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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지원의 우리문화책방

퇴계의 예던길, 이토록 멋진 길 아니 예고 어쩌리

[맛있는 서평] 《퇴계의 길을 따라》, 김병일, 나남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고인도 나 못 보고 나도 고인 못 뵈.

고인을 못 뵈도 예던길 앞에 있네

예던길 앞에 있거든 아니 예고 어쩌리

 

              - 이황 ‘도산십이곡’ 중 제9곡 (p.4) -

 

고인은 더는 세상에 없어도, 고인이 걷던 길은 앞에 있다. 퇴계가 지은 도산십이곡에 나오는 ‘예던길(녀던길)’은 옛 성현이 걸어갔던 길, 곧 올바른 삶의 길을 뜻한다. 비록 퇴계는 수백 년 전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걸었던 선비의 길은 고스란히 남아 있으니 어찌 아니 걸을 수 있으랴.

 

김병일 도산서원 원장은 퇴계가 예던길을 뚜벅뚜벅 걷고 있는 이 시대의 선비다. 1971년 공직 입문 이래 2005년까지 경제 관료로 봉직하며 통계청장, 조달청장, 기획예산처 장관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그리고 은퇴한 뒤 2008년 2월 경북 안동으로 내려가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 이사장을 맡으며 지금까지 도산에서 주로 지내고 있다.

 

김병일 이사장이 지은 《퇴계의 길을 따라》는 퇴계의 학문과 사상, 정신과 더불어 그가 걸어간 삶의 행적을 두루 조명하면서, 퇴계의 삶에서 배울 수 있는 선비의 덕목을 전하는 책이다. 수필 형식으로 구성된 이 책을 따라가다 보면 퇴계에 대해서 잘 모르던 사람이라도 그가 어떤 인물이었으며, 오늘날까지 그렇게 칭송받는 연유가 무엇인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1부 ‘퇴계의 향기를 따라’에서는 선비정신을 일깨워주는 퇴계의 각종 면모를 살펴보는 한편, 퇴계가 정계에서 물러나 도산으로 내려가던 마지막 귀향길과, 저자가 기획했던 귀향길 재현 행사를 비중 있게 다룬다. 이 귀향길 재현 행사는 당시 퇴계의 일정과 행로에 맞추어 12박 13일 동안 800리 길을 걷는 것이었다.

 

2부 ‘다시 선비처럼’에서는 최근 사회가 당면한 어려움을 해결할 방안으로 ‘선비정신’을 제시하며, 오늘날 필요한 선비정신의 요체를 짚어본다.

 

3부 ‘착한 사람들이 만드는 세상’에서는 퇴계가 이루고자 했던 ‘착한 사람이 많아지는 세상’을 살펴보며, 퇴계가 진정 원했던 세상이 어떤 것인지를 탐색한다.

 

4부 ‘길 위의 아름다운 유산’에서는 선비문화수련원 원장으로 보람찬 노년을 보내고 있는 저자의 소회와 선비문화수련원의 설립자인 퇴계 종손 이근필 옹의 근황,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오른 한국의 9개 서원과 유교 책판 등 오늘날에도 살아 숨 쉬는 퇴계의 유산을 다룬다.

 

퇴계는 대학자였던 만큼 학문도 출중했지만, 무엇보다 보기 드문 인격자였다. 7남매 가운데 막내로 태어나 홀어머니 아래에서 불우한 환경을 딛고 최고의 학자가 되었고, 모두가 우러러보는 위치에 올랐음에도 빼어난 공감능력과 겸손함으로 자신을 찾아오는 제자는 물론, 집안의 노비와 며느리, 부인에 이르기까지 그 누구도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항상 자신을 낮추고 또 낮추어 사람들이 자신을 어려워하지 않도록 배려했다.

 

 

이는 퇴계가 끊임없는 독서와 사색, 실천으로 선비정신을 완전히 체득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퇴계가 몸소 실천하며 보여준 선비정신의 요체는 크게 다섯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착한 사람을 길러내기 위해 끊임없이 배우고 수련하는 것이다. 퇴계가 높은 벼슬보다 진정 원했던 것은 ‘이 세상에 착한 사람이 많아지는 것’이었다. ‘소원선인다(所願善人多)’로 요약되는 퇴계의 이러한 이상향은 하늘이 부여한 선한 본성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많은 세상이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선비는 끊임없는 독서와 사색을 통해 사람들에게 착하게 사는 길을 제시해야 했다. 무릇 선비란 ‘널리 배우고(博學), 깊이 묻고(審問), 신중히 생각하고(愼思), 명확하게 분별하고(明辯), 독실하게 실천하는(篤行)의 5단계 공부법 위학지서(爲學之序)을 생활화한 사람이었다.

