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21 (화)

  • 맑음동두천 15.7℃
  • 흐림강릉 14.0℃
  • 박무서울 16.7℃
  • 박무대전 17.0℃
  • 흐림대구 15.8℃
  • 구름많음울산 15.5℃
  • 맑음광주 17.0℃
  • 맑음부산 17.0℃
  • 흐림고창 ℃
  • 맑음제주 17.4℃
  • 흐림강화 16.1℃
  • 흐림보은 14.3℃
  • 흐림금산 15.1℃
  • 흐림강진군 15.8℃
  • 흐림경주시 15.3℃
  • 맑음거제 17.6℃
기상청 제공
상세검색
닫기

항일독립운동

조선혁명군 총사령관으로 일제와 투쟁한 '현익철'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현익철(玄益哲) 선생은 평안북도 박천이 고향으로 1911년 뜻한 바 있어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 지역으로 망명한 이래 1918년 봉천성(지금의 요녕성) 흥경현(興京縣)에 자리 잡고 많은 한인동포와 농업을 일구었다. 이 무렵 흥경현의 한인동포 인구는 무려 6만 5천여명에 달하는 놀라운 발전을 보였다. 이에 따라 이곳의 한인동포들을 기반으로 한 독립운동 조직이 결성되어 크게 활약하기 시작하였다. 이 때 흥경현에서 결성된 독립운동 조직으로는 한인공회(韓人公會), 대한독립의용단(大韓獨立義勇團) 등이 있었다. 선생은 이 해에 흥경현의 민족학교인 흥동학교(興東學校)의 교사로 아동들을 가르치면서 이들 조직에 가담하여 간부로 활동하였다.

 그러던 중 1919년 국내에서 3.1운동이 거족적으로 전개되어 독립운동의 열기가 크게 고조되자 선생은 새로운 결심을 굳혀 한인동포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던 북간도 지역으로 활동무대를 옮기게 되었다. 특히 김좌진 장군이 활약한 북로군정서로 널리 알려진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에 참가하여 독립운동을 지속하였다. 대한군정서는 대종교 계통의 독립운동조직으로 강력한 독립전쟁을 목표로 독립군양성과 훈련사업에 열중하고 있었으며,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밀접하게 연락을 취하며 그를 봉대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선생은 무장독립전쟁 참가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체계적인 군사교육과 군사훈련을 받을 결심을 하게 되었다.

   
  현익철 선생

 대한군정서의 주선으로 선생은 적지 않은 나이에 서간도 통화현 합니하(哈泥河)에 세워진 신흥무관학교 분교에 입학하여 군사학을 이수하게 되었다. 당시 신흥무관학교는 3.1운동 이후 찾아오는 청년들로 대성황을 이루고 있었으며, 통화현 합니하와 칠도구(七道溝) 쾌대무자(快大茂子) 등지에 분교를 세워 군사인재를 양성하였던 것이다. 신흥무관학교는 1919년 봄에 본교를 유하현(柳河縣) 고산자(孤山子)로 옮겨가고, 종전에 있던 합니하 학교는 김창환(金昌煥)을 교장으로 하는 분교로 운영케 하였다.

 이후 선생은 만주지역의 한인동포 자치기관인 한족회(韓族會)에 참가하는 한편, 서간도 일대 독립운동의 중추적 영도기관인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도 가입하여 독립운동에 종사하게 되었다. 그러나 서로군정서는 자체의 한계와 중국 군벌정권 및 일제 영사관의 압력으로 본격적인 독립전쟁을 전개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선생은 비교적 젊고 혈기방장한 천장년들을 새롭게 규합하여 1920년 2월 중국 봉천성 관전현(寬甸縣) 향로구(香爐溝)에서 항일무장투쟁 조직인 광한단(光韓團)을 조직하게 되었다. 이 조직에는 같은 집안 친척인 현정경(본명 玄炳根)을 비롯해서 이호원(李浩源), 김석선(金錫善), 홍원경(洪元京) 등 40여 명이 참가하였다.

 

   
 

특히 1921년 4월 선생은 관전현 묘자구(苗子溝)에 근거지를 두고 김준경(金俊京) 등 9명의 단원을 국내로 파견하여 평안북도 정주(定州) 일대에서 군자금 모집 작전을 전개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곧 일경에 체포되고 말았다. 때문에 선생은 일제의 수배를 받고 여러차례 피신하기도 하였으나, 결국 일경에게 체포되어 징역 3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1924년 출옥 후 다시 압록강을 건너 남만주의 독립운동 통합조직인 통의부(統義府)에 가담하였다. 이 때 선생은 외무 위원장의 중책을 맡아 주로 중국 관헌들과의 교섭을 담당하면서 상해 임시정부와도 밀접히 연계하며 활약하였다.

