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2. 훈민정음 등 국보급 유물이 많이 소장된 간송미술관 우리나라 최고의 보물, 국보 제70호 훈민정음은 한국 전통미술품을 많이 소장하고 있는 간송미술관에 있습니다. 간송미술관은 간송 전형필 선생이 장차 우리 미술사 연구의 터전을 마련하려는 큰 뜻을 품고 1938년 서울 성북동에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박물관 보화각을 세운 것이 그 처음이지요. 보화각을 세운 뒤 선생은 온 재산을 바쳐 우리 미술사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인 추사 김정희와 겸재 정선의 작품을 집중적으로 수집하였습니다. 또 심사정·김홍도·장승업 등의 그림은 물론, 서예작품 그리고 고려자기·조선자기·불상·불구·기와 등에 이르는 문화재들을 폭넓게 사들여 훗날 귀중한 문화유산을 연구하는 터전을 마련한 공로가 큽니다. 선생이 돌아가시자 1966년 그의 자녀와 후학들이 한국민족미술연구소를 설립하고 보화각을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으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이로써 대부분 박물관이 전시를 주된 사업으로 하는 데 비해 간송미술관은 미술사 연구를 체계적으로 하는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1841. 맨 처음 커피 맛을 본 한국인은 고종황제 요즘 커피는 전통차를 밀어내고 가장 인기있는 음료가 되었습니다. 그 커피가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온 것은 언제이고, 누가 처음 마셨을까요? 우리나라에 커피가 처음 들어온 것은 대략 1890년 전후로 알려졌으며, 이는 예멘의 양치기가 커피를 발견한 지 1,000여 년 뒤이고, 네델란드 사람에 의해 일본에 커피가 전해진지 180년이 지난 뒤의 일이라고 하지요. 그리고 전하는 얘기로는 1895년 명성황후시해사건으로 고종임금이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해 있을 때 러시아 공사 웨베르가 고종과 담소하면서 커피를 권했다고 합니다. 이후 고종은 환궁 이후에도 커피 맛을 잊지 못해서 정헌관이라는 서양식 집을 짓고 그곳에서 커피를 마시곤 했습니다. 그런데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피해 있을 동안 세도를 부렸던 김홍륙이 하루아침에 날개가 부러지자 앙심을 품고 고종과 뒷날 순종이 되는 세자를 독살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덕수궁 주방에서 요리사 곧 숙수로 있는 사람을 매수하여 커피에 독을 타도록 했습니다. 다행히 고종은 독이 들어 맛이 이상한 커피를 뱉어 무사했지만 순종은 한 모금 마신 탓에 이후 허약체질이 되었고 자식을 낳지 못했다고
1840. 을사늑약을 끝까지 반대한 참정대신 한규설 집 "을사늑약"은 1905년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탈하기 위해 강제로 맺은 조약으로, 외교권 박탈과 통감부 설치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한 조약입니다. 이 조약으로 대한제국은 명목상으로는 일본의 보호국이나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지요. 당시 한성판윤ㆍ참정대신(參政大臣)을 지냈던 한규설은 이 을사늑약을 끝까지 반대해 파면되었습니다. 그 뒤 일제가 준 귀족의 작위를 거부한 채 집에 묻혀 살았습니다. 그 한규설이 살았던 집은 장교동에 있었는데 한규설이 살았던 집터는 현재 중구문화원과 을지로2가 치안센터(옛 파출소)가 있습니다. 그 한규설 집은 도시개발에 따라 철거 위험에 있던 것을 정릉동 국민대학교 옆으로 옮겨, 1980년 12월 20일 완공하였지요. 장교동에 있을 당시에는 큰길에서 서북방으로 들어서면 동남향의 솟을대문을 마주하게 되고, 이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행랑 마당에 이르게 되어 있었습니다. 행랑 마당의 서쪽에는 사랑채, 북쪽에는 안채와 사당, 그리고 별채가 있었지요. 현재 이 잘 보존된 조선 후기 한옥은 국민대학교에서 명원민속관으로 쓰고 있습니다
