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04 (토)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상세검색
닫기

사직단은 태사와 태직으로 불러야 한다

[서울문화 이야기 13] 한양의 역사적인 장소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1. 임금이 하늘에 제사 지내던 환구단

   
▲ 일제에 철거되기 이전의 환구단

“임금이 면복(冕服)을 갖추고 환구단(圜丘壇)에 올라 제사를 지내기를 의식대로 하였다. 호천 상제위(昊天上帝位)·황지기위(皇地祇位) 및 태조위(太祖位)에는 임금이 친히 삼헌(三獻)을 행하고, 대명위(大明位) 및 풍운뢰우위(風雲雷雨位)에는 세자가 삼헌(三獻)을 행하고, 야명위(夜明位) 및 동남북서해(東南北西海), 악독산천위(岳瀆山川位)에는 영의정 정인지가 삼헌을 행하였는데….” 위는 세조실록 6권, 3년(1457)에 나오는 기록으로 세조가 면복을 갖추고 환구단에 제사를 올렸다는 내용이다.   

환구단이 맨 처음 설치되어 제사를 드렸던 것은 고려 성종 2년(983) 정월이었는데 이후 설치와 폐지를 계속 되풀이하다가 세조 2년(1456)에는 일시적으로 제도화하여 1457년에 환구단을 설치하고 제사를 드리게 되었다. 이후 세조 10년(1464)의 제사를 마지막으로 환구단에서의 제사는 중단되었다. 그러다 환구단이 다시 설치된 것은 고종 34년(1897) 조선이 대한제국이라는 황제국으로 이름을 바꾸고,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면서부터이다. 
 

   
▲ 현재 조선호텔 옆에 남아있는 황궁우

   
▲ 조선호텔 경내 황궁우 옆에 있는 돌북(石鼓)

하지만, 이 터는 1913년 조선의 근거를 없애려던 일제에 의해 철거되고 이듬해 그 자리에 조선호텔이 들어서면서 축소되었으며, 지금은 황궁우와 돌북(석고) 그리고 3개의 아치가 있는 석조 대문만이 보존되어 조선호텔 경내에 남아 있다(중구 소공동 87-1). 이제 그 흔적은 없어졌지만 우리 겨레의 바탕이랄 수 있는 환구단의 의미는 다시 새겨야 하고 시금히 복원해야만 할 일이다. 

광복 이후 종묘 및 사직대제는 복원됐으나 환구대제만 복원되지 못하고 있다가, 2008년 11월 27일 그 과정이 기록된 《고종대례의궤》를 고증해 복원하게 되었다. 이후 전주이씨대동종약원(환구대제보존회) 주관으로 해마다 환구대제를 봉행한다.

   
▲ 환구대제에서 제향을 올리는 황제(사진 이유섭 제공)


2. 사직단은 태사와 태직으로 고쳐 불러야 한다
 

서울 종로구 사직동 1-28에는 사적 제121호 사직단(社稷壇)이 있다. 한양(漢陽)에 도읍을 정한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고려의 제도를 따라 경복궁 동쪽에 지은 종묘(宗廟), 서쪽에는 사직단을 설치하였다. 사직단은 나라의 바탕이 되는 땅의 신과 곡식의 신에게 제사지내는 제단이다. 보통 도성의 서쪽에 설치하며 우리나라에서는 한성부 의인달방(儀仁達坊)에 있는데 지금의 사직공원 자리이다. 사직단은 두 개의 단이 있는데 사단(社壇)은 동쪽에, 직단(稷壇)은 서쪽에 자리잡았다. 

제례는 종묘의 예에 따르고 2월과 8월 그리고 동지와 섣달그믐날 밤에 행하였다. 그 밖에도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도 제례를 지냈고, 기우제(祈雨祭)와 풍년을 비는 기곡제(祈穀祭) 등을 여기에서 지냈다. 

   
▲ 사직단

그러나 이 사직단은 고종이 황제국가를 선포하면서 “태사와 태직”으로 이름을 바꿨다. “9월 계묘일(癸卯日)에 하늘땅에 고유제(告由祭)를 지내고 황제의 자리에 올라서 국호를, ‘대한(大韓)’이라고 정하였다. 이 해를 광무 원년으로 삼아 사직(社稷)을 태사 태직(太社太稷)으로 고쳐 쓰고 금보(金寶)와 금책문에 왕후(王后)를 황후로, 왕태자(王太子)를 황태자로, 왕태자비(王太子妃)를 황태자비(皇太子妃)로 쓰도록 명(命)하였다.” 

위는 고종실록 34년(1897) 11월 22일(양력) 자의 기록이다. 고종임금은 아관파천 이후 다시 궁궐로 돌아온 뒤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원구단에서 황제로 등극했다. 이것은 그동안 중국을 사대했던 나라에서 이젠 당당한 그리고 독립적인 황제국가가 됨을 뜻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나라의 뿌리인 사직(社稷)을 “태사(太社)”와 “태직(太稷)”으로 바꿔 부른다. 태사와 태직이란 황제나라에서만 쓸 수 있는 것으로 대한제국의 당당함을 또 한 번 드러내는 것이다.  

하지만, 이 태사와 태직은 일제강점기 일제가 격을 낮추려고 태사와 태직은 다시 사직으로 고쳤고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만들어 훼손한 것처럼 사직단을 사직공원으로 만들어 버렸다. 
 

