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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남(禁男)시장과 복가지타기 그리고 팽형

[서울문화 이야기 12] 재미있는 한양 풍속

[그림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  단종비 정순왕후의 정업원과 금남시장  

   
▲ 단종비 정순왕후를 돕기 위한 금남(禁男)이 있었다.(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순조 임금 때 펴낸 한경지략이란 책에 보면 동대문 밖 동묘의 남서쪽에는 한양에서 가장 큰 푸성귀(채소)시장이 있었다. 그런데 이 시장은 남자들이 드나들 수 없었던 금남구역이었다. 그 까닭이 무엇일까? 

그곳에서 가까운 곳에는 단종비인 정순왕후 송 씨가 단종이 죽고 과부가 된 뒤 초막을 짓고 살았던 정업원(淨業院)”이 있었다. 이후 세조는 정순왕후가 동냥으로 끼니를 잇는다는 소문이 돌자 그 근처에 영빈정이란 집을 짓고 살게 했지만 정순왕후는 영빈정에 들어가기를 거절했다.  

또 조정에서 식량을 주어도 완강히 거부하고, 말년에는 베에다 자줏물 들이는 염색을 하면서 겨우 풀칠을 했다. 그래서 이 근처 마을을 자줏골이라고 불렀는데 장안 부녀자들이 정순왕후를 도우려고 앞 다투어 몰려들었다. 그런데 조정에서 이를 금하자 시장을 만들고 장사하는 척하면서 정순왕후의 생계를 도왔으며 혹시 조정에 밀고할까 봐 남자들은 일절 출입을 금하였다
 

** 성균관 선비와 종의 딸 사랑이 서린 곳, 정고개 

   
▲ 양반과 종의 슬픈 사랑이 서려있는 정고개 .(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지금은 없어졌지만 명륜동 성균관 정문에서 성균관을 안고 부엉바위 쪽으로 올라가는 가파른 샛길이 있었는데 그 이름이 ()고개였다. 그리고 그 고개 너머 마을 이름이 ()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정고개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그리고 리처드슨의 대하소설 파미라를 복합해놓은 듯한 사랑의 무대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그것은 신분차별이 엄격했던 조선시대에 은행나무 사랑을 속삭였던 불행한 두 젊은 남녀의 사랑 얘기가 서렸기 때문이었다. 조선 제7대 세조임금의 외딸 의숙공주의 종에게 예쁜 딸이 하나 있었는데 성균관에서 과거를 준비하던 선비 안윤이 그 종의 딸을 사모하게 되었다. 그런데 안윤이 그 종의 딸에게 한 몸이 되기를 요구했지만 그 종의 딸은 한 몸이 되기를 거부하고 정신적인 사랑만 이어갔다. 그렇게 한 까닭은 만약 양반이 종과 결혼하게 되면 양반은 사회에서 소외당하고 종의 상전에게도 누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둘이 동거한다는 헛소문이 퍼졌고 이에 가문의 명예를 더럽혔다고 상전은 종에게 가문형(家門刑)”을 내렸다. 가문형은 스스로 자결하도록 하는 것이지만 사실은 타살인데 목을 매 죽이거나, 치마에 돌을 안겨 깊은 연못 속에 빠뜨리거나, 얼굴에다 물을 적신 창호지를 발라 서서히 질식사를 시키는 것이었다. 결국, 이 종은 억울하게 가문형으로 죽었고, 안윤도 그 처자를 그리며 고갯길을 오르내리다 실성하여 죽었다. 이에 사람들은 그 가엾은 연인들의 비극에 공감하여 고개 이름을 정고개라고 붙여준 것이다. 조선 중기의 학자 이륙은 이 이야기에 옛 열녀들이 이보다 더할까 보냐?”라고 글을 써서 칭찬했다. 신분질서에 희생당한 연인들의 가슴 아픈 이야기다.
 

** 재산 대신 복첩을 물려주었던 종로 육의전 상인들  

   
▲ 조선시대 상인들의 상속유산 - 복가지타기.(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조선시대 종로에는 독점적 상업권을 부여받고 나라에서 필요한 물건을 대주던 여섯 종류의 큰 상점 곧 육의전(六矣廛)이 있었다. 이 육의전 가게들에는 복첩이란 것이 있었는데 이는 단골손님의 이름을 적은 수첩이다. 그래서 복첩이 두꺼우면 두꺼울수록 단골손님은 많은 것이고, 그것이 그 가게의 규모를 가늠하는 것이었다. 이 복첩은 조상의 위패와 나란히 모실 정도였으며 그 단골손님 가운데는 3대에서 7대까지 내려오는 단골손님인 경우가 허다했다. 

이 육의전 가게들은 아버지가 늙으면 자식에게 재산이 아닌 복첩을 물려주었다. 육의전에 제사가 있는 날 아이들이 느티나무가지에 매달려 가지 끝으로 옮겨가게 했다. 바지가 벗겨지더라도 손을 놓을 수는 없는데 이를 복가지타기라고 했으며, 그처럼 단골을 잡으면 어떻게든 놓지 말라는 신용교육을 그들은 했던 것이다.
 

** 조선시대 탐관오리를 공개처형했던 혜정교 

   
   탐관오리를 처형하는 팽형이 있었던 혜정교.(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서울 광화문우체국 북쪽에 혜정교(惠政橋)라는 다리가 있었다. 세종 16(1434) 102일자에 보면 오목해시계인 앙부일구(仰釜日晷)를 처음으로 혜정교와 종묘(宗廟) 앞길에 설치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보고 시각을 알게 하였다. 그런데 이 다리 위에서는 부정부패를 저지른 탐관오리를 벌주는 팽형 곧 끓는 가마솥 속에 죄인을 닮아 삶는 공개처형을 하기도 했다.  

이 팽형 절차를 보면 혜정교 한 가운데에 임시로 높다란 부뚜막을 만들고, 사람이 들어갈 수 있을만한 큰 가마솥을 걸었다. 솥에는 물을 붓고 아궁이에는 불을 땔 수 있도록 장작을 넣는다. 그 앞쪽에 천막을 치고, 포도대장이 앉으면 팽형이 시작된다. 그러나 진짜 팽형을 하는 건 아니고 죄인을 가마솥에 담고 솥뚜껑을 닫은 다음 구령에 따라 장작불을 지피는 시늉만 하고 실제로 불을 붙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솥 속에 든 죄인은 그 순간부터 삶아져서 시체처럼 시늉을 해야 했다. 그런 다음 꺼낸 "살아있는 시체"를 식구들에게 넘기면 식구들은 미리 준비해간 칠성판에 이 "살아있는 시체"를 뉘여 집으로 데리고 가 격식대로 장례를 치른다. 이렇게 장례가 끝나면 호적이나 족보에 죽은 사람으로 오르는 것이다. 물론 먹고사는 일은 할 수 있고 아이도 낳을 수 있지만 "살아있는 시체"의 아이는 태어나도 아비 없는 사생아가 되었다. 요샛말로 생매장시키는 셈이다. 살아있으되 산 사람이 아닌 팽형은 부정부패를 저지른 탐관오리에게는 죽음과 같은 벌이라는 경고성 형벌이며 이로써 부정부패의 근원을 뿌리 뽑으려는 효과를 노린 형벌이었다. 요즈음은 탐관오리보다 더한 사람들한테도 솜방망이 벌을 내려 국민을 실망시키는 것에 견주면 조선시대 형벌은 상당히 의미가 있었다. 탐관오리가 날뛰는 세상이다 보니 혜정교의 팽형이 다시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