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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의 위치가 잘못돼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서울문화 이야기 3]

[그린경제=김영조 기자] 

* 경복궁의 위치가 잘못되었다고 한 무학대사 

무학대사와 함께 한양을 찾아온 태조는 궁궐터를 찾다가 지금의 왕십리에 당도하였다. 청계천이 합류하는 곳에 멈춘 뒤 서울이 될 만한 땅을 찾았다. 북악산과 남산 사이에 상당히 넓은 명당을 발견하고, 그곳이 왕도로 좋은 터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어디에 궁터를 정해야 할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그때 한 할멈이 나타나 “이곳에서 십리를 더 간 곳이 좋다.”라고 일러 준 뒤 사라졌다. 두 사람은 하늘의 계시라고 믿고 북악산 기슭에 궁궐터를 잡았다고 전한다. 그래서 그 할멈이 나타난 곳을 왕십리(往十里))라 불렀다.

 

* 경복궁의 주산과 좌향 

   
 
조선왕조가 한양을 서울로 하고 궁궐을 지을 때 당대 풍수의 대가이며 불교계 왕사인 무학대사와 유학의 거목인 정도전 사이에 논쟁이 있었다. 무학대사는 “건물의 방위를 정함에 서쪽의 인왕산을 주산으로 하여 낙산을 바라보는 형상이 국운이 오래갈 것”이라고 하고, 정도전은 “한 나라의 장래를 어찌 미심쩍게 풍수에만 맡길 수 있겠는가? 임금이 백성을 잘 다스리려면 남쪽을 향하고 북쪽을 등져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결국, 정도전의 주장대로 지금 청와대 뒤 북악산을 주산으로 하여 남산을 바라보도록 경복궁이 지어졌다. 무학대사는 정도전의 주장대로 궁궐이 지어지자 북악산의 산세가 갈라지고 찢어지는 가파른 형상이라 200년 뒤 반드시 이 나라에 후환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하며, 왕사의 직분을 버리고 산사로 들어가 잠적해 버렸다. 조선 건국 200년 뒤인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난 것이 예언대로 된 것일까? 

 

* 관악산의 화기(火氣) 

관악산은 남산 너머에서 경복궁과 마주보는 조산인데, 일찍이 무학대사는 북악산을 주산으로 삼아 남향으로 경복궁을 지으면 정면의 관악산이 궁궐을 위협하니 그 탓에 내우외환이 잦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 까닭은 관악산의 모양이 화기를 품은 화산이고 그 기운이 한강을 건너 궁궐에 전달될 염려가 컸기 때문이다. 풍수지리에서는 “보이지 않는 살기(殺氣)는 관계치 않으나 보이는 살기는 해가 된다.”는 원리에 따라 관악산이 비록 한강 너머의 먼 곳에 있지만, 경복궁에서 그 산이 바라보이기 때문에 좋지 못하다고 보는 것이다.

실제 역사상 경복궁은 화재가 자주 일어났다. 그것을 비보하기 위해서 숭례문 남쪽에는 남지(南池)라는 연못을 파두었다. 이 남지는 장원서(掌苑署)에서 관리했으며, 1629년 화가 이기룡이 원로들의 잔치를 묘사한 <남지기로회도 南池耆老會圖>에서 연꽃이 가득했던 남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남지는 일제강점기 일제에 의해 1910년 매립되었다. 관악산의 화기를 막아줬던 남지가 없어짐으로써 2008년 숭례문이 화재로 불 탄 것은 아닐까? 

   

▲ <대동전도(大東全圖, 김정호, 1861년 이후> 숭례문과 남지. 지도에는 ‘池’라고 표시되어 있다. 조선시대 흥인지문 밖에는 ‘동지(東池)’, 돈의문 밖에는 ‘서지(西池)’가 있었다.(왼쪽)

▲ <이기룡필남지기로회도(李起龍筆南池耆老會圖, 1629,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 보물 866호)> 중 숭례문 부분(오른쪽)


 

* 세종임금은 새마을사업의 선구자였다? 

세종 8년 2월에 한양에는 큰 불이 나 도성 여염집의 1/7에 달하는 2,307호가 불타버린 사건이 일어났다. 이때 세종임금은 화재사건과 관련한 대책을 어떻게 세웠는지 세종실록 13년(1431) 4월 3일 자 기록을 보자.  

“조정에서는 인가가 조밀한 곳은 조금 길을 틔우고 담을 처마에 닿게 쌓아 서까래 끝이 묻히게 하며, 지붕의 안팎을 진흙으로 두껍게 바르고, 나무 울타리를 못하도록 금하되, 어려운 사람들은 적당히 도와주며, 특히 기와는 관에서 대량으로 구워, 가난한 사람에게는 반값만 받는다.”  

그 뒤 한양의 집들은 초가집에서 차츰 기와집으로 바뀌었다. 어떤 이는 이를 두고 세종을 새마을 운동의 선구자로 불러야 한다고 말했다. 
 

* 조선시대의 소방서와 소방관 이야기 

조선시대에도 소방서와 소방관이 있었다. 먼저 조선 전기에 한양을 건설하고 나서 화재가 잦자 집 사이에 방화장(防火墻, 불을 막는 담)을 쌓고, 곳곳에 우물을 팠으며, 초가집을 기와집으로 개량했고, 1426년(세종 8) 일종의 소방서인 금화도감(禁火都監)을 설치하였다. 이 금화도감은 수성금화도감(修城禁火都監)이 되었다가 1481년(성종 12) 수성금화사(修城禁火司)로 고쳤다. 

수성금화사(修城禁火司)에는 멸화군(滅火軍)이란 상근소방대원이 있었는데 불을 없애는 군사라는 말이 재미있다. 정원은 50명이었고 24시간 대기하고 있다가 불이 나면 관원의 인솔 하에 즉시 출동해서 불을 끄는 소방관이다.  

조선시대엔 실수로 자기 집을 태운 사람은 장 40대, 관가나 다른 사람의 집을 태운 사람은 장 50대, 불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힌 경우는 장 100대의 형을 받았다. 일부러 집을 태우면 처벌이 더 무거웠음은 물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