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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 이웃과 더불어 팥죽 먹고 동지헌말 하는 날

[배달겨레의 세시풍속] 동지의 유래와 풍속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른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구뷔구뷔 펴리라.

                              황진이(黃眞伊) 시조 <동짓달 기나긴 밤을>

 

동지, 해가 부활하는 날

 

‘동지(冬至)’는 24절기의 스물두째이며 명절로 지내기도 했던 날이다. 민간에서는 동지를 흔히 ‘아세(亞歲)’ 곧 ‘작은설’이라 하였는데 하지로부터 차츰 낮이 짧아지고 밤이 길어지기 시작하여 동짓날에 이른 다음 차츰 낮이 길어지기 시작한다. 그 때문에 옛사람들은 이날을 해가 죽음으로부터 부활하는 날로 생각하고 잔치를 벌여 태양신에게 제사를 올렸다. 그래서 동지를 설 다음가는 작은설로 대접했다.

 

이런 생각은 오늘날에도 여전해서 ‘동지첨치(冬至添齒)’라 하여 “동지를 지나야 한 살 더 먹는다.” 또는 “동지팥죽을 먹어야 진짜 나이를 한 살 더 먹는다.”라고 생각했다. 또 동지는 날씨가 춥고 밤이 길어 호랑이가 교미한다고 하여 ‘호랑이 장가가는 날’이라고도 불렀다.

 

 

동지팥죽, 귀신 쫓고 더불어 살고

 

이날 가장 흔한 풍속으로는 팥죽을 쑤어 먹는 일이다. 팥죽에는 찹쌀로 새알 모양의 단자(團子) 곧 ‘새알심’을 만들어 죽에 넣어서 끓여 만드는데, 식구의 나이 수대로 넣어 끓이는 풍습도 있다. 특히 지방에 따라서는 동지에 팥죽을 쑤어 솔가지에 적셔 집안 대문을 비롯하여 담벼락이나 마당은 물론 마을 입구 큰 고목에도 ‘고수레’하면서 뿌렸고 이로써 잡귀들의 침입을 막는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팥죽을 뿌리는 것은 겨울철 먹이가 부족한 짐승들을 생각하는 우리 겨레의 따뜻한 마음도 담겨 있다.

 

 

원래 팥죽은 붉은색으로 귀신을 쫓는다는 뜻이 들어있다. 동짓날 팥죽을 쑨 유래는 중국 형초(荊楚, 지금의 후베이ㆍ후난 지방)의 세시풍속을 기록한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에 나온다. ‘공공씨’의 망나니 아들이 동짓날 죽어서 전염병귀신이 되었는데 그 아들이 평상시에 팥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전염병귀신을 쫓으려 동짓날 팥죽을 쑤어 악귀를 쫓았다고 하는 얘기다.

 

그러나 우리 겨레는 단순히 귀신만 쫓으려 팥죽을 쑨 것이 아니다. 겨울철에 먹을 것이 모자라는 짐승들을 위한 “고수레”로 자연과 함께 더불어 살려는 따뜻한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감나무에 까치밥을 남겨두는 마음과 같은 것으로 이를 김남조 시인은 “조선의 마음”이라고 노래했다.

 

다만, 동지가 동짓달 초승(음력 초하루부터 며칠 동안)에 들면 ‘애동지(애기동지)’라 하여 팥죽 대신 시루떡을 해 먹기도 하는데 요즈음은 상관없이 팥죽을 쑤어 먹는다. 또 이날은 ‘동지부적(冬至符籍)’이라 하여 뱀 ‘사(蛇)’자를 써서 거꾸로 붙이면 잡귀를 막을 수 있다는 믿음도 있었다.

 

 

 

궁중에서는 설날과 동지를 가장 으뜸 되는 잔칫날로 생각했으며, 이때 회례연(會禮宴, 잔치)을 베풀었다. 해마다 예물을 갖춘 동지사(冬至使)를 중국에 파견하여 이날을 축하하였다. 조선 후기 홍석모(洪錫謨)가 연중행사와 풍속들을 정리하고 설명한 세시풍속집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관상감(觀象監, 조선시대 천문과 날씨 일을 맡았던 관서)에서는 새해의 달력을 만들어 임금에게 바친다. 나라에서는 이 책에 동문지보(同文之寶)라는 어새를 찍어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것을 단오에 부채를 주고받는 풍속과 아울러 <하선동력(夏扇冬曆, 여름 부채와 겨울 달력)>이라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또 조선시대에는 제주목사가 귤을 진상하였는데 임금이 이를 기쁘게 생각하여 ‘황감제(黃柑製)’라는 임시과거를 열어 인재를 뽑았다. 교통이 편해진 지금이야 귤을 흔하게 먹을 수 있지만, 예전에는 제주목사가 부임하거나 유배 가고 올 때만 왕래를 했으니 귤은 참으로 귀한 것일 수밖에 없었다. 내의원에서는 소의 다리를 고고 여기에 여러 한약재를 넣어서 진상했는데, 이를 각 관청에 나누어 주었다. 이 약은 악귀를 물리치고 추위에 몸을 보하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아름다운 풍속 ‘동지헌말’

