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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 맹현 그리고 죽도궁 이야기

[서울문화 이야기 11] 재미있는 한양 풍속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 남자의 질투, 여자를 죽여 청계천에 버리다

성종실록 216권, 19년(1488) 5월 20일 자에는 “한성부 참군(漢城府參軍) 박한주가 와서 아뢰기를, 수구문 밖 왕심리(往心里)에 여자의 시체를 내버린 것이 있는데, 상처가 많으므로 이를 검시하도록 하였습니다. 청컨대, 추국(推鞫)하게 하소서.”라는 기록이 보인다.

이곳은 지금의 청계천으로 이곳에 상처가 많은 20살 정도의 여자 시체가 발견되었는데 상처가 심했다. 어느 정도냐 하면 다리 한쪽이 잘려나갔고, 음문은 살이 찢긴 참혹한 모습이었다. 이에 사건이 심각하다고 생각한 성종은 당장 당상관을 불러 추국할 것을 명했다. 내용을 확인해보니 범인은 양반집 주인으로 자신이 데리고 놀던 예쁜 종이 이후 다른 노비와 동침하는 것을 보고 질투가 나서 죽여서 노비를 시켜 내다버렸다는 것이다.

예전 말에 “여자의 질투는 오뉴월의 서리를 불러온다.”더니 이건 여자의 질투보다 더 무서운 남자의 질투다. 하지만, 조사해서 죄가 드러났어도 양반이란 신분 덕에 모든 신하들이 나서서 두둔했고 그 때문에 벌을 제대로 주지 못했다. 잘못된 양반사회의 한 일그러진 모습이 씁쓸하다.

   
▲ 남자의 질투로 노비가 살해돼 청계천에 버려졌으나 양반 범인은 제대로 처벌되지 않았다.(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 삼청동 고갯길 ‘맹현’, 맹사성이 다니 길


경복궁 동문에서 삼청동 쪽으로 가다가 오른쪽, 정독도서관 가는 길은 예전에 고갯길이 있었는데, 고개 이름이 '맹현(孟峴)'이었다. 그것은 이곳에 조선 세종 때 명재상 맹사성(孟思誠)이 살았기 때문인데 그는 아랫사람에게는 자상하면서 엄하지 않았고 예의와 체면에 얽매이지 않았다. 또 집에 사람이 찾아오면 반드시 관복을 입고 대문 밖에까지 나가 맞아들여 윗자리에 앉히고 돌아갈 때도 역시 공손하게 배웅하여 손님이 말을 탄 뒤에야 집안으로 들어왔다.

그 맹사성에 관한 일화는 참 많다. 맹사성은 세종 13년(1431년), 좌의정이면서 국사편찬위원장 격으로 ≪태종실록≫의 편찬을 마치고 아버지의 묘에 성묘하러 서울을 떠난다. 그때 지금의 안성 쪽에 있는 양성 고을 현감과 평택의 진위 현감이 맹정승의 고향나들이 소식을 듣고는, 잘 보이려고 온양 가는 길목인 장호원 근처 연못에서 기다렸다. 그런데 두 현감이 맹사성을 기다리다 서로 권커니 자커니 술을 마셔 꽤나 취한 상태가 되었을 때 어느 늙은이가 검은 소를 타고 그 앞을 지나갔다.

양성현감이 큰소리로 “감히 뉘 앞이라고 늙은이가 검은 소를 타고 거들먹거리며 지나가느냐?”라고 호통 치며 냉큼 가서 데리고 오라고 하인에게 말했다. 그러자 그 늙은이는 “온양 사는 맹고불이 제 소 타고 제 길 가는데 누가 바쁜 사람 오라 가라 하느냐?”라고 대꾸하며 그냥 지나갔다. 그러자 하인은 맹고불을 맹꼬불로 알고 현감에게 아뢰자 “거 이름 한번 괴짜다.”하며 박장대소로 웃어댔다. 그러다가 나중에야 알아차리고 사죄하려고 술에 취한 채 비틀거리며 일어나다가 허리에 찬 도장(官印)을 연못에 빠뜨렸다. 그래서 훗날 연못 이름을 <인침연(印沈淵)>이라 했다는데 마음가짐이 반듯하지 못한 사람은 윗사람에게 잘 보이기는커녕 망신살이나 면해도 다행이겠다.

 

   
▲ 세종 때 명 재상 맹사성, 그는 소를 타고 다닌 것으로 유명했다.(그림 이무성 학국화가)


** 종로 관훈동 ‘죽도궁’의 귀신 굿은 명온공주 남편과 유래

임금의 사위 곧 공주의 남편을 부마라고 한다. 조선 후기 세도가 안동 김씨 문중의 김현근(金賢根)은 조선 제23대 순조임금의 첫째 공주 명온공주(明溫公主)와 혼인해서 부마가 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부마 김현근이 심한 정신병으로 발작을 해 집안은 물론 동네를 온통 소란하게 만들어 부마의 체면이 깎였다. 그래서 왕실과 김씨 문중에서는 김현근의 정신병을 치료하려고 노력했으나 백약이 무효였다.

 

하는 수없이 마지막으로 무당을 불러 굿을 하며 경악법(驚愕法)으로 치료하려고 했다. 경악법이란 딸꾹질을 할 때, 깜짝 놀라게 하여 딸꾹질을 멈추게 하는 것처럼 환자를 매우 놀라게 하여 환자의 몸속에 있는 악귀를 쫓아낸다는 치료법이다. 밤이면, 김현근을 마당 한가운데 앉혀놓고 무당이 대나무 큰칼을 만들어 양손에 들고 요란한 가락에 따라 춤을 추면서 환자의 둘레를 빙빙 돌았다. 그러다 환자가 잠깐 졸거나 다른 곳에 신경을 쓰는 틈을 타서 가지고 있던 죽도로 목을 치는 시늉을 하면 환자가 크게 놀라고 그 덕분에 몸에 붙은 악귀를 쫓아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이 집에서는 매일 죽도를 들고 춤을 추는 소리와 죽도가 부딪치는 소리가 담 밖까지 들려 나와 그 뒤로부터 동네 사람들이 이 집을 '죽도를 들고 춤을 추는 궁'이라는 뜻으로 “죽도궁(竹刀宮)”이라 불렀다. 죽도궁은 뒷날 죽동궁으로 바뀌었다가 민영익이 살았다 해서 “민대감댁”으로 바뀌었으나 지금 이 집은 헐리고 없다. 다만, 지금은 태화빌딩 앞 길 건너 관훈빌딩 자리에 작은 안내문이 붙어 있어 한 시대의 사연 있는 집터였음을 알릴뿐이다.

   
▲ 죽도를 들고 춤 추던 소리가 들리던 죽도궁터 표지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