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3. 경기민요와는 다른 서도민요의 매력 우리나라 민요는 크게 남도민요, 경기민요, 서도민요, 동부민요로 나뉩니다. 이중 서도민요는 평안도와 황해도에서 불리는 민요들을 가리키는데 널리 알려진 통속 민요지요. 서도민요엔 수심가, 엮음수심가, 긴아리, 잦은아리, 산염불, 잦은염불, 긴난봉가, 자진난봉가, 사설난봉가, 병신난봉가 따위가 있습니다. 서도민요는 얼핏 맑고 청아한 고음을 주로 써서 경기민요와 비슷하게 느낍니다. 하지만, 경기민요와는 다르게 입 안에서 목을 막았다 떼었다 하면서 떠는 창법을 쓴다고 합니다. 서도민요는 매우 구성진 맛이 있고, 장단도 일정한 틀을 엄격하게 지키기보다는 매우 융통성이 있습니다. 서도민요의 시김새는 평안도 사투리가 바탕이 되어 우러나오는 것으로 매우 구수하면서도 깊은맛이 있습니다. 요즘 서도민요 전수조교 유지숙 선생은 서도지방에 내려오는 이야기들을 토대로 “항두계” 등의 토종 뮤지컬을 꾸며 공연하기도 합니다.
1542. 애틋한 사랑의 넋이 깃든 신비스러운 장사송 우리 겨레는 소나무 집에서 태어나 소나무와 함께 살다가 소나무관에 들어가 죽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나라 곳곳에는 서울 송파(松坡)처럼 소나무와 관련된 땅이름이 무려 681곳이나 되며, 아주 희귀한 그리고 신령스런 소나무들이 많습니다. 그 가운데 전북 고창군 선운사 도솔암 근처에 있는 “장사송”이란 소나무도 꼭 한번 누구나 가보고 싶을 신비스러운 나무입니다. 6백 년쯤 묵었다는 이 장사송은 높이 23미터, 가슴높이 둘레는 3미터에 달하며, 밑동에서 3미터쯤 되는 부위에서 세 갈래로 갈라지고, 다시 그 위에서 여러 갈래로 갈라져 아름다운 자태를 뽐냅니다. 특히 이 소나무는 지키던 수자리를 떠난 병사 남편을 애타게 기다리다 죽은 부인의 넋이 환생했다는 전설이 들어 있습니다. 또 장사송 근처에는 소나무로 환생한 장사녀의 넋을 위로하려는 듯 꽃무릇이 붉게 핀다고 합니다.
1541. 조선시대 외교문서를 썼던 한석봉의 사자관체 조선시대에는 문서에 글씨를 정성 드려 쓰는 “사자관(寫字官)”이란 직책이 있었습니다. 사자관은 외교문서를 관장한 승문원(承文院)에 40명, 임금의 어제(御製)·어필(御筆) 등을 모시고 이를 펴낸 규장각(奎章閣)에 8명이 있었고, 규장각의 자매기관으로 유교 경전의 인쇄 등을 관장한 교서관(校書館)에도 있었던 기술직 관리였습니다. 특히 승문원은 나라의 외교문서를 쓰는 중요한 관청이었는데 외교문서는 정3품 이상의 당상관이 아니더라도 글씨에 특별한 재능이 있는 사람이 쓰도록 했는데 그 사람이 바로 사자관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자관은 지방 고을을 맡아 다스리는 수령을 거치지 않았더라도 4품 이상의 자리에 오를 수 있는 특권을 주었습니다. 그 사자관의 시작은 추사 김정희와 쌍벽을 이루는 조선시대 명필 석봉 한호(韓濩, 1543~1605)가 그 시작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사자관들의 서체를 별도로 “사자관체(寫字官體)”라고 부릅니다.
