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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창제 비밀 프로젝트와 창제에 얽힌 오해들

[서울문화 이야기 6]

[그린경제=김영조 기자]  누구나 세종의 가장 큰 공적을 훈민정음 창제로 보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것은 지금처럼 한국이 발전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것이 한글만 한 것이 없다는 데 있다. 하지만,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하는데 어려움이 없었을까? 세종실록 103, 26220일 자 기록에 보면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등이 언문 제작의 부당함을 아뢰는 상소를 한다. '


우리 조선은 조종 때부터 내려오면서 지성스럽게 대국(大國)을 섬기어 한결같이 중화(中華)의 제도를 따라 글을 같이 쓰고 법도를 같이하는데도 새롭게 언문을 창제하신 것은 보고 놀랐습니다. 만일 중국에라도 흘러들어가서 혹시라도 비난하여 말하기라도 하면, 어찌 대국을 섬기고 중화를 사모하는 데에 부끄러움이 없사오리까.” 


중국을 섬기는 나라에서 감히 독자적인 글자를 만들 수 있느냐는 힐난이었다. 이런 생각은 당시 중화사상에 찌들어 있던 대부분 조선 사대부들이 가지고 있었던 철학이었을 것이다. 더더구나 최만리는 집현전 부제학으로 당시 최고 학자였다. 최만리 말고도 대다수 집현전 학사들이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던 터라 감히 드러내놓고 훈민정음 창제 작업을 할 바보는 없었을 게다.  


세종은 자신의 집권 기간에 훈민정음의 창제를 가장 중요한 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중대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세종은 최만리의 반대가 없었더라도 전술전략을 고려하지 않았을 까닭이 없다. 그 가운데 하나는 훈민정음 창제를 공주와 왕자 등 최측근의 도움만 받아 극비리에 진행했다. 따라서 아마도 매일 밤 경복궁 수정전에서는 세종대왕이 언어학과 씨름하고 있었을 것이다. 아무도 몰래 비밀스럽게 가끔 정의공주와 왕자들에게 숙제를 내주면서 말이다

 

   
▲ 세종이 왕자와 공주들과 함께 밤마다 비밀프로젝트 작업을 했을 경복궁 수정전

 
그뿐만 아니라 세종은 창제하고 반포한다 하더라도 사람들이 쓰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훈민정음을 자연스럽게 정착시킬 것인가를 고민한다. 오로지 훈민정음 연구에만 매달려 많은 책을 펴낸 김슬옹 박사는 조선 시대 언문의 제도적 사용 연구(2006, 한국문화사)에서 세종이 편 훈민정음 정착 과정을 다음처럼 정리했다).  


창제(1443)-운회 번역(1444)-최만리 반대 상소 논쟁(1444)-해외학자 자문(1445)-용비어천가 실험(1445)-완성반포(1446)-공식 문서(의금부, 승정원)로 실천(1446)-언문청 설치(1446)-문서 담당 하급관리 시험제도 시행(1446)-다음 과거부터 모든 관리 시험에 훈민정음 실시 예고 (1447)-최초의 언문 산문책 석보상절간행(1447)-세종 친제 월인천강지곡간행(1447)-사서 번역 지시(1448)-정승 비판 언문 투서사건(1449)” 


이로써 백성은 물론 사대부들도 어쩔 수 없이 쓰지 않을 수 없게 해나간 세종의 철저한 지략에 혀를 내두를 뿐이다.



훈민정음 창제에 관한 오해

































훈민정음은 분명히 세종임금의 작품이다. 하지만, 세종임금의 훈민정음 창제에 대한 오해 또는 다른 주장들이 있다 


특히 그동안 잘못 알려졌던 오해는 훈민정음의 창제가 세종임금의 지시에 의한 집현전 학사들의 공동작품이라는 얘기이다. 하지만, 당시 최만리를 비롯한 대부분 집현전 학자들과 사대부들의 뻔한 반대 때문에 드러내놓고 창제할 수 없었고, 또 훈민정음을 창제할 만큼 성운학에 능통한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세종임금은 직접 창제할 수밖에 없었으며, 훗날 문종이 되는 세자, 수양대군, 안평대군, 둘째딸 정의공주 등 자식들의 도움으로 훈민정음 스물여덟 자를 만들었다.  


특히 정의공주의 시댁 죽산 안씨 족보에 보면 "한글의 변음과 토착(사투리로 추측)을 세종임금이 대군들에게 풀라고 하니 대군들이 못 풀자 세종이 정의공주에게 하라고 했는데 정의공주가 변음과 토착을 풀어 올려 세종이 극찬하시고 상으로 노비 수백 구를 하사하셨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렇게 훈민정음 창제에는 여성인 정의공주가 다른 왕자들보다 더 큰 몫을 해냈다고 한다. 


물론 정인지 등 일부 집현전 학자들의 도움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도움은 창제 이후 훈민정음을 펼치는 일에서였을 뿐이다. 또 창제 당시에는 정인지 등이 갓 과거에 급제하거나 하여 학문이 창제에 가담할만하지 못했었다는 얘기도 있다.


일부에서는 훈민정음이 독창적인 것이 아니라 단군 3세 가륵임금 때인 기원전 2181년에 정음 38자를 만들어 가림토(加臨土)’ 문자라고 이름 지어 발표한 것을 세종임금이 표절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세종임금 당시의 신미대사의 작품이라고도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이들 주장은 단순한 주장일 뿐 학문적인 실증이 없으며, 당시 중국의 성운학 등 언어에 관한 지식에 통달한 세종임금이 산스크리트어 등 당시 존재했던 모든 글자들을 참고하여 만든 창작품이라는 것이 학계 공통적인 이야기이다.  


오해는 이것뿐이 아니다. 훈민정음은 언문이라 하여 조선시대 양반이나 지배층들은 철저히 무시하고, 여성이나 피지배 계층에 의해 발달해 왔다는 것이 통념이었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조선시대 한글 어문정책을 연구해 온 김슬옹 교수는 이에 대해 전혀 다른 주장을 펼친다. 그는 '조선시대 언문 창제 이후 언문은 국가가 제정한 다중 공용문자 중의 하나'였다고 한다. 언문은 전체적으로 보면 한문보다 공용문자로서의 비중은 작았지만 교화 정책과 실용 정책 측면에서는 한문과는 비교가 안 되는 비중을 지닌 공식 문자였다는 것이다.  


이는 언문이 단지 한문의 보조 차원 문자라기보다는, 한문과는 쓰임이 다른 문자라는 말이다. 대비, 중전 등은 언문을 썼고, 이들이 직접 교지를 내리면 신하들은 교지를 받들려면 언문을 배울 수밖에 없었으며, 백성을 상대로 교화하기 위한 문서나 책들은 철저히 언문으로 썼기에 자연 언문이 무시될 수 없었다는 그의 주장은 설득력이 충분하다 

 

   
▲ 세종 31년(1449) 10월 5일 치에 보이는 하정승 벽서사건. 이를 보면 훈민정음이 이미 백성 사이에 많이 퍼졌다고 보인다.

또 쉬운 훈민정음은 백성이 좋아할 수밖에 없었고, 반포한 지 3년밖에 안 된 세종 31(1449)의 기록을 보면 "어떤 사람이 하정승을 비난하는 언문 글을 벽 위에 쓰다."라는 내용이 있는 것을 보면 3년 만에 백성 가운데 익명서를 쓸 정도로 언문이 상당히 퍼졌음을 말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