 

둘째, 지행병진이다. 퇴계는 50대에는 계상서당에서, 60대에는 도산서당에서 선인을 길러내기 위해 직접 솔선수범하며 가르쳤다. 스승이 말로만 인간의 도리를 외치고 행동은 딴판이라면 그 가르침은 이미 빛을 잃는다. 퇴계는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지행합일을 보여줬기에 그토록 많은 제자의 신망과 존경을 얻을 수 있었다.

 

셋째, 겸손과 배려다. 퇴계는 나이나 성별, 신분의 고하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을 존중하고 배려했다. 이는 지극히 겸손한 마음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어려운 일이다. 그는 어떤 제자도 하대하지 않고 인격체로 존중했고, 제자가 다른 생각을 얘기하면 고마워하며 경청했다. 평소에도 “자기를 버리고 남을 따르지 못하는 것은 배우는 사람의 큰 병통”이라며 자기 생각만 고집하는 것을 경계했다.

 

자신보다 26살이나 어린 고봉 기대승과 사단칠정 논쟁을 8년 동안이나 펼칠 수 있었던 것도 이처럼 학문적으로 겸허한 자세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당시 사회적 약자였던 여인이나 하인들에게도 아낌없이 배려와 친절을 베풀어 오늘날까지도 많은 미담이 전하고 있다.

 

넷째, 허물은 감싸주고 장점은 칭찬하는 은악양선이다. 사람은 누구나 장단점을 함께 가지고 있지만, 단점보다는 장점을 보아야 한다. 어찌 보면 이것도 사람의 착한 본성을 이끌어내는 일이며, 그 사람이 가진 이런저런 단점에도 장점을 주목하고 북돋워 주는 것이 선비의 태도다.

 

다섯째, 선우후락이다. 모두가 어려워하는 일은 먼저 하고 모두가 먼저 즐기려 하는 일은 양보하는 것이 지도자로서의 선비정신이다. 임진왜란 때 글 읽던 선비들이 의병으로 분연히 일어선 것도 선우후락에 바탕한 책임감을 보여준 것이다. 사회를 이끄는 지도자라면 마땅히 궂은 일을 먼저 맡는 희생정신이 필요하다.

 

 

 

지금으로부터 약 450년 전 1569년, 퇴계는 십수 년 동안이나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갈 것을 청하던 끝에 69살이 되어서야 마침내 선조의 윤허를 받았다. 이미 고향의 시냇가로 물러나겠다는 결심으로 50살 즈음 호도 ‘퇴계(退溪)’로 지었으나, 계속되는 조정의 간곡한 부름으로 낙향과 출사를 반복하던 그는 마침내 벼슬길에서 물러나 14일 동안의 여정을 거쳐 고향 토계리의 자연인으로 돌아갔다.

 

고향에서 선인을 길러낸 퇴계의 ‘선한 영향력’이 면면히 이어진 덕분인지, 안동에는 유난히 독립유공자가 많다. 인구 17만 명에 독립유공자가 358명으로, 인구 1천만의 서울과 비슷한 수치다. 500년 명문가의 후손으로 나라를 잃자 전 재산을 팔고 분연히 만주로 떠나 독립운동에 투신한 석주 이상룡 선생 일가, 그리고 ‘파락호’를 자처하며 노름판에서 돈을 잃는 척 막대한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한 학봉 종택 김용환 종손 등, 나라가 어려울 때 고통을 짊어진 명문가가 즐비하다.

 

이러한 퇴계의 선한 영향력을 이어가기 위해 퇴계 16대 종손 이근필 옹은 2001년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을 설립하고 ‘착한 사람’을 길러내는 데 힘쓰고 있다. 2018년에는 한 해 수련생이 약 16만 명에 달할 만큼 퇴계를 배우려는 이들이 늘고 있다. 이근필 옹은 수백 년 전 퇴계 선생이 그랬듯, 선비문화를 배우기 위해 찾아오는 이들을 깍듯이 예우하며 겸손과 배려를 실천하고 있다.

 

(p.11)

당시에 예던길을 몇 해를 버려두고

어디다 다니다가 이제야 돌아온고

이제야 돌아오나니 딴 데 마음 말리라

 

                         - 도산십이곡 중 10곡 -

 

예던길은 버려지기 쉽다. 더 쉬운 길, 지름길을 제쳐두고 예던길을 가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예던길이 돌아가는 것처럼 보여도, 결코 느리지 않다. 이 책은 예던길을 벗어나 다른 길에서 방황하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이제 돌아오라고, 다시 돌아오면 딴 데 마음 말라고 넌지시 말하고 있는 듯하다. 퇴계의 선비정신을 따라 선한 이를 길러내고 싶은 이들에게 특히 일독을 권한다.

 

《퇴계의 길을 따라》, 김병일, 나남, 17,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