1839. 승병을 이끌고 온 서산대사ㆍ사명대사가 마무른 절 경국사 서을 성북구 정릉동 정릉천 주변 삼각산(三角山) 동쪽 기슭에는 고려 충숙왕 12년(1325) 자정(慈淨)율사가 창건하여 청봉(靑峰)아래에 자리 잡았다는 뜻으로 청암사(靑巖寺)라 이름붙인 절이 있었습니다. 청암사는 명종 5년(1549) 문정왕후가 국가에 경사가 끊이지 않도록 기원하는 뜻에서 "경국사(慶國寺)"라고 이름을 바꾸었지요. 또 경국사는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서산대사(西山大師)와 사명대사(四溟大師)가 이곳에 구국승병을 이끌고 와 머물면서 총지휘를 한 유서깊은 절이지요. 1864년(고종 1) 고종의 등위재(登位齋)를 갖고, 1868년에는 기울어지는 나라의 운명을 염려하여 칠성각과 산신각을 짓고 호국 대법회를 열었습니다. 특히 주변 경관이 좋고 약수가 있어 보러 오는 사람이 끊이지 않으며, 창건 이래 한국불교 계율의 맥을 이어온 대표적 절이라고 합니다. 경국사 극락보전에는 보물 제748호인 목각탱화 및 신중탱화·팔성탱화 등이 있지요. 풍남(楓南)이 쓴 약 600자의 《천태성전 상량문》도 색다릅니다. 경국사에는 ‘경국사 목 관음보살좌상’을 비롯해 수국사 ‘아미타후불화’ 등 모두
1837. 한국엔 간송미술관, 일본엔 정조문의 고려미술관 우리 문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일제강점기에 전 재산을 쏟아 부어 나라 밖으로 새 나가는 문화재 수집에 평생을 바친 간송 전형필 선생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는 1938년 서울 성북동에 한국 최초의 사설박물관인 보화각을 설립한 뒤 평생 문화재 수집에 혼신을 다 쏟았으며 이 중에는 국보 제70호인 《훈민정음》을 비롯하여 10여점이 국보로 지정 되었고 1000여 점의 귀중한 유물이 있습니다. 1966년 수집품을 바탕으로 한국민족미술연구소 부설 미술관으로 발족한 이래 이곳은 한국의 미술사(美術史) 연구의 산실(産室)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요. 그런데 이에 버금가는 분이 일본 교토에 있습니다. 바로 정조문 선생이 그분인데 선생은 1949년 골동품상이 밀집해 있는 교토 산조(三條) 남쪽 거리를 걸어가다가 어느 가게 진열장에 놓인 둥그런 조선 백자 달항아리를 보고는 푹 빠져서 당시 돈으로도 엄청난 금액이었던 이 달항아리를 사려고 1년 동안 돈을 모았다고 합니다. 선생이 만난 달항아리는 그냥 항아리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뿌리, 곧 조선의 위대한 정신의 소산임을 깨닫고 이후 평생 모은 재산
1836. 조선총독부와 마주하기 싫어 북향으로 지은 집, 심우장 만해 한용운 그는 3ㆍ1만세운동 선언자 33명 중 변절하지 않은 지사입니다. 만해에 관한 일화는 참으로 많은데 그를 회유하려고 조선총독부가 성북동 일대 20만 평의 나라 숲을 넘겨주겠다는 것을 한마디로 거절하고, 총독부의 지시를 받은 청년이 돈 보따리를 들고 오자 뺨을 때려 쫓아 보냈다고 하지요. 또 최린 등과 함께 3·1운동을 주도했던 그는 감옥에서 일부 민족대표들이 사형당할 것을 두려워하자 “목숨이 그토록 아까우냐?”라며 똥통을 뒤엎기도 했으며, 그토록 가까웠던 최린, 최남선, 이광수 등에 대해서도 ‘친일파’라며 상종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벽초 홍명희는 “만해 한 사람 아는 것이 다른 사람 만 명을 아는 것보다 낫다.”라고 했으며, 만공 선사는 “이 나라에 사람이 하나 반밖에 없는데 그 하나가 만해”라고 했지요. 그 만해가 1933년부터 1944년까지 살았던 집 “심우장(尋牛莊)”이 서울시 성북구 성북동에 있습니다. 심우장은 서울기념물 제7호로 지정되었는데 ‘심우장“이란 이름은 선종(禪宗)의 ‘깨달음’ 경지에 이르는 과정을 잃어버린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한 열 가지 수행 단계 중 하나인 심우(
1835. 조선에서 정겨운 주막집이 사라진 까닭 "1916년 무렵만 해도 조선에서는 거의 주막에서 술을 만들어 팔았는데 그 당시 주막은 12만 개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던 것이 일제의 간섭으로 차츰 줄어서 1919년에는 7만여 개, 1925년에는 3만여 개, 1930년에는 5천 개 이하로 줄어들었습니다. 그 결과 술 수요에 부응하지 못하게 되자 일제는 군 단위에 10~20개의 이른바 주류배급소를 만들었는데 조선 전체로는 5~6천여 개에 이르렀지요. 위는 1932년 조선총독부가 펴낸 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내용에서 보면 우리 겨레가 오랫동안 술과 음식을 함께 팔던 주막 12만 개가 15년 만에 5천 개로 줄어들어 버린 것입니다. 주막은 오늘날 고속도로 휴게소처럼, 일정 거리마다 있었던 쉼터죠. 한나절 걷는 시간, 아침에 출발하여 점심 무렵에 도달하는 거리에는 어김없이 주막이 있었습니다. 온 나라 산밑과 강나루와 장터와 마을에 거미줄처럼 퍼져있던 주막이 일본강점기를 지나면서 파괴되어 버린 것입니다. 20세기 초반까지 우리 술 문화는 양조장이 아닌 주막과 가정집이 이어왔습니다. 특히 집에서 제사지낼 때와 명절 때 그리고 농사지을 때 술을 빚어 마셔온 것입니다. 그