 

동지부터 섣달그믐까지 며느리들이 시어머니나 시할머니에게 버선을 지어 바치는 아름다운 풍속이 있었다. 이를 “동지에 만들어 바치는 버선”이라는 뜻의 ‘동지헌말(冬至獻襪)’ 또는 풍년을 빌고 다산을 비손한다는 뜻인 ‘풍정(豊呈)’이라고 했다.

 

 

며느리가 손수 도톰한 솜을 넣어 만든 버선을 신은 시어머니는 세상에 더없는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을 것이다. 이런 아름다운 풍습이 대대로 이어져 오던 것은 단지 발을 따뜻하게 하려는 것이라기보다 늙고 병들어가는 시어머니의 주름과 그가 살아온 고난의 한평생에 대한 고마운 마음이 담겼음이다. 18세기 실학자 이익(李瀷)은 동지헌말에 대해 새 버선 신고 이날부터 길어지는 해그림자를 밟고 살면 수명이 길어진다고 하여 장수를 비는 뜻이라고 했다.

 

또 이날부터 섣달그믐날까지는 모든 빚을 갚고 새 기분으로 설날을 맞았는데, 빚을 갚지 못했어도 절대 독촉하는 경우가 없었다.

 

그런데 동지가 지난 한겨울을 우리 선비들은 어떻게 견뎌냈을까? 조선시대 선비들은 동지가 되면 <구구소한도>를 그린다. <구구소한도(九九消寒圖)>에서 구구(九九)란 9×9=81, 곧 여든한 개의 매화 꽃송이를 말하는 것으로 이 매화 꽃송이들로 추위를 삭여 낸다. 곧 매화 81송이를 그려놓은 다음 매일 하루에 한 송이씩 차례대로 빨갛게 칠을 해나갔다. 빨갛게 칠해가는 방법을 보면 흐린 날은 매화 위쪽을, 맑은 날은 아래쪽을, 바람 부는 날에는 왼쪽을, 비가 오는 날에는 오른쪽을, 눈이 오는 날에는 한가운데를 칠했다. 하루 한 송이씩 하얀 매화 그림 위에 색을 칠할 때마다 봄을 기다리는 마음을 담아 꽃송이를 완성해간 것이다.

 

 

옛사람들은 “아홉 번째 아홉 날이 지나면 농사짓는 소가 밭을 갈기 시작한다네.”라고 하여 홍매화 81송이를 그려가며 꿈을 꾸면 입춘이 되고 봄이 온다고 생각했다. 요즘처럼 세상이 꽁꽁 얼어버리면 모든 생물이 다 죽은 것으로 느껴진다. 더구나 흰눈이 내려 쌓이면 아무것도 없는 세상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런 속에서도 선비들은 매화가 피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희망을 품고 살다보면 어언 구구소한도는 모두 채워지고, 훈훈한 봄바람이 세상을 감싸는 봄이 오게 된다. 지금보다 더 환경이 열악했던 조선시대 사람들도 이렇게 희망 속에서 추위를 견뎠던 것이다.

 

“동지는 좋은 날이라 양기운(陽氣運)이 일어난다

특별히 팥죽 쑤어 이웃과 즐기리라

새 달력 널리 펴니 내년 절기 어떠한가 (가운데 줄임)

 

사립문 닫았으니 초가집이 한가하다

짧은 해 저녁 되니 자연히 틈 없나니

등잔불 긴긴밤에 길쌈을 힘써 하소

베틀 곁에 물레 놓고 틀고 타고 잣고 짜네”

 

<농가월령가> 11월령 일부다. 동지 즈음의 풍속을 잘 드러내고 있다. 사립문 닫은 초가집도 길쌈에 바쁘다. 그리고 팥죽을 쑤어 이웃과 즐기리라고 다짐하는 모습이 참 정겹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