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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성어’(四字成語)로 보는 세종의 사상

반복사지(反復思之, 거듭 생각하다) -①

‘사자성어’(四字成語)로 보는 세종의 사상 21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조선조 임금의 정치에서 어떤 논제가 올라오면 논의를 통해 신중히 처리되겠지만 세종 때 기록을 보면 ‘반복사지’의 표현이 눈에 띈다.

 

‘반복사지(反復思之)’는 ⟪조선실록⟫에 모두 129건이 기록되어 있는데 세종 때 51건, 다음은 성종 19건이고 나머지 임금에서는 한두 건이다. 여기에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어떤 과제를 신중히 처리한 것인지 아니면 실록의 해당 기사 기록 표현상 ‘신중히 처리했다’라는 것인지 의문이 들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 답은 실록 기사 세종조에서 찾을 수 있다.

 

한결같이 이런 ‘반복사지’의 표현이 쓰인 기록은 일반 사건보다는 신중을 요 하는 문제라는 것이다. 그 내용을 보면 사람의 범죄 유무, 민생과 직결되는 답험손실법에 관련된 문제, 세자의 남면(南面) 문제, 불교의 폐단, 저화 사용문제 등 당시 정치 현안으로서는 변화나 변혁과 관계되는 신중한 토론을 요 하는 과제들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이를 숙고 처리했다는 실증이다.

 

그 예들의 기사를 보자.

 

(삼성에서 이종무의 공신권을 걷어 들이도록 상소하다.) 삼성(3개의 최고의 의정 기관)에서 상소하기를, "이종무는 용서할 수 없는 죄를 범하였는데, 낮추어 가벼운 처분을 내리시니, 신 등은 이리저리 생각하여 보았사오나(反復思之) 예로부터 불충(不忠)한 죄를 저지르고 공신의 반열에 있는 일은 없었습니다. 다만 벼슬을 갈고 토지를 몰수하기만 하였사오나 이미 관직을 삭탈하였는데도 공신의 칭호가 그대로 있어 공신권(功臣券)을 지니고 있어서, 공신의 토지로 먹고산다면, 죄가 중한데 견주어 벌이 가볍사오니, 공신의 명부에서 삭제케 하시고, 그 공신권을 걷어 들이시옵소서."하였다. (⟪세종실록⟫2/윤1/22)

 

대마도 정벌은 이종무가 이끈 정벌로, 1419년(세종 1) 음력 6월 19일 거제도 남쪽 주원방포를 출발하여 20일에 쓰시마 섬에 도착하였다. 이종무는 도주 종정선에게 항복을 권하였으나 대답이 없자 왜구 1백여 명을 참수하고 2천여 호의 가옥을 불태우고, 131명의 명나라 포로를 찾아내었다. 29일에는 가옥 70여 호를 태우고 명나라 사람 15명과 조선인 8명을 구출하였다.

 

원정 이후 대마도주(對馬島主)가 항복을 청하여 옴으로써 사태가 일단락되게 되었다. 대마도주는 또한 신하의 예로서 섬길 것을 맹세하고 왜구를 스스로 다스릴 것과 조공을 바칠 것을 약속하였다. 세종이 이를 허락하고 이후 삼포를 개항할 때 대마도 도주에게 통상의 권한을 줌으로써 평화로운 관계로 전환되었다.

 

그러나 이 원정은 180명의 조선군이 전사하는 등 많은 인명 희생이 따랐으며 분명한 군사적 승리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이 책임을 이종무가 져야 한다는 논의였다.

 

이종무 등 3인에게 벌을 주라는 상소는 이후에 8월에도 올라왔다.

 

사헌부에서 상소하기를, "전일에 이종무ㆍ이적(李迹)ㆍ임상양(林尙陽) 등의 죄를 상소하여 올렸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였으니, 여러 가지로 생각하여 보아도(反復思之), 악당(惡黨)인 그들로 하여금 머리를 제대로 보전하게 하는 것은 전하의 사사로운 은덕인 것이온데, 이제 또 그들에게 서울과 지방에서 편리에 따라 있게 하오니, 신 등의 청한 대로 따르시어 다른 사람에게 징계가 되게 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세종실록⟫2/8/15)

 

‘반복사지’는 실록에서 아무 때나 쓰는 용어가 아니라 신중을 요 하거니 중대한 문제라고 생각했을 때 이루어진 표현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겠다.

 

다른 사건 하나를 보자.

 

(조말생의 직첩을 거두어 사풍을 가다듬을 것을 상소하다) 사헌부에서 상소하기를, "조말생(趙末生)은 자기의 욕심을 마음대로 부려 양인(良人)을 억압하여 천인(賤人)을 만들었삽고, 전토ㆍ노비ㆍ백은(白銀)ㆍ단자(段子) 등의 물건을 공공연히 뇌물로 받고는 벼슬자리를 팔아먹는 등 하지 못할 바가 없었나이다..... 단지 직첩만 회수되어 여생을 보존하였사오니... 또 직첩을 제수하시어 뻔뻔스럽게도 낯을 들고 큰길을 두루 다니오니 신 등은 놀람을 이기지 못하옵나이다. 반복하여 생각하옵더라도(反復思之) 전하께서는 그의 직첩을 도로 거두시와 사풍(士風)을 가다듬게 하시옵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세종실록⟫24/12/10)

 

조말생은 흠이 많은 신하였으나 그는 국방과 외교 특히 변방 동북지역에 대한 전략에 밝아 세종이 끝내 지켜주었던 관료로 생각된다.

 

다른 하나는 북방지역의 주민 관리에 관한 문제다.

 

 

(호적 정리 계획을 김종서에게 의논하여 보고하게 하다) 함길도 도절제사에게 전지하기를, 세도의 성쇠가 실로 호구의 증감에 관계되니, ‘중외의 백성 수효를 호적에 올려 호구의 증감을 보게 하소서.’ 하였으나, 다만 어리석은 백성들이 새 법이라 하여 놀라고 의심하고 소동할까 두려워 지금까지 거행하지 못하였다. 변군(邊郡)의 백성들이 비록 피살되고 사로잡혔어도 국가에서 그 수효를 알 수 없으므로 변방 장수가 임금과 윗사람을 속이는 것이 바로 이 까닭이다. 근래 경원(慶源)의 일이 족히 밝은 거울이 될 만하니, 이것으로 말한다면 변경 백성의 수를 더욱 알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남도 백성들이 요역이 없는 것을 즐겁게 여기어 스스로 4진으로 돌아오는 자가 또한 많은데, ...... 내가 수년 동안 민심을 진정시킨 연후에 다시 이 계책을 의논하려 하는데 어떠한가. 경이 반복해서 생각하여(反復思之) 민심의 향배(向背)를 살피고 오늘의 이해를 참작하여 익히 의논하여 아뢰라." 하였다. ⟪세종실록⟫19/3/19)

 

조선시대 북방 여진족의 침략으로부터 두만강, 압록강 경계를 지켜 나가려는 세종의 끊임없는 노력과 멀리보는 계획을 ‘반복사지’ 과정을 통해 살필 수 있다.('반복사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