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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국 변호사의 세상바라기

당항포 해전과 기생 월이

당항포 해전이 있기 전 월이, 일본 첩자의 지도 고쳐
[양승국 변호사의 세상 바라기 230]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때 바다에서 23번 싸워 23번 모두 승리한 불패의 영웅이란 사실은 우리 겨레로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중에서 한산도 해전, 명랑해전, 노량해전을 3대 해전으로 꼽지요.

 

한산도 해전은 남해를 돌아 서해로 올라오려는 왜군의 전략을 좌절시키고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한 데서, 명랑해전은 13척의 판옥선으로 133척의 왜군 함대와 맞서 절대적인 열세를 치밀한 전략과 울돌목의 지형을 이용하여 승리로 이끈 명 대첩이기에 3대 해전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노량해전은 잘 아시다시피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마지막 해전으로 이때 적선 200여 척을 격파하고, 100여 척을 나포한 최대 전과를 올렸기에 3대 해전에 들어갑니다.

 

이 가운데서 특히 한산도 대첩은 바다를 장악하고 호남을 확보할 수 있었다는 데서, 3대 해전에서 나아가 진주대첩, 행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꼽힙니다. 아니, 아예 임진왜란을 넘어서 을지문덕 장군의 살수대첩, 강감찬 장군의 귀주대첩과 함께 우리나라 3대 대첩으로 꼽힐 정도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한산도 대첩은 이에 더하여 학익진이라는 새로운 전술을 이용하여 정교하게 적의 수군을 포위 섬멸한 것이기에 세계 해전사에서도 4대 해전에 들어간다고 할 만큼 높게 평가되는 해전입니다. 그러기에 일본의 토고 제독은 러일전쟁 쓰시마 해전에서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무찔렀을 때, 자신을 넬슨 제독에 비교할 수는 있어도 감히 이순신 장군과 견줄 수는 없다고 말을 했다고 하지요.

 

이러한 23승의 승리는 당연히 이순신 장군 혼자서 이룩한 것은 아닙니다. 물론 이순신 장군의 뛰어난 지략과 전략이 끌어낸 승리지만, 이는 부하 장수들과 말단 졸병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힘을 합쳐 이뤄낸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의 뒤에서 장군을 믿고 따르며 함선을 수리하고 식량을 준비하는 등 백성들도 힘을 합쳤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에서 1차 당항포 해전에는 상대적으로 일반인들이 잘 모르는 기생 월이의 공로가 숨어있습니다. 저도 기생 월이의 존재에 대해 모르다가, 최근에 황현필이 쓴 책 《이순신의 바다》를 보면서, 기생 월이를 알게 되었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쯤입니다. 기생 월이의 기방에 승복 차림의 한 남자 손님이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월이가 보기에 손님의 거동이 수상하더랍니다. 승복을 입었지만 아무래도 스님의 분위기가 나지 않고, 또 말투에 은연중 일본어 말투도 나오더랍니다. 그래서 월이는 이 손님이 잠들었을 때 몰래 손님의 짐을 뒤집니다.

 

그런데 이게 뭐야? 짐에서 남해안 일대를 그린 지도가 나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손님은 바로 일본의 첩자였던 것이지요. 당시 일본은 치밀하게 임진왜란 준비를 하면서, 첩자도 조선에 파견하여 조선의 지형을 파악하도록 하였습니다. 일본은 이렇게 전쟁 전부터 치밀하게 전쟁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조선 조정은 무얼 하고 있었는지…. 그나마 이순신 장군이 1년 전에 전라좌수사로 부임하면서 판옥선과 거북선을 만들며 전쟁 준비를 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이미 그때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잠시 열이 나서 얘기가 옆으로 빠졌는데, 월이는 첩자가 그린 남해안 지도 가운데 고성 당항포 일대를 그린 지도를 보고 급히 기지를 발휘합니다. 당항만의 소소포(지금의 고성천이 바다와 만나는 곳)와 죽도포(지금의 고성읍 수남리) 사이에 마치 좁은 바닷길이 있는 것처럼 뱃길을 그려 넣은 것입니다. 첩자는 그런 줄도 모르고 변조된 지도를 가지고 일본으로 돌아갔고, 1년 뒤 당항포 해전 때 일본 수군은 바로 이 변조된 지도를 갖고 당항포의 좁은 해협으로 들어온 것이지요. 왜군은 이 지도에 근거하여 당항포 쪽으로 들어가 통영 쪽으로 빠져나가려고 합니다.

