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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국 변호사의 세상바라기

허균, 매창의 죽음을 슬퍼하다

허균과 매창의 아름답고 순수한 사랑
[양승국 변호사의 세상 바라기 164]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妙句堪擒錦 淸歌解駐雲(묘구감금금 청가해주운)

偸桃來下界 竊藥去人群(투도래하계 절약거인군)

燈暗芙蓉帳 香殘翡翠裙(등암부용장 향잔비취군)

明年小桃發 誰過薜濤墳(명년소도발 수과벽도분)

 

신묘한 글귀는 비단을 펼쳐 놓은 듯하고

청아한 노래는 머문 구름도 풀어 헤치네

복숭아를 딴 죄로 인간세계로 내려오더니

불사약을 훔쳐서 인간세상을 떠나네

부용꽃 휘장에 등불은 어둡기만 하고

비취색 치마에는 향내 아직 남아있는데

이듬해 작은 복사꽃 필 때쯤이면

누가 설도의 무덤을 찾으리

 

 

1610년 허균은 부안의 기생 매창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매창 계생을 애도하며 쓴 시입니다. 매창이라면 황진이와 함께 조선시대 대표적인 기생 시인 아닙니까? 학교 다닐 때 교과서에 실린 “이화우(梨花雨) 흩뿌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임...”하는 그녀의 시를 외우려고 하던 것이 생각나네요. 부안에서는 지금도 매창을 기려 매창공원도 조성하고 해마다 매창문화제도 열고 있습니다.

 

그런데 허균이 어떻게 매창을 알게 되었기에 그녀를 애도하는 시까지 썼을까요? 허균은 1601년 조운판관(漕運判官, 조운선의 정비, 세곡의 운반과 납부 등을 관장하는 종5품 관직)이 되어 전라도에 내려갔을 때 부안에서 처음 매창을 만납니다. 고을 수령은 조운판관이 오니 기생을 수청들게 하였는데, 이때 수청든 기생이 매창입니다. 그러나 둘은 이내 시(詩)로서 의기 소통하여, 종일 술잔을 나누며 시를 주고받았습니다. 아마 허균은 역시 시인인 자신의 죽은 누나 허난설헌이 생각나서 더욱 매창과 가까워졌을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시로서 맺어졌기에 둘은 잠자리는 하지 않고, 대신 매창은 그녀의 조카를 허균의 잠자리에 들여보냅니다. 아마 시로서 맺어졌기에 그렇기도 하겠지만, 매창에게는 이미 사랑하는 남자 유희경이 있기에 더욱 그랬을 것 같습니다. 이후 둘은 시로서 계속 인연을 맺어갑니다. 1609년에는 허균은 아래와 같은 편지를 매창에게 보내기도 합니다.

 

“봉래산의 가을이 한참 무르익었으려니 돌아가려는 흥취가 도도하오. 아가씨는 반드시 내가 시골로 돌아가겠다는 약속을 어겼다고 웃을 것이오. 만약 그 시절에 한 생각이 잘못되었더라면 나와 아가씨의 사귐이 어떻게 십 년 동안이나 그토록 다정할 수가 있겠는가?... 어느 때나 만나서 하고픈 말을 다 할는지, 종이를 대하니 마음이 서글프오.”

 

허균으로서는 이 편지를 보내고 난 뒤 매창과 재회할 기회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매창이 그렇게 빨리 세상을 떠나니 너무나 애통하여 이런 시를 쓴 것이겠네요. 시에서 허균은 매창을 선도복숭아를 딴 죄로 인간세상에 귀양 온 선녀로 표현하고 있군요. 그런가 하면 시 마지막에서는 매창을 당나라 여류 기생시인 설도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허균은 매창을 이렇게 깊게 생각했기에 그가 조선의 명시를 모아 펴낸 《국조시산(國朝詩刪)》이란 시선집에도 매창의 시를 수록하였습니다. 허균과 매창의 아름답고 순수한 사랑. 그런 사랑의 애절함이 배어나는 허균의 시를 다시 음미해봅니다. 아! 계랑! 왜 그리 빨리 가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