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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편지

대사헌, 통행금지를 어겨 파직되다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2904]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통행금지” 하면 나이 지긋하신 분들은 추억으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광복을 맞으면서 시작된 통행금지가 1982년 1월까지 시민들의 발목을 잡았던 것이지요. 광복 직후엔 밤 8시부터 새벽 5시까지, 1961년부터는 밤 12시부터 새벽 4시까지가 통금시간이었습니다. 동무들하고 신나게 놀다가도 통금시간이 다가오면 오금아 날 살려라 하고 집으로 줄행랑을 쳤었지요. 어떤 이는 미처 피하지 못하고 꾀를 낸다는 것이 장승처럼 멀뚱히 서 있다 여지없이 잡혀 파출소행을 했던 일도 있었구요.


   
▲ 순라꾼들이 들고다녔던 照足燈(국립온양민속박물관)

그런 통행금지가 물론 조선시대에도 있었습니다. 조선이 개국되자마자  치안과 화재 예방을 위해 한성을 비롯해 주요 도시와 국경지방에까지 통행금지 시간을 두었지요. 시계라는 것이 없던 시절 성문이 닫히고 통금이 시작되는 때를 “인정(人定)”이라하며 28번의 종을 칩니다. 또한 통금이 풀리는 때를 파루(罷漏)라 하여 33번의 종을 쳐 백성들에게 알렸습니다. 인정을 친 이후는 지위가 높고 낮음을 따지지 않고 통행금지를 위반하여 잡히면 엄한 벌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 순라꾼은 발을 비춘다는 뜻의 조족등을 들고 다녔다.(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태종 1년(1401) 당시 대사헌이었던 이원(李原)이 통행금지 시간에 집으로 가다가 순라꾼 윤종에게 들켰는데 윤종은 차마 대사헌은 체포하지 못하고 그의 종을 가두어두었다가 아침에 풀어주었습니다. 그런데 이원은 이튿날 이를 사헌부에 알려 윤종을 탄핵하도록 하고 자신은 여러 날 동안 출근하지 않았습니다. 대사헌이란 직책을 걸고 방자한 짓을 한 것이지요. 그러자 결국 사간원에서 상소를 하기에 이릅니다. 대사헌이 법을 어기고 통행금지를 위반한 것과 이를 단속해야할 순라꾼은 대사헌이라 봐주는 불법을 저질렀으므로 두 사람 모두를 파직시키라고 말입니다. 결국 임금이 이를 윤허하는 바람에 지금의 감사원장 격인 대사헌의 감투는 잘려버리고 말았습니다. 요즈음은 이런 추상같은 법 집행을 볼 수가 없다고들 합니다만 예전에는 이런 사람을 벌주는 일도 흔히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