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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지원의 우리문화책방

조선 선비의 ‘인생 과업’, 과거시험의 모든 것!

《과거제도 조선을 들썩이다》 이광희ㆍ손주현 지음, 박양수 그림, 푸른숲주니어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지금도 수능이 다가올 무렵이면 온 나라가 들썩들썩하지만, 조선에서도 과거시험은 온 나라의 관심이 집중되는 ‘뜨거운 감자’였다. 지금처럼 진로가 다양하지 않던 시대, 과거시험은 벼슬에 나아가 뜻을 펼치고자 한다면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이자 평생을 바쳐 이뤄내야만 하는 ‘인생과업’이었다.

 

때로는 일찍 과거에 급제, 순탄하게 벼슬길에 나아가기도 했으나 현실은 녹록하지 않았다. 지금의 ‘고시낭인’ 못지않게 ‘과거폐인’도 많았고, 평생을 적성에 맞지 않는 과거시험에 매달리느라 고생하는 이들도 많았다. 다른 길을 찾고 싶어도, 양반은 과거에 합격해 벼슬을 하는 것 외에 달리 선택지가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폐지될 때까지 수많은 이들의 피, 땀, 눈물을 삼킨 채 936년간 치러졌던 과거시험. 이 책 《과거제도 조선을 들썩이다》는 그런 과거시험의 모든 것을 청소년의 눈높이에 맞추어 친절히 풀어낸 책이다. 책에서 풀어내는 과거시험의 이모저모를 문답 형식으로 재구성해 보았다.

 

 

1.한양에 사는 것이 과거 급제에 유리했다?

 

그렇다. 과거시험은 확실히 한양, 그중에서도 성균관에서 공부하는 유생에게 여러모로 유리했다. 과거시험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합쳐 총 936년간 치러졌고, 조선에서만 502년간 지속되었으며, 정기시험인 ‘식년시’와 부정기시험인 ‘별시’를 합쳐 총 848회가 열렸다.

 

그중 식년시가 163회, 별시가 581회였으니 정기 시험보다 부정기 시험이 훨씬 더 많이 열린 셈이다. 급제자 수 또한 문과에 급제한 총 14,620명 중 별시로 급제한 인원만 8,000명이 넘어 식년시보다 더 많았다. 별시는 대체로 한양에서 갑자기 치러지는 경우가 많아 시험장 근처에 사는 사람이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2. 대과 최연소 합격자와 최고령 합격자의 나이는?

 

과거시험은 예비시험 성격의 소과, 본시험 성격의 대과로 나누어져 둘 모두를 통과해야 비로소 문과 급제의 영광을 안을 수 있었다. 대과의 최연소‧최고령 합격자는 모두 고종 시기 배출됐다. 먼저, 최연소 합격자는 14세로 합격한 이건창이다. 이건창은 성품이 강직해 한번 옳다고 생각하는 일은 절대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최고령 합격자는 무려 85세의 나이로 합격한 정순교이다. 지금도 85세는 상당한 노익장이니, 당시의 체감 나이로는 105세쯤 되지 않았을까. 고종은 나이를 고려해 바로 정3품의 관직을 내렸지만, 아쉽게도 한두 해 뒤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3. 무려 5형제가 동시에 급제하기도 했다?

 

그렇다. 이예장 형제와 안중후 형제가 그 주인공이다. 5형제가 모두 합격하면 나라에서는 그 부모에게 해마다 쌀 스무 석을 내렸다. 한 집안에 한 명도 나오기 어려운 급제자를 다섯 명을 배출하다니, 정말 엄청난 가문의 영광이 아닐 수 없었다. 사람들은 5형제가 과거에 급제했음을 뜻하는 ‘오자등과(五子登科)’를 새긴 동전을 만들어 아들을 낳으면 노비들에게 선물로 내리기도 했다.

 

4. 서자와 노비 출신 급제자도 있었다?

 

그렇다. 세조 때 인물인 유자광 같은 특별 사례도 있었다. 그는 서얼이었음에도 임금의 특별 허락을 받아 과거시험을 보았고, 심지어 장원 급제까지 했다. 그러나 우수한 성적을 받았음에도 대신들의 반대에 부딪혀 중요한 관직에는 등용되지 못했다. 서자보다 더 낮은 신분이었던 노비 반석평은 중종 시절, 그의 명석함을 알아본 주인이 특별히 천인 신분을 면해주고 다른 사람의 양자로 들여보내 과거시험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열심히 공부에 매진한 그는 훗날 급제하고 판서 자리까지 올랐다.