   
▲ 사직대제에서 제향을 올리는 황제(최우성 제공)

이제 문화재청은 그동안 서울시가 관리해오던 사직단을 문화재청으로 이관하여 《사직서전도(사직단국왕친향도병풍)》 같은 문헌을 참고하여 훼손되고 왜곡된 사직단의 제 모습을 찾아 복원할 계획이다. 이참에 사직단의 제 모습 찾기를 하면서 이름도 “태사 태직(太社太稷)”으로 바로 잡아야만 하겠다.
 

3. 제기동 선농단(先農壇)과 설렁탕의 유래
     *서울 동대문구 제기2동 274-1 (시도유형문화재 15)

선농단은 농사짓는 법을 인간에게 가르쳤다고 일컬어지는 고대 중국의 제왕인 ‘신농씨’와 ‘후직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선농의 기원은 신라시대까지 올라가는데, 고려시대에 이어 조선시대에도 태조(재위 1392∼1398) 이래 역대 임금들은 이곳에서 풍년이 들기를 기원하며 선농제를 올렸다. 선농단 앞에는 밭을 마련하여 제사가 끝나면 왕이 직접 밭을 갈아 농사의 소중함을 알렸는데 이때 나이가 많고 복이 있는 농부를 뽑아 임금을 돕도록 하였다. 
 

   
▲ 선옹대제 제향 올리는 모습(이백수 제공)

이처럼 임금이 직접 밭을 가는 제도는 조선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 융희 3년(1909)까지 계속되었는데 행사 때 모여든 많은 사람을 대접하려고 쇠뼈를 곤 국물에 밥을 말아낸 것이 설렁탕의 유래라는 이야기가 있으며, 다른 얘기로는 국물을 오랫동안 ‘설렁설렁’ 끓인 데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참고로 설렁탕과 곰탕은 뼈를 고아서 육수를 만드는 음식이고, 꼬리곰탕과 도가니탕은 사골국물에 꼬리를 넣고 우려낸 것이며, 갈비탕은 뼈를 우려낸 농도가 적은 맑은 국물로 만든 탕을 말한다. 

“시험으로 먹어 본다는 것이 한 그릇 두 그릇 먹기 시작을 하면 누구나 자미를 드려서 집에 갈 로자 돈이나 자긔 마누라의 치마감 사줄 돈이라도 안이 사먹고는 견듸지 못할 것이다. 갑이 눅은 것도 눅은 것이어니와 맛으로던지 영양으로던지 상당한 가치가 잇는 것이다. 自來로 서울의 폐병(肺病)쟁이와 중병 알코 난 사람들이 이것을 먹고 소복(蘇復, 원기 회복)하는 것은 물론이고 근래(近來)에 소위 신식결혼을 하얏다는 하이카라 청년들도 이 설넝탕이 안이면 조석(朝夕, 아침저녁)을 굴물 지경이다.”  

위는 일제강점기의 잡지 ≪별건곤≫ 제23호(1929년 발행) “경성명물집(京城名物集)”에 나오는 설렁탕이야기이다. 일제강점기 때 서울에서 설렁탕이 큰 인기를 얻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기사이다.
 

4. 궁중의례 친잠례와 누에신에게 제사지내던 선잠단터 

조선시대는 농업의 나라였다. 그래서 임금은 해마다 경칩(驚蟄) 뒤의 첫 번째 해일(亥日, 돼지날)에 제사를 지낸 뒤 임금이 친히 쟁기를 잡고 밭을 갈아 보임으로써 농사의 소중함을 만백성에게 알리는 의식을 행하였다. 그런가 하면 왕비는 친히 궁궐 안팎 여성들을 거느리고 양잠의 본을 보여 비단 생산에 힘썼던 궁중의례인 “친잠례(親蠶禮)”를 했다.  

그런데 세종은 양잠을 크게 장려하여 각 지방에 적당한 땅을 골라 뽕나무를 심도록 한 것은 물론, 한 곳 이상의 잠실(蠶室, 누에치는 방)을 지어 누에를 키우게 하였다. 1506년(중종 1)에는 지방의 잠실을 서울 근교로 모이게 했는데 현재의 송파구 잠실동 일대는 그런 잠실이 있던 지역이다. 대한제국 말기까지 이 일대에는 나이가 300∼400살이나 되는 뽕나무가 있었다. 
 

   
▲ 선잠단은 일제에 의해 헐린 뒤 복원되지 않아 저렇게 터만 남아 있다.

또 1471년(성종 2)에는 뽕나무가 잘 크고 살찐 고치로 좋은 실을 얻게 하여 달라는 기원을 드리려고 동소문(東小門) 밖에 선잠단(先蠶壇)을 지었는데 단에는 대를 모으고 중국 황제(黃帝)의 왕비인 잠신(蠶神) 서릉씨(西陵氏)의 신위(神位)를 모셨다. 그리고 단의 앞쪽 뜰에 상징적인 뽕나무를 심고 궁중의 잠실에서 키우는 누에를 먹이게 하였다. 1908년에 선잠단의 신위는 선농단(先農壇)의 신위와 함께 사직단으로 옮겨졌고 선잠단터는 일제강점기에 개인 땅이 되었다. 현재는 성북국민학교 옆 길거리에 여러 집에 둘러싸인 조그만 터만 남아 있는데 사적 제83호로 지정되었다. 해마다 5월 이면 이곳에서 선잠제를 재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