이 되었듯이 우리가 이 나무들을, 풀들을 불러 주었을 때 그들은 의미가 되고 의도가 되며, 행복과 지혜를 건네기도 하는 그 무엇이 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때가 바로 지금까지 몰랐던, 눈부시게 아름답고 새로운 세상을 다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치열했다. 고단했다. 그리고 잔혹했다. 조선의 왕으로 산다는 것. 그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투쟁이었다. 한 나라의 군주가 된 후에는 무궁한 영광과 환희에 가득 찬 나날이 이어질 것만 같지만, 실상은 가혹한 왕관의 무게를 감당해야 하는 고단한 일상의 연속이었다. 왕은 왕실 어른과 왕비, 후궁, 세자와 같은 가족에서부터 사관, 신하에 이르기까지 안팎으로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집요하게 바라보는 시선에서 한시도 벗어날 수 없었다. 사생활 역시 국가대계와 직결되는 공적인 영역이었기에 감시 어린 눈길이 따라다녔고, 성리학 군주의 이상에 따라 언제나 완벽할 것을 요구받았다. 왕도 결국 인간이다. 그런 중압감을 오랜 시간 감당할 수 있는 이는 많지 않았다. 좋은 음식과 약재에도 조선왕의 평균 수명이 약 47살로 그다지 길지 않았던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은 듯하다. 저자 조민기는 《조선 임금 잔혹사(책비)》를 통해 왕들이 겪어야 했던 잔혹하리만치 거센 압박감을 묵직하면서도 흥미진진한 서사로 풀어낸다. 저자는 특히 조선의 왕들이 어떻게 왕위에 올랐는지에 주목한다. 왕위에 오르게 된 경위 자체가 재위 중의 치세나 후계 선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기 때문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고미숙 씨가 쓴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을 읽고 난 후, 직접 고미숙 팀이 번역한 《열하일기》를 읽었습니다. 《열하일기》를 읽으니 과연 고미숙 씨 얘기대로 연암은 호기심 제왕이더군요. 연암은 단순히 호기심으로 사물을 피상적으로만 보고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벽돌, 방구들, 수레 등 언제 그렇게 자세하게 관찰하고 연구할 수 있었을까 감탄하게 됩니다. 그것뿐입니까? 글 곳곳에 나타나는 연암의 유머에 저도 모르게 볼을 실룩거리게 됩니다. 이 가운데서 연암의 호기심 제왕다운 모습 몇 가지만 말씀드리죠. ① 연암은 머무는 곳마다 중국인들을 접촉하며 궁금한 것에 대해 열심히 묻습니다. 이러다 보니 일행이 출발할 때까지 돌아오지 않아 찾게 되고, 차려놓은 밥은 이미 식고 굳어 혼자 음식점에 들어가 급히 먹고 일행을 따라가게 됩니다. ② 요동으로 향해 가던 중 어느 마을에서는 주인이 방고래를 열고 기다란 가래로 재를 긁으니까, 그 틈에 중국 구들의 구조는 어떻게 되어있는지 열심히 살핍니다. ③ 어느 마을에서는 불을 끄고 돌아가는 수차(水車)를 보고는 잠깐 멈춰 세운 뒤, 열심히 물어보고 구조를 살핍니다. 그런데 그 짧은 시간에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요즘 자동차를 타고 지방을 여행하다 보면 나무를 베어내고 묘목을 심은 넒은 구간을 쉽게 볼 수 있다. 묘목의 크기는 10~20cm에 불과하여서 나무를 베어낸 구간은 멀리서 보면 거의 민둥산처럼 보인다. 우리나라는 산림녹화에 성공한 대표적인 나라인데, 숲의 나무를 왜 베는가? 2021년 1월 21일 산림청은 정부대전청사에서 ‘2050년 탄소 중립 30억 그루 나무 심기’ 기자회견을 열었다. 국가 목표인 탄소 중립을 달성하기 위해서 30살 이상 된 나무를 베어내고 30억 그루의 어린나무를 심겠다는 야심 찬 계획이다. 나무는 광합성을 통하여 지구온난화의 주범인 이산화탄소를 흡수한다. 그러므로 나무를 심는 일은 화석연료(석탄ㆍ석유ㆍ천연가스)를 태울 때 발생하는 이산화탄소를 줄이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나무를 많이 심겠다는 목표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 그런데도 환경단체와 전문가들은 산림청의 정책을 반대했다. 왜 그랬을까? 나무의 숫자를 늘리기 위해서는 빈 땅에 나무를 심는 것이 가장 좋겠으나, 나무를 심을 만한 놀고 있는 땅이 많지는 않다. 