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1. 못을 잘못 박거나 물건을 잘못 들이면 동티납니다 옛 사람들은 가끔 동티가 난다고 했습니다. 특히 보은군의 풍습을 보면 못을 잘못 박거나 물건을 잘못 들이면 동티(동토)가 난다 했습니다. 집안 식구들이 까닭 없이 시름시름 아프기 시작하면 무당에게 찾아가서 동티가 났는지 알아봅니다. 그때 고추를 태워서 매우면 동티가 나지 않은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동티가 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무당이 굿을 해서 동티를 잡아 줍니다. 급하게 동티를 잡기 때문에 금줄을 치거나 떡을 하지 못합니다. 장을 보러 갈 시간도 없어서 집안에 있는 간단한 음식으로 밥, 나물, 포, 탕국 등의 제물을 준비합니다. 이 제물이 준비되면 무당이 굿을 하는데 짧게는 하루 저녁, 길게는 사흘 밤낮으로 합니다. 그러고 나면 환자가 깨끗이 낫는다고 믿습니다. 그런가 하면 이 고장에는 “해물리기” 또는 “뜬귀물리기”라는 풍속도 있습니다. 상가에 다녀온 사람이 시름시름 아프면 “뜬귀 들렸다.”라고 합니다. 이때 된장국을 끓여서 환자의 머리카락을 3번 넣고, 환자에게 침을 3번 뱉게 합니다. 그리고 칼로 방문과 대문을 십자 표시(十)로 긁는데 십자 표시여야만 귀신이 나간다고 생각했습니다.
1730. 절벽에 새긴 마애불을 보셨나요? 절벽이나 큰 바위에 새겨진 불상이 있는데 이를 마애불(磨崖佛)이라고 합니다. 절벽이나 큰 바위에 새겨진 불상이 있는데 이를 마애불(磨崖佛)이라고 합니다. 마애불은 이동할 수 없어 부동산(不動産) 조각이라고 하며 처음부터 만들어진 곳에 천 년이고 만 년이고 붙박이처럼 있는게 특징입니다. 마애불은 한국을 비롯하여 인도 ·중국 ·일본 등에 퍼져 있습니다. 조각하는 방법은 평평한 면에 글자나 그림 따위를 도드라지게 새기는 돋을새김(양각:陽刻,浮彫), 그림이나 글씨 따위를 안으로 들어가게 깊이 새긴 오목새김(음각:陰刻), 그림이나 무늬를 선으로 새기는 선각(線刻) 등이 있지요. 그 기원은 기원전 2세기 무렵 인도에서 시작되었고 4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둔황[敦煌]의 텐포동[千佛洞]을 비롯하여 텐티산[天梯山]·마이지산[麥積山] 등의 마애불이 널리 알려졌습니다. 한국은 7세기 무렵 백제에서 시작된 것으로 짐작되며 1958년에 발견된 충남 서산의 마애불과 태안(泰安)의 마애불은 백제시대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지요. 신라시대에는 국보로 지정된 석굴암, 경북 경주시 단석산의 신선사마애석불군상(斷石山神仙寺磨崖石佛群像), 경북 봉화 북지리
1729. 옛추억이 서린 피맛골이 사라지기 전 .... 조선시대는 양반과 서민이 분명히 구분되던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서민들은 종로에서 높은 벼슬아치를 만나면 가던 길을 멈추고 바닥에 납작 엎드려 그들이 지나가길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러자니 오죽 힘들었을까요? 그래서 그들이 꾀를 낸 것은 종로 양쪽에 나 있는 좁은 골목길로 피해 다니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곧 높은 벼슬아치의 말을 피해 다닌 꼴이 되었고 그 뜻으로 골목길의 이름이 “피맛골”이 되었지요. 피맛골은 ‘서민들의 지름길’로 이용된 까닭에 자연스레 엽전 몇 닢으로 끼니를 해결할 수 있는 국밥집과 선술집, 목로술집 등이 많았습니다. 또 몰락한 양반들이 먹고살려고 국밥을 팔았는데 양반 체면 때문에 얼굴은 돌리고 팔뚝만 뻗어 손님에게 밥그릇을 건넸다고 해 ‘팔뚝거리’라는 별명도 붙었지요. 특히 80년 민주화 항쟁이 절정이었던 무렵에는 거리시위 때 사람들이 최루탄과 백골단을 피해 이곳으로 숨어들었고 막걸리로 분을 삭이던 애환이 서려 있어 ‘피연(避煙)골’이라고도 불렀습니다. 옛추억이 서린 피맛골이 사라지기 전 국밥을 먹으러 가보실래요?