1540. 이조·이왕·민비, 일제가 붙인 이름들 어떤 이들은 이조, 민비 등의 말을 쉽게 쓰곤 합니다. 하지만, 그 말들에는 일제가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려는 흉계가 들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br>일제는 한일합병 이후 순종을 이왕(李王), 고종을 이태왕(李太王)이라고 불렀고, 대한제국의 왕실을 이왕가(李王家), 이왕실(李王室)로, 조선을 이씨조선(李氏朝鮮) 곧 이조(李朝)로 불렀습니다. 그것은 자기네 천황을 우두머리로 조선 왕은 일개 제후로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일제 하수인들이 시해한 조선의 국모 명성황후를 민씨 왕비라 하여 민비(閔妃)로 낮춰 불렀습니다. 얼핏 생각하면 그렇게 부르는 것이 틀린 말은 아니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일제가 우리를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흉계였다면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지요. 우리 스스로 그런 말을 없애지 않는다면 그들이 임나일본부설을 계속 주장하고, 훈민정음이 자신들의 신대문자를 모방한 것이라는 망언을 그만두지 않을 것입니다.
1539. 송남잡지 이야기, 손숙오의 음덕과 성공 조선 후기 학자 조재삼의 책 ≪송남잡지(松南雜識)≫ 12권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습니다. “≪이아[爾雅, 중국 주(周)나라의 주공(周公)이 지은 것으로 전하는 자서(字書)]≫에서 ‘중주(中州)에 기사(岐蛇)가 있다.’라고 하였는데 주석에서 ‘기사는 머리가 둘인 뱀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바로 손숙오가 숨어서 덕행을 하려고 죽인 뱀으로, 머리가 두 개에 꼬리가 하나다.” 손숙오(孫叔敖)는 춘추시대 초(楚)나라 사람입니다. 손숙오가 어릴 적에 이를 한번 본 사람은 틀림없이 죽는다는 머리가 두 개인 양두사(兩頭蛇) 곧 기사를 보고, 이미 자기는 양두사를 보아 어쩔 수 없이 죽겠지만 또 다른 사람이 보지 않게 하자는 생각으로 양두사를 땅에 파묻었다고 합니다. 그는 죽지 않은 것은 물론 어른이 된 뒤 유명한 어진 관리가 되었습니다. 참고 : ≪교감국역 송남잡지(松南雜識, 강민구 옮김, 소명출판, 2008)≫ 12권
1538. 꽃잠·꽃차일·꽃그늘 등 “꽃”으로 시작하는 낱말들 요즘 부드럽고 화창한 명지바람이 불어 완연한 봄이 되었습니다. 이때 세상은 진달래, 개나리, 산수유, 목련, 벚꽃으로 뒤덮이고, 그 꽃들이 꽃보라·꽃눈깨비가 되어 우리는 꽃멀미를 합니다. 꽃은 정말 아름답습니다. 이 “꽃”이란 말로 시작하는 아름다운 말들을 살펴봅니다. 신랑과 신부가 첫날밤에 자는 잠은 “꽃잠”입니다. 또 영화로운 처지나 환경을 “꽃그늘”이라 하고, 여자의 한창 젊은 나이를 “꽃나이”라고 하며, 곰국·설렁탕 등의 진한 국물은 “꽃물”입니다. “꽃”으로 시작하는 말에는 그밖에 “꽃차일”도 있는데 꽃이 많이 피어 차일(볓가리개)처럼 하늘을 가린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꽃처럼 아름다운 모습은 “꽃모습”이라고 하며, 여러 가지 빛깔을 띤 아름다운 구름은 “꽃구름”, 꽃처럼 아름다운 불꽃은 “꽃불”, 비처럼 떨어지는 꽃잎은 “꽃비”라고 합니다.
1537. 중국은 우리를 동이, 청구, 해동 등으로 불렀다 중국은 자신들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중화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네는 가운데 나라라는 뜻으로 중국(中國)이라 했고, 중국 밖의 다른 나라들은 모두 오랑캐라고 했습니다. 동쪽 우리나라는 오랑캐 이(夷) 자를 붙여 동이(東夷)라고 했고, 남쪽은 오랑캐 만(蠻) 자를 써서 남만(南蠻), 북쪽은 오랑캐 적(狄)자를 써서 북적(北狄), 서쪽은 오랑캐 서(戎) 자를 써서 서융(西戎)이라고 했지요. 그런데 동이의 “이(夷)” 자를 파자(破字) 곧 한자를 부수 단위로 작게 나누어 뜻을 새겨 보면 큰 대(大)와 활 궁(弓) 자로 “大弓”이 되어 “동이”는 바로 동쪽의 큰 활을 쏘는 민족이라는 뜻으로 나타납니다. 우리 겨레는 예부터 고구려의 시조 주몽처럼 화살을 잘 쏘았기에 이를 중국 사람들이 두려워 그런 이름을 붙였는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중국은 동이 말고도 청구(靑丘), 동국(東國), 해동(海東), 대동(大東) 등으로도 불렀습니다.