 1925년 1월 남만주 지방의 독립운동 단체가 김이대(金履大),이청천(李靑天),오동진(吳東振),김동삼(金東三) 등에 의하여 정의부(正義府)로 통합되자 선생은 다시 여기에 가담하여 대일항전과 한인 동포들의 생활안정을 위해 노력하였다. 특히 정의부 중앙집행위원 겸 재무부장을 맡아 크게 활약하였다. 정의부의 재정운영과 한인동포들의 생활안정을 도모하였던 것이다. 이를테면 선생은 정의부 관할지역의 아동과 청소년 교육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백

두산 기슭의 무송(撫松),장백(長白),안도현(安圖縣) 등 깊은 산골 오지 지역에서 군소 독립운동 단체를 통합하여 흥업단(興業團)을 조직하고 독립운동에 매진하고 있던 차천리(본명 차도선 -의병장 출신)에 대표를 파견하여 정의부에 합류할 것을 설득하였다. 그 결과 정의부의 중심지인 길림(吉林)에서 수백킬로나 떨어진 백두산 일대의 한인 동포들을 정의부의 구성원으로 영입하였다. 이로써 무송,안도,장백현 일대를 근거지로 하고 있던 흥업단 세력을 정의부의 조직체계로 포섭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1929년 5월 국민부 중앙집행위원장을 맡고, 민족유일당조직동맹 대표로 선임되었으며, 이해말에는 조선혁명당 중앙집행위원을 겸하게 되었다. 1930년에는 조선혁명당 중앙집행위원장을 겸하여 더욱 책임이 커졌다.

   
 

 중일전쟁 이후 국제정세가 유리하게 호전됨에 따라 선생은 1938년 봄에 이념이 비슷한 조선혁명당과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의 통합을 주위에 호소하였다. 이에 따라 3당의 통일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1938년 5월 7일에 조선혁명당 사무실이 있는 남목청(楠木廳)에 김구(金九),이청천(李靑天),유동열(柳東說) 등과 함께 모여 연회를 개최하였다.

 그런데 이 때 조선혁명당원으로 남경에서부터 상해로 특무공작을 가고 싶다고 해서 김구가 자금을 지원하기도 했던 이운환(李雲煥)이 갑자기 돌입하여 권총을 난사하였다. 첫발에 김구가 맞고, 두 번째 총탄에 선생이 맞고 말았다. 이밖에 유동열이 중상을 입고, 이청천은 경상을 입었다. 선생은 총탄에 맞아 중상을 입어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도착하자마자 절명하고 말았다.

 이운환이 임정 요인들에게 총격을 가한 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의견만 고집하며 운동전선의 통합에 별 진전이 없고 김구 등 임시정부 주도층에서 조선혁명당 청년들에게 주는 생활비가 적어 평소에 쌓였던 불만이 폭발한 것이었다. 일설에는 이운환이 친일파로 변절한 박창세(朴昌世)의 사주를 받아 사건을 일으켰다고 보기도 한다. 이 사건으로 이운환은 체포되어 중국 감옥에 투옥되었으나, 중일전쟁의 와중에 탈옥하여 행방불명되었다.

 수차례 감옥을 드나들며 20여 년간 불굴의 투지로 독립운동에 매진했던 선생은 이렇게 허망하게 해방된 조국을 보지도 못하고, 1938년 5월 7일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는 사람됨이 강개(慷慨)하고 아는 것이 많았다. 과거 만주에서 정의부 수뇌로 왜구와 공산당, 장작림(張作霖)의 부하 친일분자들에게 3면 포위된 가운데서도 독립운동을 위하여 격렬히 투쟁하였다. ” 이는 임시정부의 영수 김구 주석은 [백범일지]에서 선생을 평가한 말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는 국장(國葬)으로 선생을 장사(長沙)의 악록산(岳麓山)에 안장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62년 독립장을 추서하였으며 국가보훈처에서는 2006년 9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공적개요>

ㅇ 1925 정의부 중앙집행위원 겸 재무부장
ㅇ 1929 국민부 중앙집행위원장
ㅇ 1931 조선혁명군 총사령
ㅇ 1937 임시정부 군사위원회 군사위원

 

<자료: 국가보훈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