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9 (금)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상세검색
닫기

우지원의 우리문화책방

조선 왕실은 아이를 어떻게 길렀을까?

《조선 왕실의 자녀교육법》, 신명호, 시공사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조선 왕실은 아이를 어떻게 길렀을까?

조선 왕실에 태어난 아이는 특별했다. 왕조시대에 임금의 핏줄로 태어난 것부터가 특별한 일이거니와, 특히 왕위를 이어갈 ‘원자’로 태어난 아이는 그 출생의 무게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한 나라의 존망이 그 아이가 어떤 어른으로 성장하느냐에 달려 있기에, 왕실에서는 자녀교육에 모든 정성을 쏟았다.

 

그러나 그 정성이 반드시 아이의 행복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세 살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조기교육’은 그저 뛰어놀고 싶을 나이의 아이들에겐 상당히 가혹한 것이었다. 물론 특별한 자질이 있는 경우에는 공부로 가득 찬 일과를 즐기기도 했지만, 대체로 버거운 일상이었다.

 

신명호가 쓴 책, 《조선 왕실의 자녀교육법》은 조선 왕실의 태교부터 육아, 청소년 시기의 갈등 해결 방법까지 자녀교육의 모든 면을 폭넓게 다루고 있다. 사람을 낳고 기르는 일에 ‘이렇게까지’ 정성을 쏟았나 싶어질 정도로 열과 성을 다했던 조선 왕실을 보면 나라를 이끌어가는 집안에 면면히 흐르는 무거운 책임감이 느껴진다.

 

 

(p.243)좌의정 채제공: 회의를 시작한 지 이미 두어 시간이 지났는데도 원자는 마치 심어 놓은 나무처럼 단정하게 앉아 눈 한번 돌리지 않고 있으니 《소학》의 공부가 이미 이루어졌다고 하겠습니다.

정조: 삼경(밤 11시~새벽 1시)이 지나야만 잠자리에 들며 날이 채 밝기도 전에 일어나 세수하고 머리 빗고 꿇어앉아 응대하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다. 이것은 내가 가르쳐서 그런 것이 아니고 우리 왕조의 가풍이 원래 그렇다.

 

정조가 말하는 ‘우리 왕조의 가풍’이라는 것이 바로 조선 왕실의 치열한 자기관리와 근면성실이었다. 지도자는 응당 이른 아침부터 깨어 심신을 단정히 하고, 올바른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끊임없이 교육받으며 덕을 길러야 했다. ‘요람부터 무덤까지’ 이어지는 끊임없는 교육과 수양이 조선왕조 자녀교육의 요체였다.

 

물론 아이가 태어난 뒤 엄격한 교육을 통해 기질을 바로잡을 수도 있지만, 기질이 이미 순화된 좋은 자손을 낳기 위해서는 임신 이전 부모의 올바른 마음가짐과 몸가짐이 무척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뿐 아니라 적절한 때와 장소를 가려 교합하는 것을 중요히 여겨, 천지자연의 음양이 정상이 아닐 때나 장소가 적절하지 않은 곳에서는 교합하지 않도록 했다.

 

이렇게 몸과 마음을 완비하여 적절한 때에 수태가 되면, 그때부터 태교에 정성을 쏟았다. 당시에는 출산하다가 산모가 목숨을 잃는 수도 부지기수였으니, 출산을 앞둔 왕비도 무척 두렵고 착잡했을 것이다. 이런 불안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편안하게 해주기 위해 왕실에서는 산실청을 설치하여 산모가 출산 환경에 미리 익숙해지도록 하고, 출산이 임박하면 곧바로 대응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럼 이렇게 만반의 준비를 거쳐 태어난 아이는 어떻게 자라났을까? 왕실에서 유모를 고를 때는 최고 어른인 대비가 직접 나서 좋은 심성과 신체적 요건을 갖춘 유모를 골랐고, 양육을 담당하는 보모상궁과 궁녀, 내시를 따뜻한 마음씨와 수준 높은 교양을 갖춘 이들로 배치해 주변 사람들의 좋은 기질을 닮을 수 있도록 했다.

 

이어서 세 살이 되면 글자를 깨우치는 등 서서히 공부를 시작하며, 여덟 살이 되면 성균관에 입학해 본격적인 제왕 교육을 받았다. 원자의 선생님들은 삼정승이나 2품 이상의 고위 관료, 명망 높은 유학자 가운데 추천받아 마지막으로 서너 명을 뽑았다. 원자의 선생님이 되는 것은 당대 으뜸 석학으로 인정받는 것이어서 가문의 영광이었다.

 

원자의 선생님을 ‘보양관’이라 불렀는데, 말하고 걷기 시작하는 원자의 몸과 마음을 보좌하고 기르는 선생님이라는 뜻이었다. 보양관이 근무하는 관청은 원자보양청이라 했으며, 순번을 정해 번갈아 가며 원자를 보았다. 보양관은 원자가 두세 살부터 다섯 살 정도가 될 때까지 약 3년 동안 원자의 말과 행동, 세계관을 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주었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배동(陪童)’이라 하여 엄격한 과정을 거쳐 선발한 또래 친구를 원자에게 붙여주었다는 점이다. 배동은 보양관이 원자를 만나는 날 같이 들어가 함께 놀았다. 정조 때 원자였던 문효세자의 사례를 보면, 당시 원자가 두 살이었는데 나이가 비슷한 열다섯 명의 배동을 뽑아 원자와 함께 놀며 좋은 심성을 기르도록 했다.

 

이렇듯 어릴 때 좋은 심성과 가치관을 자연스럽게 익힌 원자는 세자가 되어 ‘서연’이라 불리는 수업을 받고, 마침내 임금을 대신하여 정무를 보는 대리청정을 수행할 정도로 장성하게 된다. 사실 세자의 수업 일정도 대단히 빡빡한 편이어서, 공부가 싫어 꾀병을 부리는 세자도 꽤 많았다.

 

세자가 감당해야 했던 일과와 책임을 보면 한 나라의 세자로 태어나는 것이 좋은 일만은 아니라는 것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그것을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정조와 같은 임금도 있었지만, 도무지 세자 생활이 적성에 맞지 않아 결국 비뚤어지고 만 사도세자 같은 인물도 있었다.

 

이렇듯 조선 왕실의 교육은 엄격하고 나이에 견줘 지나친 학습량을 요구하는 측면도 있었지만, 바른 심성과 세계관, 지식과 교양을 갖춘 임금 한 명을 탄생시키기 위해 수많은 인력이 투입되고 모든 노력이 총동원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왕조가 부침을 거듭하면서도 500년을 이어간 비결 가운데 하나가 이런 왕실의 자녀교육법이 아닌가 싶다. 좋은 기질을 갖춘 아이를 낳아, 어릴 때부터 근면한 태도와 책임감이 자연스럽게 몸에 배도록 교육하는 것, 이것이 나라를 이끌어갈 예비 지도자를 기르는 철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