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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만 갈라섭시다"

<돌아온 개화기 사람들> 1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1905년 5월 22일 자 <황성신문>에는 이런 광고가 실려 있다.

 

“지난 음력 4월 13일 아홉시 반에 여종 하나가 도망하여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아서 사방을 찾아다녔으나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는 까닭에 광고하노라. 그 여종의 차림은, 닳아서 구멍이 난 푸른 베옷을 걸치고 푸른 신발을 신었는데 말을 잘하며 나이는 14세라. 얼굴은 희고 흉터가 없으며 왼쪽 눈언저리에 검은 사마귀가 하나 있고 청나라 화장분을 발랐다. 혹시 이런 계집아이를 본 군자가 계시면 통기하여 주시기를 바라노라. 보상은 한화 20원이며 에누리 없이 드릴 것이라. 한성 대안문 앞 안창호 알림.”

 

말 잘하고 얼굴이 희며 눈언저리에 검은 사마귀가 하나 있는 이 ‘계집아이’는 끝내 도주에 성공했을까? 아니면 잡히고 말았을까? 어떤 삶을 살다 갔을까? 궁금하지만 기록이 없다.

 

 

1909년 5월 16일 자 <대한매일신보>에는 ‘이제 그만 갈라섭시다’라는 개인 광고가 실렸다. 갈무리하여 옮긴다.

 

“본인은 최환석 씨의 손녀인데 열세 살에 김춘식 씨의 아들과 혼인하여 지금 4년이 되었는데, 시어머니가 누명을 씌워 모함하고자 하는 고로 견딜 수가 없어 본가로 와서 있으며, 다시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김 씨와는 살지 않기로 작정함. 최환석 씨의 손녀 최씨 고백.”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100여 년 전의 공개 고백이다. 여기에서 최 씨 여인은 남편을 ‘김춘식 씨의 아들’이라고 말고 있다. 그 남자의 이름은 김준환이다. 어떻게 그걸 아느냐고? 그가 실명으로 신문에 반박 ‘고백’을 했기 때문이다. 최 씨가 고백한 지 이틀 뒤인 5월 18일 자 고백이다.

 

“….어린 신부(자기 처 최 씨를 말함)는 가끔 친가에 다녀오면 술을 먹고 주정을 하는 등 괴팍한 행실을 보였다. 그러던 중 어린 신부가 친가로 도망을 갔다. 처가에 가서 어린 신부를 만나려고 하니 처가 식구들이 만나지 못하게 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신문에 이혼 광고를 낸 것이다. 나의 어머니가 어린 신부에게 누명을 씌우고 모함을 했다는 것은 모두 거짓말이다. 그런데도 이혼을 하지 않으면 재판을 걸겠다니 적반하장이다. 아무튼 그 신부는 내가 이혼을 결정하기 전까지는 그 누구라도 함께 살 수 없으니 세상 사람들은 그리 알기를 바라노라. 김준환 고백.”

 

도대체 시어미가 무슨 누명을 씌웠다는 것일까? 독자들이여 궁금하지 않은가? 우리는 그 궁금증을 풀 수 있다. 어린 신부가 실명(최소사)으로 재반박 광고를 냈기 때문이다. 그것도 바로 다음 날인 5월 20일에.

 

“신랑이 사람들의 눈과 귀를 속이는 ‘미친 광고’를 냈기에 다시 반박 광고를 낸다. 시어머니가 나에게 누명을 씌우고 모함을 했다는 사건의 전말을 이제는 말할 수밖에 없다. 차마 “더러운 일”이기에 말하지 않으려 했으나 이제 어쩔 수 없다. 시어머니는 내가 시집의 사촌과 간통을 했다고 떠들어 댔다. 나는 이 말을 듣고 죽을 결심을 했다. 그러다 친가로 도망을 친 것이다. 술을 먹고 주정을 했다는 것도 모두 거짓말이다. 어찌 시집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겠는가. 최소사 고백 “

 

구한말의 사람들이 신문에 사생활을 공개한 것은 우리의 통념을 교란한다. ‘사생활’이라고? 당시에는 그런 개념 자체가 없었거나 흐릿했을 것이다. 수천 년 우물가에서 유통되어 오던 쏙닥 통신, 카더라 풍신(風信)이 이제 신문이라는 매체에서 자글거리고 있는 양상이다. 오늘날 인터넷 통신을 보는 듯하지 않은가? 이제 우물은 사라졌고 종이 신문도 잔명을 유지하기 힘들다. 그러나 우리는 예나 지금이나 말을 속에 담아 놓고는 못 사는 종족인 것 같다. 황혼 녘의 선술집이 왁자하지 않을 날이 있을까? 일본이나 중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풍경이다. 우리는 풀어야 산다.

 

 

나의 골방 꼭두새벽 푸른 고요 속에 사람들이 두런거린다. 마저 다 풀지 못하고 이승을 떠난 사람들이다. 그들과 나는 얼핏 눈짓을 교환하기도 하고 때로는 그 사람이 나인 것만 같아 만단정회를 나누기도 한다. 그런 이야기이다. 나는 또한 어쩌다 고지도에 빠지게 되었다. 사람 이야기를 하고 있노라면 자주 지도가 떠오른다. 지금도 그렇다. 한양도성의 첫 그림도 우리는 고지도에서 볼 수 있다. 1402년에 선조들이 만든 놀라운 세계지도이자 코리아의 출생증명서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이하 줄여서 ‘강리도’)에서.

 

 

기자정보

프로필 사진
김선흥 작가

전직 외교관(외무고시 14회), 《1402강리도》 지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