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9 (월)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상세검색
닫기

양승국 변호사의 세상바라기

영조 때 했던 청계천 준설공사와 방산(芳山)

양반, 온돌에 온몸을 지지는 상놈이 부러웠다
[양승국 변호사의 세상 바라기 219]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을지로 4, 5가와 청계천 사이에 ‘방산시장’이라고 있지요? 서울시민이라면 한 번쯤이라도 방산시장을 가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방산시장’의 ‘방산’이 무슨 뜻인지는 모르는 사람이 많을 것 같습니다. ‘芳山’ - 한자로는 향기로운 꽃의 산이라는 뜻입니다. 왜 재래시장에 이런 이름이? 이런 의문을 가지시는 분도 있겠네요. 지금부터 그 유래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방산시장 앞의 청계천은 북악산에서 발원하여 살곶이다리 근처에서 중랑천에 합류하는 하천입니다. 그런데 하천에는 물만 흐르는 것이 아니라, 이 물을 따라 모래와 흙도 흐르다가 멈추다가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멈춘 모래와 흙이 자꾸 쌓이다 보면 하천의 바닥 면이 자꾸 높아집니다. 바닥 면이 높아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큰 홍수가 아니더라도 불어난 물이 하천을 넘어가 주변 지역은 물난리를 겪겠지요. 그래서 조선시대는 여러 차례에 걸쳐 청계천 준설공사가 이루어졌습니다.

 

이런 준설공사 가운데 제일 규모가 컸던 것은 영조 때 준설공사입니다. 이 무렵 청계천 바닥 면 높이가 옆의 대지 높이와 별반 차이가 없어, 조금만 비가 많이 와도 물난리를 겪었습니다. 특히 이 무렵에는 농촌에서 살기 어려워진 백성들이 한양으로 무작정 상경하여 청계천 변에 집을 짓고 살았기에, 더욱 물 피해가 컸던 것입니다. 1960년대에도 무작정 상경한 사람들이 청계천 변에 판잣집을 짓고 살았는데, 조선시대에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영조는 안 되겠다 싶어 1760년 준설공사를 명합니다. 청계천 바닥 면 높이가 옆의 땅 높이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면 청계천에 쌓인 토사도 많다는 것 아닙니까? 그럼 준설한 토사량도 많아질 테고, 그러면 파낸 토사를 처리하는 데에도 애로점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곳으로 옮기지 못한 토사는 청계천 옆에 쌓아두었지요. 이렇게 쌓아둔 토사가 조그만 동산을 이룰 정도로 커지니, 이를 가산(假山)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청계천 변에 살던 사람들이 이 가산을 그냥 보고만 있었겠습니까? 사람들은 – 특히 더 못사는 거지들이 - 이곳에 토굴을 짓고 삽니다. 그런데 조그마한 가산에 사람들이 몰려 살고, 더군다나 하수처리시설도 안 되어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당연히 그 옆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악취에 코를 막기 쉽겠지요? 그래서 이곳에 사람들이 살지 못하도록 꽃나무를 심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가산(假山)이 향기로운 꽃냄새가 나는 산이 되었다고 하여 방산(芳山)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그 뒤 마을 이름도 방산동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들어선 시장을 방산시장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구요.

 

한편 이런 가산(假山) 말고도 풍수지리적으로 땅의 기운을 보(補)하려고 일부러 가산을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서울의 내사산(內四山)이라고 하면 북악산(主山), 남산(案山), 인왕산(우백호), 낙산(좌청룡)을 말합니다. 그런데 다른 산에 견줘 낙산은 빈약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곳의 땅의 기운을 보하기 위해 동대문 옆에 가산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청계천에서 파낸 흙으로 가산을 만들었을 것 같은데, 확인해보지는 못했습니다. 동대문 현판이 무엇인지 기억나십니까? 바로 ‘흥인지문(興人之門)’이라고 되어있습니다. 3글자로 된 다른 문의 현판과 달리 흥인문 현판에 ‘之’자를 하나 더 넣은 것은 바로 기운을 보하기 위해서였답니다.

 

재밌지 않습니까? 하나만 더 얘기하겠습니다. 이번에는 기후 얘기입니다. 청계천 가산 얘기하다가 왜 생뚱맞게 기후 얘기를 하나고요? 이유가 있습니다. 아! 그전에 ‘온돌’ 얘기부터 해야겠군요. 온돌은 오래전부터 우리 겨레 전부가 즐겨 쓰는 겨울철 난방 문화였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조선 중기 때까지만 하더라도 중국 것을 좋아하는 양반들은 중국처럼 침상을 좋아하였답니다. ‘상것들과 우리는 다르다’라는 내심도 작용하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17세기부터 전 세계적으로 소빙하기가 닥쳤습니다. 조선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러니 양반들은 말은 안 하더라도, 온돌에서 뜨뜻하게 온몸을 지지는 상놈들이 부러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양반들도 실속을 차려 온돌을 사용합니다. 궁궐도 마찬가지고요.

 

그런데 당시 온돌을 어떻게 데우겠습니까? 당시 석탄이 있겠습니까? 석유가 있겠습니까? 결국 땔나무 수요가 급증합니다. 그 결과 한양 주위의 산들은 벌거숭이산이 되고 맙니다. 그런데 산에 나무가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홍수가 잦아지고, 또 그러면 흙을 지탱해줄 나무들이 없으니 토사도 더 많이 흘러내립니다. 영조 때 이렇게 산에 나무가 없어지고, 비만 오면 토사가 많이 흘러내리니, 다른 때보다도 더욱 청계천의 바닥 면이 높아진 것입니다. 그래서 가산도 생겨난 것이구요.

 

방산(芳山) 얘기한 김에 언제 시내 나들이하면 청계천을 걸어 방산시장도 오래간만에 가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