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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지원의 우리문화책방

편지로 인생을 가르친, ‘열혈아빠 정약용’

《아버지 정약용의 인생강의》, 오세진, 홍익출판사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오늘날 대대로 높은 벼슬아치 집안의 자제들이 관직을 얻고 가문의 이름을 떨치는 것은

평범하고 우매한 자제라도 능히 할 수 있는 일이다.

오늘날 너희는 폐족의 자식들이다.

만약 폐족이라는 어려움을 딛고 잘 처신하여 이전보다 더 훌륭한 가문을 만든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으로 놀랄 만하고도 훌륭한 일일 것이다.

(p.10)

 

‘폐족의 자식들’. 칼날 같은 이 표현이 폐부를 찌른다. 폐족(廢族)은 조상이 큰 죄를 지어 그 자손이 벼슬을 할 수 없게 된 족속을 말한다. 그랬다. 걸출한 당대의 학자이자 정조의 총애를 한 몸에 받던 전도유망한 관료, 다산 정약용은 임금이 바뀌자 한순간에 폐족이 되었다.

 

그 과정에서 겪은 배신과 상처도 컸다. 자신이 총애를 잃자 언제 그랬냐는 듯 벗들이 정적으로 돌변, 자신을 축출하는 데 앞장섰던 것이다. 간신히 목숨은 건졌지만 머나먼 강진으로 유배되어 앞날을 기약할 수 없게 된 마흔 살 정약용은 깊은 절망에 빠졌다.

 

그러나 그가 모든 것을 포기한 채 학문에 손을 놓았다면, 오늘날 우리가 아는 대학자 정약용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천 리 밖에 있는 자신을 탓하며 자식교육에도 손을 놓았다면, 가문에 흐르는 유장한 학자의 기풍은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산은 절망 속에서도 떨치고 일어나 자신을 다스리고 집안을 다스리는 결기를 보여주었다. 다산이 유배되었을 때 큰아들 학연(學淵)은 19살, 둘째아들 학유(學游)는 16살, 막내딸은 9살로 청운의 꿈에 부풀어있을 나이였다. 그러나 벼슬길이 막혀 그 꿈이 사라져버렸을 두 아들에게, 아버지 정약용은 희망과 용기를 주려 최선을 다했다.

 

이 책 《아버지 정약용의 인생강의》는 다산 문집 가운데 자식들에게 보낸 편지와 가훈을 주제별로 나누어 해설을 붙인 책이다. 여러 주제를 담고 있는 편지글도 주제별로 편집해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한문 편지글의 한글 번역이 훌륭할 뿐만 아니라, 지은이의 해설에도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해박한 인용과 삶에 대한 주옥같은 통찰이 담겨있어 그 값어치를 더한다.

 

 

다산이 자식들에게 이야기하고자 한 바는 크게 네 가지였다. 첫째, 공부를 게을리하지 마라. 다시 집안을 일으킬 방법은 공부뿐이다. 둘째, 집안 경제에도 관심을 기울여라. 근검절약을 바탕으로 하되 뽕나무 재배 등 경제적으로 곤궁을 면할 방도도 찾아보아라. 셋째, 행동거지에 기품을 잃지 말아라. 지식인으로서 올바른 처신을 하고, 항상 큰 꿈을 꾸어라. 넷째, 내가 힘써 이룬 학문이 후세에 이어질 수 있도록 내 책을 편집하여 세상에 알려다오.

 

자식들에게 공부를 강조하는 다산의 심정은 생각보다 절박한 것이었다. 그는 자식들이 공부를 하지 않아 사대부 가문의 기풍이 쇠락하고, 자신이 쓴 저술을 책으로 엮어 편집할 이마저 없어지면 자신은 오로지 판결문 속 죄인으로만 후세에 남을 것으로 생각했다. 유배지에서 ‘극한의 자기관리’를 보여주며 엄청난 양의 저술을 했던 것도, 자식들을 유배지로 불러 자신이 직접 공부를 가르칠 정도로 열의를 보인 것도 그런 압박감을 이겨내기 위해서였다. 다산의 이런 걱정이 잘 드러난 편지 한 대목을 소개한다.

 

(p.15-16)

내가 누차 말했듯이 청족(靑族) 집안의 사람들은 굳이 독서를 하지 않더라도 본래 존중을 받기 마련이지만, 폐족인데다 교양과 학식마저 없으면 더 미움을 받는다. 사람들이 폐족이라고 천시하고 세상이 얕잡아보면 그 자체로 이미 비참한 일이다. … 너희들이 끝내 배움을 거부하고 스스로를 포기하면 내가 저술하고 간추려놓은 그 모든 것을 장차 누가 수습하여 책으로 엮고 편집할 수 있겠느냐?

아무도 할 사람이 없게 된다면 나의 저술은 결국 후세에 전해지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후세 사람들은 사헌부의 보고서와 판결문만을 보고 나를 판단할 것이다. 그러면 나는 장차 후대에 어떤 인물로 기억되겠느냐? 너희들은 반드시 이것을 생각해야 한다.

 

자신이 남겨놓은 저술이 없으면 한낱 죄인으로 후세에 기억될까 두려운 마음. 이런 절박한 두려움이 있었기에 다산은 긴 유배생활 동안 이를 악물고 글을 남기고 자식을 가르쳤다. 이처럼 뚜렷한 목적의식이 없었다면 언제 풀려날지 모르는 막막한 세월, 그는 희망을 놓아버리고 일찍 세상을 떠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노력에 견줘 다산의 눈에는 학연과 학유의 학문이 그다지 신통치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편지글의 많은 부분이 공부를 게을리하는 아들을 훈계하면서 앞으로 이러저러한 책을 읽으라는 독서지도에 할애되어 있다. 또한 ‘배운 사람’의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충고, 임금 등 윗사람을 모시는 방법에 대한 조언도 아낌없이 담아 자식들이 ‘사회생활’까지 잘 할 수 있도록 세심히 가르쳤다.

 

때로는 ‘나 때는~’으로 시작하는, 요즘 말로 하면 ‘라떼토크’를 하며 너희는 왜 나처럼 학문을 열심히 하지 않느냐고 몰아붙이기도 한다. 사실 자식의 처지에서 보면 천 리 밖에서도 계속 편지를 보내 공부를 점검하는 ‘극성 아빠’가 부담스러웠을 법도 하다. 그래도 이렇게 멀리서 귀한 조언을 아끼지 않는 아버지의 편지글 덕분에 공부를 완전히 놓아버리지 않고, 아버지의 저작들도 세상에 잘 전하게 된 것이 아닐까.

 

결국 정약용은 5살에 귀양에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왔고, 75살까지 장수했다. 그리고 모두가 알다시피 오늘날 그를 죄인으로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유배생활 동안 집필한 500여 권의 책 덕분에 대학자가 된 다산은 결국 역사라는 ‘기억전쟁’의 승리자로 남았다.

 

이 책은 학자로서의 명성에 가려 비교적 알려지지 않은 그의 또 다른 면모인 ‘열혈 아빠 정약용’의 모습을 오롯이 느낄 수 있는 책이다. 몇백 년 전에 보낸 편지글이 오늘날 읽어도 배울 점이 무수히 많은 것을 보면, 역시 사람 사는 도리는 예나 오늘이나 비슷한가 보다. 다산이 아들에게 전수했던 인생 비법을 아낌없이 전해 받고 싶은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