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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국 변호사의 세상바라기

율곡의 ‘십만양병설’은 조작되었다

《서애연구》 2권을 읽고
[양승국 변호사의 세상 바라기 152]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지난해 봄 창간호에 이어 지난해 10월 30일 《서애연구》 2권이 나왔습니다. 이번에도 서애의 후손인 고교 친구 벽하가 2권을 보내왔습니다. 벽하 덕분에 서애 선생에 대해 많이 공부하게 됩니다. 2권의 첫글은 창간호와 마찬가지로 서애학회 회장인 송복 교수의 논문입니다. 이번 논문의 제목은 <류성용의 중용 리더십>입니다. 송교수님은 서애 일생을 한 글자로 표현하면 단연코 성(誠)이라고 하면서, 이를 박학지(博學之), 심문지(審問之), 신사지(愼思之), 명변지(明辯之), 독행지(篤行之)로 풀이해나갑니다.

 

이 가운데서 ‘박학지’를 읽으면서 생각나는 것이 있습니다. ‘박학지’란 널리 읽고 넓게 배우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조선은 성리학 외에 다른 학문은 인정하지 않았고, 특히 주희의 학설만 오로지 숭상하였습니다. 그렇기에 주희의 학설에 이설을 다는 선비는 사문난적(斯文亂賊, 교리를 어지럽히고 사상에 어긋나는 언행을 하는 사람)이라는 맹비난을 면치 못하였고, 박세당은 이 때문에 유배까지 갔습니다.

 

그런데 송 교수는 정상적인 학문을 하려면 성리학뿐만 아니라 다른 학문도 널리 넓게 두루 섭렵해야 한다는 것이 <중용>의 지론이라고 합니다. 서애가 바로 이러한 <중용>의 박학지를 실천한 것입니다. 그런데 조선의 성리학자들도 당연히 <중용>을 공부했을 텐데, 왜 박학지를 실천하지 못하고 성리학 일본주의(一本主義)에서 헤어나지 못한 것인가? 그러면서 생각합니다. ‘어떤 사상이든지 그것이 절대화하면 도그마가 되고 썩기 마련이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는 항상 생각이 열려 있어야 한다. 서애처럼!’

 

이민수 교수의 <진성리더십의 패러다임으로 본 서애 류성룡>에서는 명과 일본 사이에 오간 조선 분할 논의에 약자의 비애를 느낍니다. 명은 평양을 탈환하고 난 뒤 왜로부터 요동 보호라는 목적을 달성하자 왜와의 강화를 추진합니다. 그러면서 한강을 경계로 하는 조선 분할 얘기가 나온 것입니다.

 

이를 알고 소스라치게 놀란 류성룡이 독립자강을 주장하며 결사적으로 명을 설득하여 이를 막아냈지만, 이를 읽으며 약소국의 비애를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도 그때는 우리가 결사적으로 이를 막아냈지만, 2차 대전 때에는 우리와 상관없이 멀리 얄타에서 미ㆍ영ㆍ소가 모여 3.8선을 그어 한반도를 나누었습니다. 그 분단의 고통은 지금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날 우리에게 서애와 같은 리더는 없는 건가요?​

 

<십만양병설의 실체>에서는 류을하 박사가 율곡의 ‘십만양병설’이 어떻게 조작되었는지를 치밀하게 추적하여 밝혀냅니다. 십만양병설은 처음에 율곡의 제자 김장생이 <율곡 가장(家狀)>에서 느닷없이 주장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후 서인들에 의해 조금씩 허위가 강화되어 나중에는 《선조수정실록》에도 들어가면서 정설처럼 굳어진 것입니다. 단순히 율곡의 십만양병설만 부각한 것이 아니라, 서애가 이에 반대했다며 서애를 깎아내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서인이 자신들의 태두 율곡을 추켜 올리면서 이와 대비하여 동인의 서애를 깎아내린 것입니다. 그러나 군사 10만을 양병한다는 것은 당시 조선의 국력으로서는 어림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율곡이 왜의 침략을 예견하고 10만 양병설을 주장하였다면 구체적인 양병 대책까지 내놓아야 하는데, 이런 것이 없었습니다. 실제로 율곡은 당시 조선의 형편상 양병보다는 양민이 중요하다고 여겼었지요.

 

조선시대에는 당쟁 때문에 그리고 조선 후반을 서인이 특히 그 가운데서 노론이 지배하였기 때문에 율곡의 10만 양병설이 정설로 굳어졌다고 칩시다. 그렇다 하더라도, 철저한 고증과 실증을 우선으로 하는 현대 국사학계에서는 왜 율곡의 10만 양병설이 오랫동안 정설로 내려왔던 것일까요?

 

이는 대한민국의 초기 사학계를 지배한 이병도 박사가 율곡의 10만 양병설을 주장한 이후 감히 그 후학들이 이를 뒤집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신진사학자들이 10만 양병설의 허구를 실증하고 있는데, 정박 효과(anchoring effect, 배가 닻을 내리면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초기에 제시되는 것이 일종의 선입관으로 작용해 판단에 영향을 주는 효과) 때문인지 지금도 율곡의 10만 양병설에 기초하여 글을 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무튼, 류을하 박사의 논문으로 10만 양병설에 대한 논쟁은 끝났으면 합니다.​

 

또 하나 이번 《서애연구》 2권에서 알게 된 것은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하는 바로 그날에 서애도 주화오국(主和誤國, 왜란과 호란 당시 적국과 화친을 주장하여 나라를 망침)의 누명을 쓰고 파직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순신 장군을 임진왜란 발발 1년 전에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몇 단계 특진으로 전라좌수사에 임명되게 한 서애가 그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는 날 파직되었다는 것은 두 사람 사이의 어떤 운명적인 끈이 있었다는 느낌이 들게 합니다.

 

서애는 파직되어 고향 안동으로 내려갈 때는 여비도 제대로 마련하지 못할 정도로 청렴한 선비였습니다. 그야말로 서애는 임진왜란 기간에 자기 개인적 이익은 염두에 두지 않고 오로지 어떻게 나라를 살릴 것인가에만 몰두한 진정한 선비였습니다.

 

 

그런 선비였기에 선조가 파직된 서애를 몇 번이나 다시 불러도 응하지 않고 그저 《징비록》 집필에만 힘을 기울였습니다. 실제 전란에서 나라를 구한 서애는 자기의 다음 사명은 전란의 소상한 내용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후세에 다시는 이런 전란을 겪지 않게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책 제목도 《징비록(懲毖錄)》이라고 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 조선의 양반들은 이런 서애의 간절한 바람도 저버리고 당쟁에나 골몰하다가 서애가 그렇게 왜에서 지켜낸 나라를 결국에는 일본에 바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징비록은 오히려 일본에서 귀중하게 여기는 책이 되었지요.​

 

이렇게 얘기를 풀어나가다 보니 저도 슬슬 열이 오르기 시작합니다. 열이 더 오르기 전에 여기서 멈춰야겠네요. 앞으로도 서애학회에서 더욱더 서애의 정신을 세상에 널리 펴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