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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지원의 우리문화책방

어머니와 나라 위해 두 다리를 바친 황대중

《장애인 장군 황대중》, 고정욱 글, 이상권 그림, 도서출판 솟대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황대중.

조선 전쟁사에서 거의 들어보지 못했을 법한 낯선 이름이다. 아무래도 문(文)이 우세하여 무관의 이름은 문관만큼 많이 알려지지 않은 탓일 수도 있으나, 전쟁사를 꽤 아는 이라도 그의 이름은 생소할 듯하다.

 

황대중. 어쩌면 강진 필부로 살았을 그를 역사가 불러냈다. 바로 임진왜란이다. 전라도에도 효자로 소문났던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관군이 되어 앞장서서 싸웠다. 비록 왜적의 탄환에 장렬히 전사했지만, 역사는 그를 기억하게 되었다.

 

고정욱이 쓴 이 책, 《장애인 장군 황대중》은 임진왜란 때 양쪽 다리를 저는 장애인으로 왜군과 싸우다 전사한 황대중의 생애를 다룬 책이다. 지은이 또한 어려서 소아마비를 앓아 1급 지체장애인이 되었고, 역사 속의 장애인을 발굴하여 되살려내는 일에 매진하고 있다.

 

 

황대중은 태어나면서부터 다리가 불편했던 것은 아니었다. 학질에 걸려 죽어가는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 넓적다리살을 베어내면서 생긴 상처가 덧나 한쪽 다리를 절게 되었다. 당시 학질에 걸리면 넓적다리살을 고아 먹으면 낫는다는 속설이 있었고, 실제로 어머니는 효험이 있었던지 무사히 살아날 수 있었다.

 

황대중이 자기 허벅지를 베어 어머니께 고아 드렸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다. 나중에는, 이 사실이 조정에까지 알려져 나라에서 정릉참봉이라는 벼슬을 내리기도 했다. 그러나 후유증으로 다리를 심하게 절게 되어 말을 다리 삼아 타고 다녔다.

 

원래 타던 말이 노쇠하여 타기 어렵게 되었을 때쯤, 그의 효심을 높이 산 어떤 사람이 ‘천하효자지마(天下孝子之馬)’라는 종이를 말꼬리에 매어 그의 집에 보냈다. 황대중은 누가 보냈는지 찾으려 하였으나 끝내 나타나지 않아 고마운 마음으로 명마를 타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대장장이 한 명이 3년 동안 정성 들여 만든 명검을 가져와 날개를 달았다.

 

명마와 명검으로 무예를 연습하던 그는 임진왜란이 나기 1년 전, 1591년 전라좌수사가 되어 임지로 가는 이순신을 잠깐 만나기도 했다. 황대중보다 나이가 여섯 살 많았던 이순신은 첫눈에 그가 인재임을 알아보았고, 두 사람은 전쟁이 나면 신명을 바쳐 나라를 지키겠다는 결심을 나누었다.

 

1592년, 결국 전쟁이 일어났다. 조선 군대는 오합지졸이었다. 이항복은 윤두수를 불러 별초군을 만들게 했다. 별초군은 학식이 있거나 무예가 뛰어나고 용맹한 자들로 구성되었다. 황대중은 전체 80여 명의 별초군 가운데 전라도를 대표하는 별초군이 되어 서울로 향했다.

 

별초군은 선조의 피난길을 호송하며 의주에 이르렀다. 이여송이 이끄는 명나라 군대가 파병을 오자 그는 앞장서서 싸우는 장수인 ‘전도비장’이 되어 왜군들을 몰아 남쪽으로 내려갔다. 1593년 6월에는 명나라 군대를 따라 진주성으로 들어가 성이 함락되는 마지막 순간까지 싸우기도 했다.

 

진주성이 함락될 때 사람들은 성 위에서 강물로 뛰어들었다. 그도 뛰어들려 할 때 부하인 정기수가 전라도의 이순신 수군통제사에 합류하여 후일을 도모하자고 했고, 그도 이대로 죽는 것보다 왜적을 더 섬멸하는 것이 낫다고 여겨 이순신 진영으로 향했다.

 

이순신이 이끄는 전투에서 싸우던 황대중은 조총이 허벅지를 관통하면서 총상으로 사경을 넘나들게 되었다. 한 달 뒤 다리가 낫긴 했지만 결국 오른쪽 다리마저 절게 되었다. 기어이 양쪽 다리를 다 못 쓰게 되자 이순신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p.77)

“황 장군, 그대는 왼쪽 다리를 효도로 잃더니 오른쪽 다리는 나라를 위해서 잃었구려. 양쪽 다리를 다 저는 그대는 앞으로 호를 양건(兩蹇)으로 하게나.”

양쪽 다리를 절게 된 황대중은 그때부터 호를 양건으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왜적을 이 땅에서 몰아내겠다는 강한 의지와 결심에는 전혀 변함이 없었습니다.

 

순천에서 황대중이 이순신과 함께 왜적을 몰아낼 준비를 하고 있던 무렵, 남원성이 위험하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황대중에게 남원성은 집안 조상들의 무덤이 있는 곳이었다. 황대중은 남원을 구하러 가야겠다고 결심하고 눈물을 머금고 떠났다.

 

1597년 8월, 황대중이 며칠간 말을 달려 도착한 남원성은 이미 우키다와 고니시가 이끄는 왜군 5만 6천 명이 몰려오고 있었다. 황대중의 군사를 보고 남원성을 지키던 조선과 명나라 군사 4천 명은 용기백배했지만 결국 수적인 열세를 극복할 수 없었다.

 

성이 함락되기 직전, 황대중은 성이 내려다보이는 누각 한가운데 의연하게 앉아 있었다. 이윽고 성을 접수한 왜군이 달려와 조총을 쏘았고, 황대중은 쓰러지고 말았다. 다급한 가운데 주부 벼슬을 하던 김완이라는 사람이 그의 시신을 거두어 황대중의 고향 강진으로 보냈다.

 

(p.102)

이순신은 황대중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직접 제문을 지어 보냈습니다.

어머니 병환에 다릿살 베어 약으로 바쳐 못 쓰게 되고

때를 기다려 보배의 칼과 신령한 말을 준비했도다

떠나는 임금 수레를 따르고 진주성 싸움에서 왜적을 무찌르고

한산도 싸움에 탄환이 날아와 다른 다리를 못 쓰게 되었는데

남원 싸움 승리하려 했으나 왜적 탄환이 매우 잔인하구나

오호라 저곳 푸른 하늘이야 그대를 데려감 어찌 이리 빠른고

한 세대 한 세대 만나고 섞여 향불 피워 술 석 잔 바치노라

마음 아리고 죽음 슬프니 혼령은 내려와 이 제물 받으소서.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용감하게 싸웠던 황대중. 나라를 지키는 일에 장애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가 못 쓰게 된 양쪽 다리는 한쪽은 효(孝), 한쪽은 충(忠)에 바쳤으니 길이 후세에 남을 만했다.

 

오늘날 진주와 남원은 평화롭다. 황대중 같은 이들이 목숨 바쳐 싸웠던 나날이 있었기에 평화로운 오늘이 있는 것이 아닐까. 장애인 장군 황대중, 그가 지켜낸 이 땅이 더욱 귀하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