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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조선신궁으로 조선의 정신을 짓밟다

[서울문화 이야기 15] 한양의 역사적인 장소 3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일제가 조선 식민지배의 상징으로 서울 남산에 세운 조선신궁[朝鮮神宮]이라는 신사가 있었다. 그 신궁은 1925년 천조대신(天照大神, 아마테라스 오오카미), 명치왕 등 일본이 가장 큰 신으로 여기는 신들을 받들었다. 조선총독부는 19456월 현재 신궁(神宮) 2, 신사(神社) 77, 면 단위에 건립된 작은 규모의 신사 1,062곳을 세웠다.  

그런데 종교시설물인 이 조선신궁 안에는 본전, 중문, 사무소 등과 함께 경찰관출장소도 있었다. 그 종교시설물 안에 경찰관출장소가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일본 홍문당에서 펴낸 일본통치하의 해외신사란 책을 보면 일본 헌병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신사로 데려가 강제로 신사참배 시켰는데 이에 반발하여 온 나라에서 신사를 습격하여 부수고 불을 지르는 사건이 잇달았다고 한다. 조선신궁은 일제가 건국신화의 주신 천조대신과 조선을 강제 병합한 명치왕을 제신으로 삼고 조선 사람들에게 강제로 믿게 한 장소이다. 조선신궁이 있던 곳은 한양공원(구 남산식물원 ·안중근의사기념관 ·남산도서관 터) 자리이다. 

   
▲ 서울 남산에 세운 조선신궁


조선땅 곳곳에 신사를 만들어라!
신사로 조선인의 혼을 짓밟으려 했던 일제의 만행  

조선을 무단으로 빼앗은 일제는 자신들의 조상신인 아마테라스오오카미(天照大神)를 조선인들이 섬기도록 강요했다. 일본인 거류민을 대상으로 국내에 처음 들어온 신사(神社)제도는 조선총독부가 설치되면서 조선인에게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주입시키는 기반으로 확대되었다. 총독부는 1915'신사사원규칙'(神社寺院規則)1917'신사에 관한 건'을 잇달아 공포하여 한국에 들어온 모든 신사의 정비와 증대를 꾀했다. 이를 바탕으로 1925년에는 조선신사가 조선신궁(朝鮮神宮)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931년 만주 침략에 이어 1937년에는 중일전쟁을 일으키는 과정에서 대륙침략정책의 발판을 조선에 두고 일본과 조선이 하나라는 이른바 내선일체를 표방한 황민화정책을 강력히 추진하였는데 신사참배는 그중 가장 기본적인 정책이었다. 1930년대 중반부터 국민의 사상통제가 본격화되어, 신사 중심으로 애국반이 편성되고 신사참배, 궁성요배, 일장기게양,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 제창, 근로봉사의 월례행사가 강요되었다.

7대 조선총독 미나미(南次郞)는 당치도 않은 국체명징(國體明徵, 천황중심 국가체제를 분명히 하는 일)을 내세워 겉 다르고 속 다른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주장했다. 그러면서 조선 전역에 1() 1신사(神社)의 설치를 강행하여 일제의 기관원들뿐만 아니라 일반 조선인들에게까지도 신사 참배를 강요하게 되니 이로써 우리 동포들이 받은 정신적 타격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기독교인들은 교리에 어긋남을 이유로 신사 참배를 거부하고 나섰으며 그 결과로 19382월까지 장로교 계통의 9개 중학교와 9개 소학교가 폐쇄 당했고 2천여 명의 교인이 옥고를 겪었으며, 2백여 개소의 교회가 폐쇄 처분을 당하게 되었던 것도 이 무렵의 일이었다.

또한, 각 가정에 신붕(神棚, 가미다나 곧 신전) 설치, 신궁의 부적 배포가 강제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경찰서 안에 감시대를 조직하고 애국반 안에 밀정조직을 만들어 이를 감시하게 했다. 한편, 19368월 신사제도 개정에 대한 칙령이 발표되어 황민화정책의 상징으로서 신사제도가 행정구역별로 재정비·신설되었다. 

   
▲ 전주신사, 조금은 헐리고 없지만 조선 곳곳에는 일제가 저런 신사를 세웠다.

이에 따라 1936년에 524개였던 신사가 1945년에는 1,062개로 급증했다. 그러나 이러한 일제에 항거하여 김두석 애국지사를 비롯한 수많은 조선인은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식민지통치에 맞서 저항했다.  

이는 단순한 신사라는 시설에 대한 참배 거부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신사참배 거부는 일본인 조상을 모실 수 없다는 조선인의 자존심이자 겨레 혼을 지키려는 철학이 밑받침되었던 역사적인 거대한 저항 운동이었음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참고로 인천신사는 1916.4.24, 강원신사는 1918.3.11, 대전신사는 1917,6,11, 원산신사는 1882.5.23, 용두산신사는 1917.7.10, 마산신사는 1919.6.23일에 각각 세워졌으며 일제는 이러한 시설을 전국 요소요소에 세워놓고 조선인들에게 참배를 강요했으며 거부하는 자들을 감옥에 가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