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1. 밥에서 돌이 나오는 것은 임이 안 계신 탓 “배고파 지어 놓은 밥에 뉘도 많고 돌도 많다 / 뉘 많고 돌 많기는 임이 안 계신 탓이로다 / 그 밥에 어떤 돌이 들었더냐 / 초벌로 새문안에 거지바위 문턱바위 둥글바위 너럭바위 치마바위 감투바위 뱀바위 구렁바위 독사바위 행금바위 중바위 (중략) 서강의 농바위와 같은 돌멩이가 하얀 흰밥에 청태콩에 많이 까 두른 듯이 드문 듬성이 박혔더라. 그 밥을 건목을 치고 이를 쑤시고 자세히 보니 연주문 돌기둥 한 쌍이 금니 박히듯 박혔더라. 그 밥을 다 먹고 나서 눌은 밥을 훑으려고 솥뚜껑을 열고 보니 해태 한 쌍이 엉금엉금.” 위 가사는 잡가 “바위타령”의 일부로 1900년대에 서울 풀무골[冶洞]의 소릿꾼 이현익이 처음 만들었으며 그 내용은 온 나라에 있는 유명한 바위 80여 종을 읊은 것입니다. 이 노래는 가사가 재미납니다. 손수 지은 밥에서 돌이 나오니까 그것은 임이 안 계신 탓이라고 억지를 떱니다. 그러면서 온갖 바위 이름을 둘러댑니다. 이 노래에 나오는 온갖 바위들은 서민들의 애환과 정이 듬뿍 담긴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국악은 고리타분한 것이 아니라 잘 들어보면 참 맛깔스럽고 해학적입니다. 깊어가는 가
1710. 소설이 들은 음력 시월은 ‘공달’입니다 “무 배추 캐어 들여 김장을 하오리라 / 방고래 구들질과 바람벽 맥질하기 / 창호도 발라놓고 쥐구멍도 막으리라 / 수숫대로 터울하고 외양간에 떼적 치고 / 우리 집 부녀들아 겨울 옷 지었느냐” 위는 농가월령가 10월령의 한 대목인데 오는 일요일 22일은 24절기 중 소설(小雪)입니다. 소설이란 이름은 눈이 적게 온다고 하여 붙여진 것입니다. 소설 무렵이 되면 얼음이 얼기 시작하고 첫눈이 내리는 등 첫겨울의 조짐을 보이면서도 따사로운 햇살이 있어서 “소춘(小春)” 곧 “작은 봄”이라고도 하지요. 음력 시월 곧 소설 즈음은 추수를 끝내고 아무 걱정이 없이 놀 수 있는 달이라 하여 '상달'이라 했고, 일하지 않고 놀고먹을 수 있어 '공달'이라고도 했습니다. 김장을 하고 시래기를 엮어 달며 땔감을 준비하는 등 대대적인 월동 준비에 들어갑니다. 또한, 이때는 시루떡을 넉넉히 하여 이웃과 돌려먹던 훈훈한 정도 있었습니다.
1709. 고조선 때 이미 철갑옷을 만들어 입었다 일제강점기 식민사관을 퍼트린 친일 역사학자들은 고조선의 역사를 신화로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고조선은 분명히 실존했던 강성한 나라였음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시 고조선은 이미 동아시아 최고의 옷감 짜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특히 북한 “조선유적유물도감편찬위원회”에서 펴낸 ≪조선유적유물도감≫에는 고조선이 이미 철갑옷을 만들어 입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서기 전 3세기경 고조선 후기 유적으로 추정되는 평양시 낙랑구역 정백동 1호 묘에서 찰갑(札甲)이 출토되었다. 이 찰갑은 기본적으로 장방형이지만, 그 아래쪽을 둥글린 것도 있으며, 물고기 비늘처럼 꿰어 붙였다.이를 통해 고조선에서는 적어도 서기 전 3세기 이전부터 철갑옷이 생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내용은 위 책을 참고하여 펴낸 상명대 박선희 교수의 글에서 나옵니다. 이른 시기부터 철갑옷을 만들어 입을 정도로 뛰어난 우리 겨레지만 그 갑옷처럼 철통같이 외세의 침략을 막아내지 못한 것이 안타깝습니다. 참고 : ≪한국 고대복식 그 원형과 정체≫, 박선희, 지식산업사, 2003
1708. 신랑신부도 되고, 선비도 될 수 있게 하는 병풍 병풍은 원래 바람을 막는 것이었지만 점차 그림이나 자수·글씨 등을 감상하거나 장식하기 위한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특히 병풍은 접거나 펼 수 있게 만들어 실용성과 예술성을 겸한 좋은 살림살이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병풍이 꽃 그림이나 새가 수놓아진 화조도이면 그 앞에 앉아 있는 이들은 신랑신부가 되며, 산수화가 그려 있으면 자연을 벗 삼아 살아가는 선비가 됩니다. 또 죽은 이들이 제사 음식을 받아먹기 위해서도 병풍은 꼭 있어야 합니다. 움직이는 그림을 펼치는 벽인 병풍은 벽처럼 다른 공간과의 차단을 원하지도 않으며, 밖에서 다른 이들이 쉽게 볼 수 있는 개방성도 있습니다. 또 병풍은 벽이기는 하지만 보고 싶을 때는 펼치고, 보고 싶지 않으면 접으면 되지요. 주로 10폭과 8폭 또는 12폭짜리가 많지만, 6폭·4폭·2폭도 있으며 2폭은 속칭 “가리개”라고 불립니다. 한옥에 병풍 하나쯤은 갖춘 삶을 산다면 좋을 일입니다.
