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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임금은 명나라에 지성으로 사대했다(?)

[서울문화 이야기 7]

[그린경제=김영조 기자]  한 학자는 세종임금이 명에 지성사대(至誠事大)를 했다.”라고 주장했다. 우리가 아는 세종은 나라를 반석 위에 올려놓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그리고 자주적인 임금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명나라에 지성으로 사대했다니 모두가 깜짝 놀랐던 것이다. 정말 그 학자는 세종을 사대주의로 본 것인가?  

지성사대로 볼 수 있는 예를 그는 여럿 들고 있다. 먼저, 세종실록 25, 6(1424) 92일 자 기록을 보면 임금이 상복을 사흘 만에 벗지 않고 27일의 제도를 실행하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신하들이 홍무제의 가르침에 온 세상의 신하와 백성은 3일 만에 복을 벗으라.”라고 했다며, 반대했지만 세종은 군신의 의리를 내세워 중국 천자의 죽음에 스무이레 동안이나 상복을 입었다.
 
   
▲ “임금이 상복을 사흘 만에 벗지 않고 27일의 제도를 실행하다.”는 세종실록 6년(1424년) 9월 2일 자 기록
 
또 명나라는 여러 차례 1~ 3만 마리의 말을 바치라고 요구했다. 이에 국방력 약화를 우려한 신하들의 반대에도 지금 만일 칙서를 따르지 아니하고, 말의 숫자를 채우지 못한다면 오해할 우려가 있다. 조선은 예부터 예의의 나라라고 하여 정성껏 사대하였다.”라며 명에 말을 보냈다. 그뿐만 아니다. 세종 14년에는 농업국가의 중요한 자산인 소 1만 마리를 달라는 명의 요구를 따르기도 했다.
 
단순히 이런 세종의 행적만 보면분명히 지성사대임이 확실하다.러나 과연 세종이 명을 끔찍이 사대하여 그렇게 했을까? 물론 그 학자는 세종을 단순 사대주의자로 본 것은 아니다. 그는 지성사대의 효과로 선진문물을 수입할 수 있었고, 안보를 튼튼히 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또 명에 복속한 여진족을 정벌할 때도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지성사대는 어디까지나 전략적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일까?
 
세종은 최만리 등의 반대가 아무리 거세도 학문적으로는 아무 걱정이 없었다. 그것은 언어학에 관한 한 어느 신하도 따라올 수 없을 만큼 뛰어난 지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최만리의 격렬한 상소에 세종은 네가 운서(韻書)를 아느냐. 사성 칠음(四聲七音)에 자모(字母)가 몇이나 있느냐. 만일 내가 그 운서를 바로잡지 아니하면 누가 이를 바로잡을 것이냐.”라고 호통 칠 정도다.
 
 
세종은 절대음감의 소유자
 
학자들에 따르면 글자를 창제하기 위한 기본적인 바탕인 음성학, 음운학, 문자학 따위에 통달했음은 물론 절대음감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세종실록 59, 143311일의 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 중국에서 수입해서 쓰던 것을 직접 만들어 회례음악을 연주했다는 편경 / 지음도 -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중국의 경()은 소리가 어울리지도 모이지도 아니하는데 지금 만든 경()은 옳게 만들어진 것 같다. 이런 경석(磬石)을 얻는 것은 다행스러운데, 지금 그 소리를 들으니 매우 맑고 아름다운 것은 물론 율()을 만들어 음()을 비교할 수 있기에, 매우 기쁘다. 다만, 이칙(夷則) 1()의 소리가 약간 높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세종은 박연에게 모든 악기의 기본음 곧 황종음을 내는 황종율관을 새로 만들어 설날 아침 회례음악에 연주하게 했다. 그런데 연주를 마치자 세종은 동양음악 십이율(十二律) 가운데 아홉째 음인 이칙(夷則) 하나가 다른 소리가 난다고 지적한 것이다. 이는 먹이 덜 마른 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음악 전문가 박연을 물론 회례연에 참석한 누구도 알지 못했지만 세종임금은 이를 확인한 절대음감의 소유자였다. 만일 그런 바탕이 없었다면 최만리 등의 반대를 극복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명나라였다. 나라의 바탕이 아직 튼튼하지 못한 때에 명이 문자 창제를 빌미로 시비를 걸어온다면 나라가 흔들릴 가능성도 있는 중대한 사안이다. 여기에 세종은 많은 고민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 2경이 넘었는데 임금이 오히려 잠을 자지 못한다.”란 기록이 있을 정도로 세종은 생각하고 또 생각했으며, 그래서 명의 요구를 철저히 따랐음은 물론 앞장서서 지성으로 섬기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훈민정음 연구자들에 따르면 훈민정음 창제 이후 창제에 관한 명의 반응을 기록에서 찾을 수가 없다고 한다. 그것은 세종의 전략이 주효했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다른 문자처럼 오랑캐들의 것이라 하여 무시했을 수도 있지만 세종이 지성으로 사대하는 모습에 전혀 의심을 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여러 가지 지성사대의 효과들은 훈민정음을 무사히 창제하고 반포하는데 시비를 받지 않았다는 것에는 필적할 것이 아니다.
 
600여 년 전의 세종임금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고 갔음은 물론 현대인에게 큰 가르침도 주고 있다. 세종은 훈수한다. 힘 있는 자와 어깨를 나란히 하려면 보이지 않는 전술전략을 슬기롭게 활용하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