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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왜변 때 의병으로 활약하다 순국한 박세당 선생

[맛있는 일본이야기 574]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선생님은 의연히 슬퍼하지 않고 편안하게 돌아가셨다. 영력 264년(1910) 경술 8월 28일이다. 전날 밤에 지진이 일어나고 큰 안개가 가로질러 걸쳐 있었다. 곡기를 끊은 지 23일 만에 임종하셨다. 몸은 수척하고 파리해졌으며 탈구된 상태였으며 입은 건조하고 혀는 메말라 말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돌아가시기 전에도 오히려 정신은 보존되어 있어 아직도 이불과 옷깃을 손으로 만지고 계셨다. 간혹 집안사람들을 문인으로 착각하셔서 ‘학문의 정진은 절도일 따름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의병으로 활동하다가 일제에 나라를 강탈당하게 되자 단식 23일 만에 순국한 의당 박세화(朴世和, 1834~1910) 선생의 마지막 모습에 대한 기록이다.

 

“9월 선생은 문경에서 왜군들에게 붙잡혀 서울로 송치되어 구속되었다. 왜인들이 갑오년(1894) 이후로 국정을 탈취하고 때로 위압을, 때로 복덕으로 베풀어 전행하다가 이때 와서 주(州)와 군(郡)을 합치고 성인을 모신 문묘를 헐고 합방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선생께서 그 말을 듣고 크게 슬퍼하여 말씀하시길 ‘나라를 합방하고 성인을 모신 문묘를 훼손하는 것은 나라와 도가 함께 망하는 것이다. 우리 선비된 자들이 어찌 차마 좌시하겠는가’라고 하셨다.”

 

 

이는 을사늑약(1905년 11월)이 있기 두 달 전(1905년 9월) 선생이 문경에서 왜군에 잡혀갈 때의 상황이다. 일제의 조선 침략이 없었다면 일찍이 학문에 뜻을 두어 강학(講學)을 하면서 제자를 키우던 선생의 말년도 평온했을지 모른다. 53세 때 충주를 거쳐 제천 의림지, 영월 선암, 청풍 두산 등지에서 강학하면서 제천의 장담에서 강학하던 유중교(柳重敎)와 교유하면서 많은 제자를 길러내던 선생은 제천을 중심으로 의병을 일으킨 유인석에게 제자들을 보내 지원하였다.

 

한편, 선생은 국운이 기울어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남현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청풍에서 싸우다 붙잡혔다. 이후 일제가 국권을 강탈하자 단식 23일 만에 순국의 길을 걸었다. 선생의 공훈을 기려 정부는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의당 박세화 선생은 단식 3일째(23만에 순국)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앞줄임>

도가 망하니 내 어찌하겠는가?

하늘을 우러러 한바탕 통곡하노라.

자결하여 성현께 내 몸 바치려하니

이! 그대들은 미혹치 마라

                        -  경술 중추 팔월 의당노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