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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와 마주하기 싫어 북향으로 지은 심우장

[서울문화 이야기 15] 한양의 역사적인 장소 3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7. 일제에 맞선 한규설과 한용운의 집에 얽힌 이야기 


만해 한용운 그는 31만세운동 선언자 33명 중 변절하지 않은 지사이다. 만해에 관한 일화는 참으로 많은데 그를 회유하려고 조선총독부가 성북동 일대 20만 평의 나라 숲을 넘겨주겠다는 것을 한마디로 거절하고, 총독부의 지시를 받은 청년이 돈 보따리를 들고 오자 뺨을 때려 쫓아 보냈다.  


또 최린 등과 함께 3·1운동을 주도했던 그는 감옥에서 일부 민족대표들이 사형당할 것을 두려워하자 목숨이 그토록 아까우냐?”라며 똥통을 뒤엎기도 했으며, 그토록 가까웠던 최린, 최남선, 이광수 등에 대해서도 친일파라며 상종조차 하지 않았다. 벽초 홍명희는 만해 한 사람 아는 것이 다른 사람 만 명을 아는 것보다 낫다.”라고 했으며, 만공 선사는 이 나라에 사람이 하나 반밖에 없는데 그 하나가 만해라고 했다.  


그 만해가 1933년부터 1944년까지 살았던 집 심우장(尋牛莊)”이 서울시 성북구 성북동에 있다. 심우장은 서울기념물 제7호로 지정되었는데 심우장이란 이름은 선종(禪宗)깨달음경지에 이르는 과정을 잃어버린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한 열 가지 수행 단계 중 하나인 심우(尋牛)에서 유래한 것이다 


   

▲ 만해 한용운이 조선통독부와 마주하기 싫어 북향으로 지은 심우장


그런데 이 심우장은 한옥이 모두 남향인데 반해 북향으로 지어졌다. 그것은 남향으로 터를 잡으면 조선총독부와 마주 보게 되므로 이를 거부하고 반대편 산비탈의 북향터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런 만해가 해방을 한해 앞두고 세상을 뜬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을사늑약
(乙巳條約)1905년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압하여 체결한 조약으로, 외교권 박탈과 통감부 설치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한 조약이다. 이 조약으로 대한제국은 명목상으로는 일본의 보호국이나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당시 한성판윤참정대신(參政大臣)을 지냈던 한규설은 이 을사늑약을 끝까지 반대해 파면되었다. 그 뒤 일제가 준 귀족의 작위를 거부한 채 집에 묻혀 살았다.


그 한규설이 살았던 집은 장교동에 있었는데 그 집터는 현재 중구문화원과 을지로2가 파출소가 들어서 있다. 그 한규설의 집은 도시개발에 따라 철거 위험에 있던 것을 정릉동 국민대학교 구내로 옮겼다. 장교동에 있을 당시에는 큰길에서 서북방으로 들어서면 동남향의 솟을대문을 마주하게 되고, 이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행랑 마당에 이르게 되어 있었다. 행랑 마당의 서쪽에는 사랑채, 북쪽에는 안채와 사당, 그리고 별채가 있었는데 지금 현재 이 잘 보존된 조선 후기 한옥은 국민대학교에서 명원민속관으로 쓰고 있다.

  
8. 김상옥 열사가 폭탄을 던진 종로경찰서 자리

서울에서 태어난 김상옥 열사는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비밀결사조직인 혁신단(革新團)을 조직하고 기관지 혁신공보를 발행해 독립정신을 드높였다. 192010월 상해로 망명한 열사는 이시영·조소앙 등 임시정부 요인들의 지도로 의열단에 가입하고 1921년 일시 귀국하여 군자금 모집과 정탐의 임무를 수행했다. 다시 1922년 겨울 폭탄·권총·실탄 등을 지니고 안홍한·오복영 등과 함께 서울에 숨어들어와 거사의 기회를 노리다가 이듬해 112일 밤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짐으로써 일본식민지 척결과 독립운동에 불을 붙였다.  


그러나 일제는 정예기마대와 무장경관 1,000여 명을 풀어 김상옥을 체포하려고 혈안이 되었으며 삼엄한 수색 끝에 포위된 김상옥은 그들과 대치하면서 몸에 지닌 권총으로 구리다(慄田) 외 일본경찰 15명을 사살하고 자신도 마지막 남은 한 방으로 순절하였으니 그의 나이 34살이었다. 


김상옥 열사가 폭탄을 던졌던 종로경찰서는 현재 종로경찰서가 아니라 종로2YMCA 옆 장안빌딩 자리에 있었다. 그래서 지하철 종각역 8번 출구 입구에는 작은 빗돌이 서 있다.


   
▲ 김상옥 열사(왼쪽), 김상옥 열사가 폭탄을 던진 옛 종로경찰서 자리의 빗돌
 

9. 벼락 맞고 요정이 된 매국노 이완용 집 


친일파 우두머리 이완용이 살던 집에 있던 고목에 벼락이 떨어진 사건이 있었다. 이 이완용 집은 헌종 후궁 경빈 김씨가 살던 집으로 순화궁으로 불렸는데 1908년 이완용 손에 넘어갔다. 그 이완용 집에 자주 놀러 다니던 이완용 조카 한상룡은 자신의 회고록에 벼락 맞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한상룡은 자신과 이완용 그리고 이완용 아들 이항구 셋이서 당구를 치고 있었는데 갑자기 하늘이 캄캄해지더니 당구를 치던 방문 앞 아름드리 고목에 벼락이 떨어져 고목이 둘로 갈려져 버렸다. 


그러자 나라 잃은 백성 사이에서는 이완용이 천벌을 받았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래서 이완용은 결국 이 집에서 살지 않게 되었고 요정 명월관 지점으로 전락했다. 그리고 그 명월관 지점 2층 맨 끝방에서는 3·1독립선언의 외침이 울려 퍼졌다. 그 뒤 이 건물은 헐려 기독교 태화관이 되었다가 지금은 빌딩이 들어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순화궁 - 이완용 집 - 명월관(삼일독립선언) - 기독교 태화관>으로 바뀌어 간 이곳은 참으로 파란만장한 곳이었다.  


이곳의 위치는 종각역 3번 출구에서 조계사 쪽으로 200m 가다가 인사동으로 가는 길로 들어서서 100m쯤 가면 있다


   
▲ 삼일만세운동 시작이 된 삼일독립선언유적지, 이완용 집이었다가 명월관지점으로 바뀌었고, 현재 빌딩이 들어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