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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국 변호사의 세상바라기

밭고랑에서 온종일 이삭을 주어도

손곡 이달, <이삭을 줍는 노래>
[양승국 변호사의 세상 바라기 218]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田間拾穗村童語(전간습수촌동어)  밭고랑에서 이삭 줍는 시골 아이들이 말하기를

盡日東西不滿筐(진일동서불만광)  온종일 왔다 갔다 하여도 광주리가 안 찬다네.

今歲刈禾人亦巧(금세예화인역교)  올해에는 벼 베는 사람들의 솜씨도 교묘해져

盡收遺穗上官倉(진수유수상관창)  남은 이삭까지 모두 거두어 관가 창고에 바쳤다네.

 

손곡 이달의 시 <이삭을 줍는 노래(습수요, 拾穗謠)>입니다. 가을걷이가 끝나면 밭고랑에는 여기저기 이삭이 떨어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면 가난한 집 아이들은 조금이라도 입에 풀칠하기 위해 밭고랑에서 이삭을 줍습니다. 성경에도 가난한 이들을 위해 이삭을 줍지 말라고 하였으니(레위기 19: 9, 신명기 24:19), 가난한 이들을 위한 이삭줍기 배려는 동서양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이 시에서는 아이들이 광주리를 들고 종일토록 밭고랑 사이를 다녀도 광주리가 차지 않습니다. 왜 그렇지? 올해는 흉작인가? 시에서는 올해엔 벼 베는 사람들의 솜씨가 교묘해져 예년보다 떨어뜨리는 이삭이 적다고 합니다.

 

아니 동네 인심이 야박해졌나? 전에는 가난한 이들을 위해 일부러라도 이삭을 떨어뜨렸을 텐데... 그러나 민심이 야박해진 것은 아닙니다. 마지막 연을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농부들이 관가에 바치기 위해 떨어진 이삭까지 모두 거둔 것입니다. 애국심이 넘치는 농부인가? 이렇게까지 이삭도 쓸어모아 바치다니? 그렇지는 않습니다. 가혹한 세금 때문입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점점 더 가혹하게 거둬가는 세금을 채울 수 없었기 때문이지요. 손곡은 이러한 가혹한 세정(稅政)을 에둘러 표현한 것입니다. 직접적으로 표현하기보다 이렇게 에둘러 표현하는 것이 시의 품격을 높이는 것 같습니다.

 

조선 중기 이후 삼정(三政)의 문란으로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집니다. 실제 소유하지도 않는 토지에 세금을 징수(백지징수, 白地徵稅)하지 않나, 춘궁기에 관아에서 빌려주는 곡식에는 모래나 겨를 섞어 빌려주고는 추수 때는 제대로 된 곡식을 받아내고, 게다가 이자도 점점 더 늘어납니다. 어린아이에게까지 군포(軍布)를 징수(황구첨정, 黃口簽丁)하거나, 죽은 자의 이름으로도 징수(백골징수, 白骨徵布)합니다.

 

그래서 이를 견디다 못해 농부가 집을 버리고 떠나면 이웃에게 징수(인징, 隣徵)하고, 이웃도 떠나면 마을이 연대하여 내라며 징수(동징, 洞徵)합니다. 이런 관가의 횡포를 견디다 못해 일어난 것이 홍경래의 난 아닙니까? 19세기에는 홍경래의 난뿐만 아니라, 이런 학정에 크고 작은 농민항쟁이 일어났습니다. 그 결정판이 동학혁명이었구요.

 

홍경래의 난을 진압하였을 때 임금이 순조입니다. ‘순조’라는 이름은 임금의 묘호로 임금이 죽었을 때 붙이는 것입니다. 처음 순조가 죽었을 때 묘호는 ‘순종’이었습니다. 그런데 홍경래의 난을 진압한 큰 공이 있는 임금에게 ‘종’이라는 묘호를 붙이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일부 신하들의 반대에 ‘조’라는 묘호를 붙인 것입니다. 보통 ‘조’라는 묘호는 나라를 세운 공이 있거나 국난을 극복하여 나라의 정통을 다시 세운 임금에게 붙입니다. 따라서 참다못해 일어난 농민항쟁에 대해 자신들의 잘못을 뼈저리게 반성할 생각을 하지 않는 조선 위정자들의 사고방식이 ‘순조’ 묘호에도 잘 드러나 있습니다.

 

 

손곡 이달의 拾穗謠 시를 감상하다가 삼정의 문란까지 얘기하게 되었네요. 손곡은 참 가슴이 따뜻한 시인 같습니다. 손곡이 서자로 태어나 자신의 경륜을 펼치지 못하고 이렇게 시로나 자신의 답답한 마음을 펼친 것이 안타깝다는 생각도 듭니다. 허균이 홍길동전을 짓고 혁명의 생각도 가지게 된 것에 스승 이달의 영향도 있었을 것입니다. 평생 자식도 없이 정처 없이 다니다가 마지막에 평양의 어느 여관에서 세상을 떠났다는 손곡 이달. ‘그가 지금 이 세상에서 시작 활동을 하였으면 어떠하였을까’ 하는 상상을 해보며 이달의 <이삭을 줍는 노래> 감상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