1536. 칠정산외편, 한문으로 된 이슬람 천문역법 중 가장 훌륭한 책 사막이 많아 하늘을 등대로 삼고 별을 이정표로 삼아 길을 찾았던 아랍 사람들은 천문학을 크게 발달시켰습니다. 그 아랍 사람들이 만든 달력이 “회회력”입니다. 그런데 아랍과 위도와 경도가 달랐던 중국은 이 회회력을 중국에 맞추려고 노력했지요. 하지만, 조선의 이순지와 김담은 먼저 회회력을 조선에 맞게 고쳐 을 펴냈습니다. 명나라는 그로부터 35년 뒤에야 완성하여 를 발표했답니다. “한문으로 엮어진 이슬람 천문 역법 중에서는 이 가장 훌륭한 책으로 높이 평가한다.” 이는 을 두고 일본의 과학사학자인 야부우치 기요시가 한 말입니다. “칠정산”이란 “칠정” 곧 해와 달 그리고 수성·금성·화성·목성·토성의 움직임을 계산한 방법이라는 뜻입니다. 이 나오기 2년 전 원나라의 수시력(授時曆)을 조선에 맞게 수정 개편한 도 있습니다.
1535. 예기를 뽑을 때 화장을 못 하게 하라 조선왕조실록 중 연산군일기 11년(1505) 1월 11일 자를 보면 연산군이 그날 뽑힌 장악원 소속 예기에 대해 지시를 내리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오늘 뽑힌 예기들은 다 기개가 없어서 취할 만하지 못하다. 자색은 분칠로 바뀐 것이니, 어찌 분칠한 것을 참 자색이라 할 수 있으랴. 옛사람의 시에, ‘분·연지로 낯빛을 더럽힐까 봐 화장을 지우고서 임금을 뵈네.’라고 하였으니, 앞으로는 간택 때에 분칠하지 말게 하여 그 진위를 가리라.” 또 이덕무의 책 ≪사소절(士小節)≫에 “부인이 단정하고 정결함을 귀히 여긴다 함은 얼굴을 화장하여 남편을 기쁘게 함을 이름이 아니다. 화장하고 예쁘게 옷을 입은 사람은 요사스러운 여자요. 머리를 어지럽게 하고 얼굴에 때가 있는 사람은 게으른 여자다.” 조선시대 정숙한 여인들은 화장한 얼굴이 아닌 민얼굴이어야 했고, 화장하는 것은 기생이나 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280. 청명(淸明)과 한식(寒食) 이야기 오늘은 다섯 번째 절기인 청명이며, 한식입니다. 옛 사람은 청명 때의 초후는 오동나무 꽃이 피기 시작하고, 중후는 들쥐 대신 종달새가 나타나며, 말후는 무지개가 처음으로 보인다고 하였습니다. ‘동국세시기’에 의하면 청명날 버드나무와 느릅나무를 비벼 일으킨 새 불 곧 사화(賜火)을 임금이 중앙의 벼슬아치들과 고을의 수령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수령들은 다시 이 불을 백성에게 나누어주는데 묵은 불을 끄고, 새 불을 받기 전까지 밥을 지을 수 없어 찬밥을 먹는다는 뜻으로 한식(寒食)이라고 했으며, 온 백성이 한 불을 쓰는 공동체 의식이었습니다. 이 불은 꺼지기 쉬워 뱀이나 닭껍질로 만들어 습기나 바람에 강한 불씨통(장화통:藏火筒)에 담아 운반했습니다. 청명에는 청명주(춘주[春酒])를 담아 마셨으며, 또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 시집 장가 갈 때 농짝을 만들어줄 재목감으로 `내 나무'를 심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