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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국 변호사의 세상바라기

타락한 십자군

《비잔티움 연대기(존 줄리어스 노리치)》 이야기 2
[양승국 변호사의 세상 바라기 166]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이 이야기를 어디서 시작하고 어디서 끝내야 할지 나 자신도 모를 지경이다. 그들은 성상을 부수고, 순교자들의 신성한 유물을 말하기조차 부끄러운 곳에 집어던졌으며, 구세주의 살과 피를 아무 데나 마구 뿌렸다. 이 적그리스도의 사자들은 성배와 성반을 빼앗아 보석들을 뜯어내고 술을 따라 마셨다....... 대성당에 대한 신성모독은 생각만 해도 끔찍할 정도였다.

 

그들은 주제단과 전 세계가 감탄하는 예술품들을 파괴하고 그 조각들을 자기들끼리 나눠 가졌다..... 그리고 그들은 말과 노새를 성당 안에까지 끌고 들어와서는 제기, 옥좌에서 뜯어낸 조각이 새겨진 금과 은, 연단, 문짝, 가구 등을 닥치는 대로 실어 날랐다. 짐의 무게를 못 이겨 말과 노새 몇 마리가 쓰러지자 가차없이 칼로 죽여 버리는 바람에 성당 안에는 온통 짐승들의 피와 악취가 가득했다.

 

한 매춘부가 총대주교의 좌석에 앉아서 예수 그리스도의 상을 향해 욕설을 퍼붓고, 음탕한 노래를 부르고, 신성한 장소에서 불경스러운 춤을 추었다............. 고결한 부인들이나 정숙한 처녀들, 심지어 신에게 봉헌된 처녀들에게까지도 전혀 자비가 베풀어지지 않았다..... 거리의 주택과 성당에서는 울음과 탄식만 흘러나왔다.”

 

 

제4차 십자군(1202~1204)이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였을 때 약탈 장면을 비잔틴 제국의 역사가 니케타스 코니아테스가 그린 글입니다. 《비잔티움 연대기》의 저자 존 줄리어스 노리치가 자신의 책에 인용하고 있는 부분이지요.

 

십자군이라면 동방 이슬람 세력에 의해 위협받는 비잔틴 제국을 구하고 성지 예루살렘을 회복하고자 유럽에서 십자가를 걸고 모인 군대 아닙니까? 십자군은 제1차 십자군(1096~1099)부터 제8차 십자군(1270)까지 모두 8차례에 걸쳐 일어났지요. 그런데 그 가운데 제4차 십자군은 가장 타락한 십자군이었습니다. 니케타스 코니아테스는 이들을 아예 적그리스도의 사자들이라고 신랄하게 비난하는군요.

 

명색이 십자군인데 왜 이들은 같은 기독교 형제국가인 비잔틴 제국을 약탈했을까요? 사실 처음 십자군은 종교적 열정에 의해 시작되었겠지만, 이때에 오면 종교적 열정보다는 세속적인 욕망과 경제적 목적이 더 앞섭니다. 그리고 다른 십자군들은 그래도 성지를 향하여 갔지만, 이들은 처음부터 이집트로 가려고 하였습니다. 이슬람의 본거지를 공략하겠다는 것이었지요. 이들은 이집트로 가기 위해 베네치아로 모였습니다. 베네치아의 배를 빌려 이집트로 가려던 것입니다. 그러나 애초 오기로 하였던 십자군의 반의 반도 오지 않아 배를 빌린 돈도 모자랐습니다.

 

이때 노회한 베네치아의 도제(총독)인 엔리코 단돌로는 배삯을 면제해줄 테니 차라를 공격하라고 십자군을 부추깁니다. 차라는 원래 베네치아의 영향권에 있었는데, 그 무렵에는 베네치아를 배신하고 헝가리 왕국에 붙었기에 이 기회에 십자군을 이용하여 차라를 다시 찾으려는 생각이지요.