 

5. 퇴계 이황, 오성 이항복도 과거시험에 낙방했다?

 

역사책에서 자주 접했던 위인들도 과거시험에 떨어지곤 했다. 가끔 율곡 이이같은 ‘공부의 신’이 나오기도 했지만, 대체로 여러 번 떨어지는 것이 보통이라 크게 부끄러워할 일은 아니었다. 퇴계 이황은 예비시험 성격의 소과에서 세 번 떨어졌지만, 포기하지 않고 도전해 27살의 나이로 소과(진사시)에 합격해 성균관에 입학했고, 다시 공부에 정진해 서른셋에 대과에 합격했다.

 

선조 시기 영의정까지 역임한 명신(明臣)이자 ‘오성과 한음’ 일화로 유명한 오성 이항복은 초시, 복시로 나누어 치러지는 소과에서 초시에는 합격했지만 복시에서 낙방하는 바람에 성균관 입학 자격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성균관에 너무 들어가고 싶었던 그는 성균관에 일종의 ‘특례입학생’ 이었던 ‘기재생’ 신분으로 입학을 했다. 보통은 소과에 합격해야 성균관 입학 자격이 주어졌지만, 종종 한양에 있는 국립 중등학교인 사부학당에서 시험에 통과했거나 대신들의 자제인 이들이 입학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후 이항복은 5년 동안 열심히 공부해 성균관에서 치르는 대과 성격의 시험인 알성시에 급제해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6. 과거시험을 거부한 금수저 능력자도 있었다?

 

소설 《열하일기》로 유명한 박지원은 노론 명문가라는 좋은 집안 배경에, 소과 초시와 복시에서 장원을 휩쓴 금수저 능력자였다. 그러나 정조 임금은 열하일기에 쓰인 그의 문체를 꾸짖으며 옛글의 문체를 따르라고 강요했다. 틀에 박힌 과거시험에 염증을 느낀 그는 그다음 시험부터 백지 답안지를 몇 번 내고는 아예 관직에 진출할 뜻을 접었다. 이후 뜻을 같이하는 동료를 모아 ‘백탑파’를 결성,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실학’ 연구에 매진했다.

 

7. 신임 관료들의 신고식인 ‘신참례’를 거부한 이가 있었다?

 

과거에 급제하고 관직을 제수받고 나면 혹독한 신고식인 ‘신참례’가 기다리고 있었다. 신참례는 생각보다 극성맞아서 《경국대전》에도 신참들을 심하게 골리면 곤장 60대를 친다는 규정까지 있을 정도였다.

 

다들 불합리한 걸 알지만 ‘관례’라는 이유로 참고 넘기고 있을 때, ‘아니오!’를 당당히 외친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율곡 이이다. 이이는 외교 문서를 다루는 승문원에 처음 임명되었는데, 신참례를 단호히 거부하다 결국 관청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그러나 워낙 능력이 출중했던 그는 다시 과거를 봐서 장원을 차지한 뒤 더 좋은 자리로 가는 쾌거(?)를 보여주었다. 무사히 중요한 관직에 자리를 잡은 이이는 상소를 올려 신참례는 추잡한 행사니 금지하라고 건의했고, 이이를 아꼈던 선조는 즉시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도 잠깐뿐, 신참례는 그 이후로도 악명을 떨쳤다. 신참례에 치를 떨었던 이이는 자신이 병조판서로 있는 동안 병조만이라도 신참례를 벌이지 않도록 엄중히 감시했다고 한다.

 

이 밖에도 무과, 잡과 등 과거시험의 다양한 종류와 성균관 유생들의 공부 방법, 과거시험에 얽힌 놀라운 사연 등 다양한 이야깃거리가 재밌게 정리되어 있다. 200페이지를 넘지 않는 얇은 분량이지만, 과거제도의 모든 것을 ‘짧고 굵게’ 정리한 편집력이 돋보인다. 평소 과거제도에 관심 있던 독자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과거제도 조선을 들썩이다》 이광희‧손주현 지음 / 박양수 그림 / 푸른숲주니어 / 13,8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