1728. 중국에서 오랫동안 큰 인기를 끌었던 ≪동의보감≫ 허준이 쓴 ≪동의보감≫을 유네스코는 세계기록유산에 올렸습니다. 등재 이유를 보면 "동의보감은 그 내용이 독특하고 귀중하며, 오늘날에도 사용되고 있는 동아시아의 중요한 유산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의학지식은 현대 서양의학이 발견되기 전까지 수많은동아시아인의 건강에 이바지하였다.”라고 밝힙니다. 이러한 세계가 인정한 문화유산을 두고 일부에서는 중국의 의서를 베낀 표절서라고 평가절하하는 목소리도 있으나 이는 자신의 문화를 깎아 내리려는 못된 버릇이지요.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중국에서 펴낸 ≪동의보감≫ 이야기가 나옵니다. 연암은 중국에서 오랫동안 큰 인기를 끌었던 ≪동의보감≫이 몹시 탐나서 꼭 사고 싶었지만 5냥이나 되는 책값 마련이 어려워, 결국 중국어판 서문만 베껴온 것을 두고두고 섭섭해했습니다. 중국어판 서문을 쓴 능어(凌魚)는“구석진 외국책이 중국에서 행세하게 되었으니 담긴 이치가 훌륭하다면 땅이 먼 것이야 무슨 상관이 있을까? ≪동의보감≫은 내경(內景)을 먼저 서술하여 근본을 다지고, 외형(外形)을 서술하여 자세한 풀이를 보탰으며, 이후 잡병의 해설과 탕약(湯藥)과 침과 뜸을
1727. 짚신에 닳아 반들반들해진 길 "토끼비리"를 아시나요? “관갑천은 용연의 동쪽 벼랑을 말하며 토천이라고도 한다. 돌을 파서 만든 잔도(棧道, 험한 벼랑 같은 곳에 낸 길)가 구불구불 6, 7리나 이어진다. 전해오는 얘기에 따르면 고려 태조 왕건이 남쪽 원정 때에 이곳에 이르렀는데 길이 막혔다. 마침 토끼가 벼랑을 타고 달아나면서 길을 열어주어 진군할 수 있었으므로 토천이라 불렀다.” 위는 경북 문경의 옛길 “토끼비리”와 관련되어 신증동국여지승람 문경현 형승조에 기록된 글입니다. 이 토끼비리는 수십 년 동안 인적이 끊어져 지금은 사람이 다니지 않는 길이지요. 하지만, 예전엔 영남 사람들이 한양으로 가는 길에 넘어야 했던 고개인 새재를 오르기 전에 먼저 통과해야 하는 길이었기에 수많은 사람이 오고 갔을 것입니다. 과거를 보러 가던 선비, 보따리장수들, 꿈에도 그리던 친정나들이 길의 새색시, 아들 점지 바라며 절간 문턱이 닳도록 불공드리러 다니던 아낙 등은 무슨 생각을 하며 이 길을 오갔을까요? 수백 년이 지나도록 닳고 닳아 거울처럼 반질반질해진 길은 그들의 마음을 비춰 줄 것만 같습니다. 우리도 이 길을 걸으며 옛사람들의 정취를 느껴보면 어떨까요? 참고
1726. 숭례문 복원에는 어떤 장인이 참여하나? 지난 2008년 2월 우리는 가슴 아픈 일을 당했습니다. 국보 제1호 숭례문이 불타버린 것입니다. 이제 그 숭례문이 본격적인 복원에 들어가는데 문화재청은 숭례문 복구에 참여할 장인을 뽑았습니다. 대목분야에 중요무형문화재 제74호 대목장 기능보유자 신응수, 단청분야에 제48호 단청장 기능보유자 홍창원, 석공분야 석조각에 제120호 석장 기능보유자 이재순과 석구조물에 제120호 석장 기능보유자 이의상, 번와분야에 제121호 번와장 기능보유자 이근복, 제와분야에 제91호 제와장 기능보유자 한형준이 바로 그분들입니다. 여기서 대목장(大木匠) 은 건축물을 짓는 장인인데 여기에 견주어 소목장(小木匠)은 가구를 꾸미는 사람입니다. 또 단청장(丹靑匠)은 건축물 등을 무늬와 그림으로 아름답게 칠을 하는 전통공예기술을 가진 사람이지요. 그런가 하면 석장(石匠)은 집이나 불상, 탑, 다리 등을 돌로 만드는 장인입니다. 그리고 기와에 관련된 장인 중 번와장은 지붕의 기와를 잇는 장인이며, 제와장(製瓦匠)은 재래식 전통 기와를 만드는 사람을 말합니다. 비록 숭례문은 불타 없어졌지만 대한민국 최고 장인의 손에 의해 다시 태어날 숭례문
1725. 임금의 항문을 들여다 보느라 대머리 된 의원 조선 후기의 서화가 조희룡이 1844년에 쓴 ≪호산외기(壺山外記)≫는 42명의 벼슬을 하지 않은 일반 백성의 전기입니다. 여기엔 문학가 12명. 화가 6명, 음악가 1명, 학자 1명, 의원 3명, 신선 3명 등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을 소개합니다. 그 가운데 눈에 띄는 사람은 조선 후기의 이동이란 의원입니다. 그는 침과 뜸[灸]에서 제1인자로 기침소리만 듣고 그 병이 내옹(內癰) 곧 몸 안의 종기라 진단하고 가슴에 침을 놓아 고름을 뽑아냄으로써 치료하였다고 하지요. 특이한 것은 그가 원래 공부를 하지 않은 까막눈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정조의 병을 치료하기도 했지요. 특히 치질을 치료했는데 엎드려 항문을 들여다보느라 대머리가 되어 상투를 틀 수가 없었습니다. 아마도 그는 임금의 항문을 처음으로 들여다본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그는 치질 치료에 성공하여 정조로부터 탕건을 내려받고 돈 10만 전을 받았습니다. 그의 처방약도 괴상하여 손톱·머리털·오줌·때 등이 쓰였다고 하는데 “제 한몸에 본디 좋은 약재를 갖추고 있거늘 무엇 때문에 다른 물건을 쓸 것인가?”라며 백성이 싼값에 치료할 수 있도록 했다고 합니다.