1834. 내일은 세종임금이 태어나신 날 오늘(5월 15일)은 세종임금이 태어나신 지 610돌이 되는 날입니다. 세종 임금은 태조 6년(1397년) 5월 15일 서울 북부 준수방(俊秀坊)에서 조선 3대 임금인 태종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준수방은 현재 종로구 통인동 137번지로 경복궁 서쪽문인 영추문길 맞은편 의통방 뒤를 흐르는 개천 건너편인데, 청운동을 흘러내리는 한줄기 맑은 물과 옥인동으로 내려오는 인왕산 골짜기의 깨끗한 물줄기가 합치는 곳입니다. 이날은 모든 학교에서 스승의 날로 지냅니다. 그것은 1965년 청소년 적십자 중앙학생협의회(RCY)가 세종대왕 탄신인 5월 15일을 '스승의 날'로 정하기로 결의한 뒤부터입니다. 어쩌면 이 단체가 세종임금을 영원한 스승으로 생각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세종임금은 절대권력을 가진 임금의 한 분이었지만 백성을 끔찍이 사랑했던 성군이었지요. 자 이제 오늘과 낼 중 적어도 하루만이라도 세종대왕과 우리말을 사랑하는 날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니 내일만큼은 일체 한국어로 말을 하지 않고, 한국어로 된 글을 읽지도 말고, 한국어로 된 말을 듣지도 말고, 한국어로 사고도 하지 말고, 한국어로 꿈도 꾸지 않은 하루를 살아보면
1833. 누에신에게 제사지내던 선잠단지를 아시나요? 조선시대는 농업의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임금은 해마다 경칩(驚蟄) 뒤의 첫 번째 해일(亥日)에 제사를 지낸 뒤 왕이 친히 쟁기를 잡고 밭을 갈아 보임으로써 농사의 소중함을 만백성에게 알리는 의식을 행하였지요. 그런가 하면 왕비는 친히 궁궐 안팎 여성들을 거느리고 양잠의 본을 보여 비단 생산에 힘썼던 궁중의례인 “친잠례(親蠶禮)”를 했습니다. 그런데 세종은 양잠을 크게 장려하여 각 지방에 적당한 땅을 골라 뽕나무를 심도록 한 것은 물론, 한 곳 이상의 잠실(蠶室, 누에 치는 방)을 지어 누에를 키우게 하였지요. 1506년(중종 1)에는 지방의 잠실을 서울 근교로 모이게 했습니다. 현재의 송파구 잠실동 일대는 그런 잠실이 있던 지역입니다. 대한제국 말기까지 이 일대에는 나이가 300∼400살이나 되는 뽕나무가 있었지요. 또 1471년(성종 2)에는 뽕나무가 잘 크고 살찐 고치로 좋은 실을 얻게 하여 달라는 기원을 드리려고 동소문(東小門) 밖에 선잠단(先蠶壇)을 지었습니다. 단에는 대를 모으고 중국 황제(黃帝)의 왕비인 잠신(蠶神) 서릉씨(西陵氏)의 신위(神位)를 모셨지요. 그리고 단의 앞쪽 뜰에 상징적인 뽕나
1832. 남북통일 염원으로 소신공양한 스님 서울 성북구 안암동 고려대 근처에는 보타사라는 작은 절이 있습니다. 이 절 대웅전 뒤에는 커다란 바위 면을 'ㄱ'자 형태로 깊게 파고 새긴 보살상이 있습니다. 이 마애불 좌우에 구멍의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마애불을 중심으로 별도의 목조 전각(殿閣)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지요. 또 이 마애불은 회분이 덧칠해져 있었던 것을 전문가의 의견을 들어 그 회칠을 벗겨 냈습니다. 그런데 이 보타사에는 마애불 말고도 특이한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벽봉 큰스님이 81살 되던 해에 소신공양 하신 것입니다. “소신공양(燒身供養)”이란 부처에게 공양하려고 자신의 몸을 불사르는 것을 말합니다. 《묘법연화경》〈약왕보살 본사품〉에 “약왕보살이 향유를 몸에 바르고 일월정명덕불(日月淨明德佛) 앞에서 보의(寶衣)를 걸친 뒤 신통력의 염원을 가지고 스스로 자기 몸을 불살랐다 한다. 경전은 이를 찬양하여, '이것은 참다운 법으로써 여래를 공양하는 길이다. 나라를 다 바치고 처자로 보시하여도 이것이 제일의 보시이다.'라고 하였다.”라고 전합니다. 우리나라에도 소신공양을 한 고승이 있었다고 하나 이름이나 흔적 등은 전하지 않지요. 그런 흔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