 

지도만 믿고 소소포까지 다다른 왜군은 지도와 달리 육지로 꽉 막혀있으니 얼마나 당황했겠습니까? 이들이 배를 돌려 당항만을 빠져나오려고 할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조선 수군이 이들의 앞길을 가로막은 것입니다. 당항만은 소소강이라고 불릴 정도로 좁고 긴 수로인지라, 아군이 앞을 가로막으면 이들은 독 안에 든 쥐입니다.

 

그런데 이순신 장군은 이들을 공격하지 않고 배를 돌려 당항만을 빠져나가기 시작합니다. 유인작전을 편 것이지요. 거기서 그대로 공격했다가는 혹시 좁은 해협 양안(兩岸)에 매복해있을지도 모를 일본 육군의 조총 공격을 받을 수도 있고, 해협이 너무 좁아 거북선 공격도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자 빨리 이 좁은 해협을 빠져나가고픈 일본 함대는 조총을 쏘아대며 조선 수군을 뒤쫓아옵니다.

 

그러다가 일본 함대가 지나가자, 매복해있던 이억기 휘하 조선 수군이 이들의 뒤를 차단합니다. 일본 함대가 이를 눈치챘을 때는 이미 때는 늦었지요. 곧이어 바다 위에 크게 징이 울리고 조선의 함대는 일본 함대 앞뒤에서 학익진을 펼칩니다. 그것으로 승부는 끝입니다. 당항포 해전에서 26척의 일본 함선 가운데 25척이 당항만 바닷속에 잠들었습니다. 그리고 왜군은 2,720명이 전사한 것에 견주면 아군은 13명만 전사하였습니다.

 

이렇게 당항포 해전의 승리 뒤에는 기생 월이의 숨은 공헌이 있었습니다. 기생 월이에 관해서는 역사적 기록이 없어, 그동안 고성 지역에서만 구전으로만 전해 내려왔습니다. 그러나 전혀 없던 사실을 지어낸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당항포 일대에서는 왜군이 속았다고 당항포 일대 바다를 ‘속싯개’, 살아남은 왜군이 육지로 도망한 곳을 ‘도망개’, 도망간 왜군도 멀리 가지 못하고 거의 다 잡혔는데, 그곳을 ‘잡안개’라고 부른답니다.

 

그동안 기생 논개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졌지만, 기생 월이는 소홀하였는데, 우린 앞으로 기생 월이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요즘 고성군에서는 당항포대첩 축제와 아울러 월이축제도 연다네요. 그리고 이런 월이를 그냥 떠도는 말로만 남겨두어야겠습니까? 그래서 통영예총회장을 지낸 정해룡 시인은 월이 이야기를 《월이》라는 소설로 펴냈습니다. 소설의 부제는 ‘조선의 잔다르크’로 붙였네요. 그렇다면 소설에서 월이는 잔다르크처럼 젊은 목숨을 조국에 바친 것으로 나오나? 소설 《월이》도 한 번 읽어봐야겠네요.

 

기생 월이를 통하여 다시 한번 조선시대 기생은 단순히 웃음만 파는 직업은 아니라는 것을 느낍니다. 비록 양반들을 상대하기 위한 것이라지만, 기생은 웬만한 양반집 규수들도 갖추지 못한 교양을 갖추었고, 그러니 나라를 위한다는 의식도 깨어있었습니다. 그런 전통이 일제강점기 마지막 기생들에게까지 이어졌기에, 3.1만세운동 때 기생들도 전국 여기저기서 만세운동에 동참한 것이지요. 월이가 지도를 변조하는 긴박한 순간을 떠올리면서 글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