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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을거리와 꾸미개

생활한복에 대한 오해와 진실


생활한복에 대한 오해와 진실
생활한복은 웰빙을 실현한다-1



곱아라 고아라 진정 아름다운지고
파르란 구슬빛 바탕에
자주빛 회장을 받친 회장저고리
회장저고리 하얀 동정이 환하니 밝도소이다.
살살이 퍼져 내린 곧은 선이
스스로 돌아 곡선(曲線)을 이루는 곳
열두 폭 기인 치마가 사르르 물결을 친다.
치마 끝에 곱게 감춘 운혜(雲鞋) 당혜(唐鞋)
발자취 소리도 없이 대청을 건너 살며시 문을 열고,
그대는 어느 나라의 고전(古典)을 말하는 한 마리 호접(胡蝶)
호접인 양 사푸시 춤을 추라, 아미(蛾眉)를 숙이고……. <조치훈의 ‘고풍의상’ 중에서>


요즈음은 곳곳에서 생활한복을 입은 사람들이 눈에 많이 띄는 것은 물론 생활한복을 입는 사람들을 원숭이 보듯 쳐다보는 일도 없다. 그러나 생활한복이 나오기 시작한 1990년 전후에는 민주화운동권들이 입는 옷이거나 도인들만 입는 옷으로 오해하여 입는 사람들은 무척 곤욕을 치러야 했다. 심지어 승복 같다거나 중국옷 같다고 하는 사람까지 있을 정도였다.

이런 생활한복에 대해 언제, 어떻게 태어나게 됐는지, 왜 이름이 ‘생활한복’인지에 대해 아는 사람도 드물뿐더러 혼란스럽게도 다른 이름을 쓰고 있는 사람이 많다. 또 한복에 대한 오해와 편견이 여전이 존재한다. 그래서 이를 명확히 하는 것이 우리의 자존심있는 의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활한복’, ‘개량한복’ 무엇이 맞을까?

우선 용어의 정의를 살펴보도록 하자. 어떤 사람들은 아직도 ‘개량한복’, ‘우리옷’, ‘겨레옷’, ‘민복’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런 말들은 나름대로 일리는 있지만 정확하게 성격을 정의한 이름은 아니다.



▲생활한복 ©뉴스툰


우선 ‘개량한복’이란 말은 ‘뭐가 나빠서 개량했다’는 의미로 들린다. 그러나 생활한복의 출발점을 전통한복으로 보았을 때 그 전통한복을 약간의 불편함만 있을 뿐 나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래서 ‘개량한복’이라고 쓰는 것은 의미상 문제가 있다. 그리고 현재 전통한복전문점에서 전통한복에서 주로 쓰는 옷감인 비단 등을 사용하여 약간의 변형을 주어 만드는 것을 ‘개량한복’이라 부르는 또 다른 종류의 상품이 있기 때문에도 적절치 못하다.

‘우리옷’, ‘겨레옷’은 아름다운 우리말이기는 하나 전통한복은 그럼 ‘우리옷’이 아니냐고 물었을 때는 답하기가 곤란할 것이다. 차라리 ‘우리옷’, ‘겨레옷’은 그냥 ‘한복’ 전체를 아우르는 말로 좋을 듯하다. ‘민복’은 백성 민(民)자를 쓴 것으로 일반 백성들만 입는 질이 낮은 옷이라는 이미지로 생각될 여지가 있다고 하겠다.

이 ‘생활한복’이란 용어는 90년대 중반부터 여러 사람들이 쓰기 시작하다가 1996년 12월 ‘한복입기’를 추진한 당시 문화체육부에 의해 공식용어로 지정되었다. 생활 속에서 편히 입도록 한 한복이라는 의미가 들어있다.



생활한복 역사이야기

그런데 이 생활한복은 어떻게 태어났고, 어떤 과정을 거쳐 오늘에 다다랐을까?

‘생활한복’은 1980년대 후반 민족문화운동을 하던 일부 사람들의 자성에서 출발한다. “그동안 우리는 민족과 자주를 외쳐왔지만 일상생활 속에선 드러나지 않았다. 서양옷을 늘 입으면서 민족을 생각하고, 애기한다는 것은 모순이 있지 않을까? 아름답고 훌륭한 전통한복을 평상시에 입기는 좀 불편한 면도 없지 않다. 따라서 그 약간의 문제만 고쳐주면 스스로의 주체성도 찾을 수 있으면서 편한 의생활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생겨난 것이 ‘생활한복’이다.

초창기엔 선구자격인 몇몇 사람들의 많은 고생을 필요로 했다. 아직 생활한복에 대한 분명한 이론토대도 없었던 것은 물론 수요도 극히 적을 수밖에 없어서 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고, 몇몇 업체는 몇 년 운영하다 접기도 하는 아픔이 따랐던 것이다.

그러다 1996년 문화관광부에서 의욕적인 사업을 시작했다. 매달 첫째 토요일을 ‘한복 입는 날’로 정하고, 전 직원의 한복입기를 추진했다. 전통한복 업체 8곳, 생활한복 업체 7곳(당시 전부였음)을 초청하여 직원들을 대상으로 특별 전시판매를 열어주었다. 국장부터 한복을 입고 관심을 갖자 평직원들이 뒤따랐고, 이때부터 폭발적인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정부종합청사, 서울시청, 경기도청을 순회하며 전시판매를 해나갔고, 그 뒤 많은 사람들은 운동권 등 특별한 사람들이 입는 별스런 옷이란 편견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생활한복의 인기는 치솟기 시작했고, 한 때는 상품을 미처 대지 못할 만큼 호황을 누렸던 때도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관공서와 은행 등으로 한복입기는 번져나갔다.

하지만 그 폭발적인 인기도 잠시 다시 고통의 나락으로 들어선다. 1년여의 호황 끝에 다가온 외환위기는 생활한복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생활한복이란 상품은 원래 경기에 아주 민감한 상품일 수밖에 없어서 수요가 급하게 줄어드는 현상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생활한복이 돈이 된다더라하는 풍문이 돌면서 외환위기 직후 평화시장 쪽의 모방전문 서양옷업체들이 대거 뛰어들게 되었다. 문화관광부 쪽의 말을 따르면 한 때 생활한복 업체가 500곳이 넘었다고 했다. 수요는 급감했지만 공급은 오히려 70여배가 늘어난 것이다. 그야말로 진흙탕싸움이었다.

문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어깨너머로 훔쳐보고, 철학도 없이 만들던 대다수의 업체들은 수십 년간 한복을 입어보지 않았던 소비자의 요구에 쉽게 한복의 중요한 특징을 없애고 왜곡하기 시작했다.

서양옷처럼 체형에 딱 맞게 만들어 몸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섶, 대님 등 중요한 부분은 마구 없애버렸다. 그런가하면 100% 화학섬유(폴리에스텔)를 썼고, 청바지를 바느질 하던 재봉사들의 한복에 대한 기초도 없고. 정성도 결여된 바느질이 겹치면서 소비자들의 생활한복에 대한 매력이 갑자기 줄어들기 시작하였다.

편하다던 한복이 전혀 편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으면서 어렵게 샀던 생활한복에 대한 재구매의 매력은 급격히 감소되기 시작하고, 생활한복에 대한 인상이 아주 나빠져 버린 것은 치명타였다. 결국 5개 정도의 유명업체는 부도로 쓰려졌고, 생산업체가 몇 십 개로 위축되면서 시장은 꽁꽁 얼어붙었다는 것이 대체적이 평가이다. 돈벌기 위해 편법을 썼던 것들이 결국 부메랑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2004년 07월29일 [07:04] ⓒ 뉴스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