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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김상옥 의사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지다

[그린경제/얼레빗 = 이한영 기자] 지금으로부터 91년 전인 1923년 1월 12일 밤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일본의 식민지 척결과 독립운동에 불을 붙인 사람이 있다. 그의 이름은 김상옥!

김상옥 의사(1890.1.5-1923.1.22)는 의열단원으로 1922년 겨울 폭탄·권총·실탄 등의 무기를 휴대하고 동지 안홍한·오복영 등과 함께 서울에 잠입하여 거사의 기회를 노리다가 이듬해인 1월 12일 밤 거사를 이룬 것이다.

 “그 애가 자랄 때 온갖 고생을 했어요. 옷 한 가지 변변한 것을 못 얻어 입히고 밥 한술도 제대로 못 먹였으며 메밀찌꺼기와 엿밥으로 살았지요. 어려서 공부가 하고 싶어 “어머니 나를 삼 년만 공부시켜 주세요” 하던 것을 목구멍이 원수라 그 원을 못 풀어 주었습니다. 낮에는 대장간에서 일하고 밤에는 야학을 하는데 시간이 급하여 방에도 못 들어가고 마루에서 한 숟갈 떠먹고 갈 때 그저 ‘체할라 체할라’ 하던 때가 엊그제인데 어쩌다가 이 모양이 되었습니까? ”

어머니 김점순 여사는 아들의 주검 앞에 통곡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어머니 김점순 여사는 결코 나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김점순 여사는 1923년 아들 김상옥이 종로경찰서에 폭탄 투척 의거를 결행할 때 거사에 필요한 권총을 감춰주고 무기를 전달하는 등 적극적으로 의거를 지원하여 아들이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을 가능케 하였다.

이일로 왜경에 잡혀 무수한 고초를 겪었지만 아들보다 강하면 강했지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은 모습으로 꿋꿋함을 보였으며 정부에서는 어머니 김점순 여사의 공훈을 기려 199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한 바 있다.

   
▲ 순국한  김상옥의사 부인과 어머니 김점순여사의 한식 성묘 기사(동아일보 1923.3.15 )

김상옥 의사는 종로경찰서에 폭탄 투척안 뒤 정예기마대와 무장경관 1,000여 명을 풀어 자신을 체포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던 수색대에 포위된 채 몸에 지닌 권총으로 구리다(慄田)외 일본경찰 15명을 사살하고 자신도 마지막 남은 한 방으로 순절하였으니 그의 나이 34살이었다.

어려서부터 야학을 통해 민족의식을 싹 틔우던 김상옥 의사는 급기야 조국의 독립운동을 위한 최일선에 서서 그간의 소극적인 방법을 달리하여 조직적이고 적극적인 투쟁을 모색하다가 동지들을 모아 암살단을 조직하게 되는데 혁신단(革新團)이 그것이다.

암살단은 김상옥을 중심으로 윤익중, 신화수, 김동순, 서병철 등으로 이들은 독립자금모집과 무기수송, 관공서 폭탄 투척 등을 계획한다. 이들의 주된 표적은 일제 총독과 고관을 비롯하여 민족반역자들을 숙청하는 것으로 이 계획의 효과적으로 해내려고 대한 광복회의 양제안, 우재룡 등의 동지와 적극적인 유대관계를 가지고 무력투쟁을 펼쳤으나 1차 목표로 전라도 등지의 친일파 척결을 위해 일본경찰이나 악명 높은 헌병대 습격을 감행하였다.

또한, 1920년 8월 2일 미국의원단이 동양각국을 시찰하는 날을 잡아 이들을 영접하러 나간 일제 총독과 고관 등을 처단하기 위해 직접 상해 임시정부에 가서 이동휘, 이시영, 안호 등과 협의한 끝에 권총 40정, 탄환 300여 발을 가져와 이들 시찰단의 조선 방문 때 거사를 도모했다. 미국 시찰단은 여행 목적이 관광이었지만 이때는 제1차 대전이 끝나고 일제가 대륙침략을 추진하던 때로 미국의 아시아 극동정책 특히 만주를 포함한 소련과 일본과의 이해가 첨예하게 대립하던 시기였다.

   
▲ 김상옥 의사(왼쪽), 종로경찰서 의거터 표지석(종각역 3번 출구)

따라서 식민지 한국인의 처지에서 미의원단에게 일제의 침략전쟁을 인식시키고 결과적으로 한국의 독립을 지원하게 함과 동시에 세계여론에 호소하려는 게 그 목적이었다. 이를 계기로 이들은 제2의 3·1운동과 같은 거족적인 민족운동을 일으키기로 맘을 먹었다. 그러나 미국 의원단의 서울 도착 전날 일부 동지들이 잡혀가는 바람에 이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고 그는 일제 경찰의 수사망을 피하여 중국 상해로 망명하게 된다.

이곳에서 다시 김상옥은 김구·이시영·조소앙 등 임시정부 요인들의 지도와 소개로 조국독립을 위한 투쟁을 전개하였는데 1921년 일시 귀국하여 군자금 모집과 정탐의 임무를 수행하였고, 다시 1922년 겨울 의열단원으로 폭탄·권총·실탄 등의 무기를 휴대하고 동지 안홍한·오복영 등과 함께 서울에 잠입하여 거사의 기회를 노리다가 1923년 1월 12일 밤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함으로써 일본의 식민지 척결과 독립운동에 불을 붙였던 것이다.

오늘은 김상옥 의사가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일본의 식민지 만행을 꾸짖고 조선의 독립을 염원하던 거사 91년이 되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