1724. 여성들이 썼던 방한모 조바위 조바위란 여성이 쓰는 방한모의 하나로, 조선 후기에 아얌이 사라지면서 널리 사용된 여성용 모자입니다. 조바위는 양반에서 평민까지 두루 썼던 것으로 예복을 갖추지 못하였을 때에는 조바위를 쓰고 절을 하기도 하여 의례적인 용도로 사용되었습니다. 겉은 검정 비단, 안은 남색 비단이나 무명이 대부분이며, 겹으로 만들었는데 정수리 부분은 열려 있고, 앞이마와 귀 ·머리를 모두 덮지요. 뺨에 닿는 부분은 동그랗게 되어 있어 귀가 완전히 덮이고 길이는 뒤통수를 가릴 정도입니다. 옥 ·마노 ·비취 등으로 앞과 뒤에 장식하고 오색술을 달았으며, 꼭대기의 앞뒤에 끈목이나 산호줄을 연결했습니다. 부귀(富貴)·다남(多男)·수복(壽福)·강녕(康寧)의 글자와 꽃무늬 금박을 가장자리에 올려 만든 것도 있지요. 요즈음 돌날 여자 아이들이 금박을 박은 조바위를 쓰기도 합니다. 조바위 말고도 여성들이 썼던 방한모에는 남바위와 아얌도 있습니다.
1723. 조선 사람보다 일본인이 더 많았던 군산을 아십니까? 제 고향은 전북 군산입니다. 군산은 원래 백제시대 “마서랑현”으로 시작한 유서깊은 곳입니다. 하지만, 군산이 가장 크게 발전한 것은 부끄럽게도 일제강점기였습니다. 쌀이 만들어낸 군산의 도시 이미지는 1925년에 일제에 의해 출간된 내용을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세관 옥상에도, 부두에도, 길에도 눈길 가는 곳마다 곳곳에 수백 가마씩 쌓여 20만 쌀가마니가 정렬하였으니 … 오호 장하다! 군산의 쌀이여!” 조선총독부의 “산미증산계획”에 의해 1934년에는 당해 생산된 1,672만 석 가운데 60%에 해당하는 891만 석이 일본으로 보내졌습니다. 그중 전라도 지역에서 생산된 300만 석 이상이 군산을 통해 일본으로 송출되어 일본인의 배를 불렸지요. 가증스러운 것은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기 전인 1907년에 이미 군산에는 일본인이 2,956명으로 한국인 2,903명보다 53명이나 더 많이 살았다고 합니다.
1722. 기생의 운명적 기다림을 노래한 “바람은” 바람은 지동치듯 불고 구진비는 붓듯이 온다 / 눈정에 거룬님을 오늘밤에 서로 만나자 허고 / 판첩처서 맹서 받았더니 / 이 풍우 중에 제어이 오리 / 진실로 오기 곧오랑이면 연분인가 하노라“ 이는 여창가곡 우조 우락 "바람은"의 가사입니다. 전통성악의 하나인 가곡, 그중 여자가 부르는 여창가곡에는 제갈량은, 만경창파지수에, 물 아래, 유자는, 앞 논에, 군불견, 바람은 등이 있지만 그 가운데 가장 많이 불리는 노래는 “바람은”이지요. 이 노래의 주인공은 아마도 기생인듯한데 임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심정이 잘 드러납니다. 주인공은 “아무리 맹세하고 약속했지만 이 폭풍우 중에 과연 올까?”라고 의심스러워합니다. 그래도 한 자락 바람은 만일 온다면 우리는 진정 인연일 것이라는 가냘픈 기다림입니다. 이 노래를 한 기생은 과연 그날 밤 임과 꿈같은 만남을 이루었을까요? 청아한 아름다움, 전통가곡을 한번 들어보시며 좋을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