 

단돌로가 노회하다고 하였는데, 실제로 단돌로가 1193년에 도제가 되었을 때 이미 85살이었으며 눈까지 멀었다는군요. 85살이면 지금도 고령이지만 당시로서는 거의 무덤 앞까지 간 나이인데, 단돌로가 10 년 뒤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할 때에도 놀라운 활약을 보여주었다니 믿기지가 않을 정도입니다. 하여튼 십자군이 이슬람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기독교 도시를 공격한 것을 알게 된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격분하여 십자군 전체를 파문합니다. 이제 십자군은 교황에 의해 파문되었으니 성전을 계속할 명분도 없어졌습니다.​

 

이때 망명한 비잔틴 제국의 황자 알렉시우스 앙겔루스가 십자군의 대표인 보니파키우스를 찾아와 제안을 합니다. 자신의 큰아버지인 황제 알렉시우스 3세를 내쫓고 자신을 황제로 앉혀주면 이집트 정복 비용을 제공하고, 자비로 병사 1만 명과 기사 500명을 성지에 주둔시키겠다는 것이지요.

 

앙겔루스의 제의를 두손 들어 환영한 보니파키우스는 엔리코 단돌로와 상의를 합니다. 베네치아 함대의 도움이 없이는 실현할 수 없는 계획이었기 때문이지요. 그러자 단돌로도 쌍수를 들어 환영합니다. 당시 베네치아는 동방의 시장을 놓고 제노바와 피사와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었으므로 계획이 성공하면 베네치아가 두 도시를 깔고 선두로 치고 나갈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리하여 콘스탄티노플 공격은 성공하고 약속대로 알렉시우스 앙겔루스가 황제에 오릅니다. 그러나 뒷간 갈 때와 올 때의 생각이 다르다고 앙겔루스는 약속을 지키지 않습니다. 사실 약속을 지키고 싶어도 이미 비잔틴 제국의 곳간은 텅텅 비어 지킬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자 십자군은 재차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합니다. 위 니케타스 코니아테스의 글은 이 당시 십자군의 약탈 장면을 기록한 것입니다. 당시의 약탈이 얼마나 심했던지, 노리치는 250년 뒤에 콘스탄티노플이 마지막으로 오스만 터키에 의해 함락될 때에도 이때만큼 암울하지는 않았다고 한탄합니다.

 

이렇게 하여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한 십자군은 아예 플랑드르 백작 보드윙을 황제로 하여 라틴제국(1204~1261)을 세웁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태어난 라틴제국도 지리멸렬하다가 도망친 황제 알렉시우스 3세의 사위인 테오도로스 라스카리스가 세운 니케아 제국에 의해 1261년에 멸망합니다. 그러니까 콘스탄티노플은 57년 동안 서유럽인들의 지배를 받다가 다시 나라를 찾은 것이지요. 제4차 십자군 전쟁에서 제일 덕을 본 측은 어디일까요? 바로 베네치아 공화국입니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함선 임대료를 받았고, 십자군을 이용하여 차라를 다시 차지하였을 뿐 아니라, 경쟁도시들을 따돌리고 동지중해의 상권을 장악하였습니다.

 

베네치아 산마르코 성당에 가면 성당 입구 위에 힘차게 발돋움을 하고 있는 네 마리의 청동 말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복제품이고 진품은 성당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데, 이 네 마리의 청동말은 위 약탈 당시 베네치아인들이 베네치아로 가지고 온 것입니다. 노리치는 위 약탈 당시 프랑스인과 플랑드르인은 대대적인 파괴에 광적으로 열중했으나, 베네치아인들은 이성을 잃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성을 잃지 않았다는 것이 파괴하지 않고 약탈하여 베네치아로 가지고 왔다는 것이지요.

 

 

저도 전에 베네치아에 갔을 때 이 청동말을 보았지만, 그때는 그런 역사적인 사실을 모르고 그저 말들이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것 같은 느낌만 받았습니다. 역사적 유물이 많은 곳은 미리 예습을 철저히 하고 갔어야 하는데... 이래서 아는 만큼만 보인다는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