빈 땅이 없으므로 산림청에서는 기존의 숲에서 30살 이상 된 나무를 베고 어린나무를 심겠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며칠 전 하지가 지났다. 벌써 지난 것이다. 새해를 맞아 우리들의 마음에 희망을 채우면서 이제는 코로나 사태가 풀리겠지 하다가 안 되어 백신만 기다리며 매일매일을 보냈는데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하지가 지나고 한해의 절반도 지나간 것이구나. "우물쭈물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라고 버트란드 러셀이 묘비명에 새긴 것으로 전해졌는데, 원뜻은 그게 아니라고 하지만 원뜻과 상관없이 이 말 그대로 어여부영하다가 어느새 하지(夏至)를 그냥 보내버린 셈이다. 하지를 지난 만큼 이제 낮이 줄어들고 밤이 길어지고 있는데, 요즘엔 그냥 하루가 지난 것이지만 옛날에는 이런 하지나 동지에 대해 꽤나 신경을 썼던 것 같다. 천문을 살피고 기상 변화를 기록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치세(治世)의 기본이지만, 기상 변화를 미리 예측하기 어려웠던 고대에 나라에서 정월에 관대(觀臺)에 올라 하늘을 보고 음양의 기운, 사시사철의 흐름을 살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24절기 중에 어떤 때는 분(分)이고 어떤 때는 지(至)인가? 이런 천지와 음양의 변화를 옛사람들은 ‘분지계폐(分至啓閉)’라는 개념으로 파악했다고 한다. 춘분과 추분은 봄과 가을이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젊은 베르테르의...술품?” 그렇다. 젊은 베르테르는, 슬프다 못해 술펐다(?). 슬픈 나머지 술을 퍼마셨다고 볼 수도 있겠다. 베르테르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이 기발한 제목 덕에 이 책을 펴들게 된 것도 사실이다. 베르테르가 술 푸겠다는데(?),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으랴? 이 책은 《젊은 베르테르의 술품》이란 제목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 우리 술의 매력을 베르테르와 같은 젊은 청년의 감각에 걸맞게 요모조모 풀어낸 책이다. 가객 김창완과 전통주 전문가 명욱이 SBS 라디오, <아름다운 이 아침 김창완입니다>의 ‘젊은 베르테르의 술품’ 꼭지에서 2년 동안 주고받은 우리 술 이야기를 책으로 엮었다.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우리 술 입문서로 손색이 없거니와, 내용도 알차다. 1부 <술에 대해 궁금했던 모든 것>에서는 술의 어원과 유래부터 술의 역사까지 두루 다룬다. 발효주와 증류주의 차이, 삼국시대부터 시작된 술 문화의 역사,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양조장 3곳 등 우리 술 전반에 대한 기초 지식을 알차게 담았다. 2부 <전통주 만나러 가볼까?>에서는 조선 3대 명주인 감홍로와 이강주, 죽력고에 관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중국에 양진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가난하게 성장하였으나 배우기를 좋아하여 ‘관서 땅의 공자’라는 별칭을 얻은 사람이기도 하지요. 양진은 승진을 거듭하여 형주자사가 됩니다. 그는 부임 중에 창읍을 지나게 되는데 양진이 전에 천거했던 왕밀이 창읍의 수령으로 있었습니다. 왕밀은 밤에 몰래 황금 열 근을 가지고 와서 양진에게 건넵니다. 양진이 말하지요. "나는 그대를 아는데 그대는 나를 모르는 이유는 무엇인가?" (청렴을 몰라주는 왕밀..) "밤이 저물어 보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자네가 알고 내가 아는데 어찌 아는 사람이 없다고 말하는가?" 여기서 사지(四知)라는 고사가 나옵니다. 天知地知子知我知(천지지지자지아지)가 그것이지요. 왕밀은 부끄러워하며 그냥 돌아갔다고 합니다. 사람이 양심을 가지고 바르고 옳게 살아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세상은 그런 사람을 끌어내리려 하기도 하지요. 오죽하면 다음과 같은 속담이 있습니다. "물이 지나치게 맑으면 고기가 없다." "높은 산 정상에는 나무가 없다." "흙이 너무 깨끗하면 초목이 자라지 않는다." "고지식하고 융통성이 없으면 세상에 부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