1706. 궁중에서 쓰던 보자기 보셨나요? 예전엔 무엇을 싸두거나 싸서 보낼 때 보자기를 쓰곤 했지요. 그런데 궁중에서 쓰던 보자기는 어떤 것이었을까요? 아래 사진은 한국자수박물관에 있는 것으로 왕비 책봉 때 예물을 싸서 보냈던 궁에서 쓰던 보자기 곧 “궁보(宮褓)”입니다. 한쪽 귀퉁이에 조선 왕실을 상징하는 배꽃 그림이 있는 것으로 보아 궁보임을 알 수 있지요. 이 보자기는 가운데 네모난 부분에 한 쌍의 학이 영지버섯을 물고 있는데 이는 장수의 상징입니다. 보자기 주변의 글씨를 보면 먼저 큰 글씨로 “복비도주(福比陶朱)”가 있습니다. 이는 중국의 유명한 부자 “도주”와 견줄만한 복을 비손하는 뜻이며, 작은 글씨 "다남자(多男子)”와 “수부귀(壽富貴)”는 아들 많이 낳고 오래오래 부귀를 누리고 살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다남자와 수부귀 글씨 바깥에는 끈이 달렸는데, 이는 물건을 싸고 나서 잡아매려는 것입니다.
1707. 가을 밭의 선명한 백로, 이인상의 작품 세계 “작은 누대는 내가 있을 만하고 / 조용히 지내는 데는 좌우명이 있도다 / 꾸밈이 실제보다 낫지 않고 / 행실은 명예를 좇지 않는다 / 말은 속되지 않고 / 읽는 것은 오로지 경서(經書)뿐이다 / 담담하게 벗을 받아들이고 / 옛것 본받기를 법으로 삼는다 / 가난해도 하늘의 뜻을 어기지 않으니 / 꿈에도 언제나 맑을지어다” 위 글은 조선 후기의 서화가 능호관 이인상의 시입니다. 아니 시라기보다는 조용히 숨어 사는 데 대한 자신의 뜻을 말하고 있습니다. 서출에 종6품 벼슬을 살았던 능호관은 세상에 나가기보다는 그저 조용히 경서를 읽고, 하늘의 뜻을 어기지 않는 삶을 원했던가 봅니다. 하지만, 가난했던 그는 땅을 마련할 돈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 그의 작품 세계는 그의 단짝이었던 서화가 이윤영이 “능호관의 시는 봄 숲의 외로운 꽃이요, 가을 밭의 선명한 백로다.”라고 말하였다지요. 능호관의 작품은 시·서·화가 하나로 아우러지는 뛰어난 세계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1705. 후기신라 여인의 아름다움, 바다거북 껍질로 만든 장식빗 여인들이 아름다워지려고 하는 것은 동양이나 서양, 옛날이나 지금을 막론하고 다 같습니다. 그래서 옛 유물 가운데에는 여인들의 화장품이나 장식품 그리고 거울 등이 뜻밖에 많습니다. 특히 후기신라 시대에 만든 것으로 전해지는 장식빗 곧 “대모머리빗”은 참 아름답습니다. 현재 호암미술관에 있는 얼레빗 모양의 이 “대모(바다거북이)머리빗”은 윗부분에 녹색 옥을 새기거나 박아넣어 꽃 모양으로 장식하고 또 같은 꽃 모양을 금실[金絲]로 연결하여 빗 아랫부분에 매달리게 해 매우 화려합니다. 이 빗은 장식빗 겸용이었다고 전문가들은 말하지요. 당시 상류층 여인이 이 대모머리빗과 함께 곡옥(옥을 반달 모양으로 다듬어 끈에 꿰어서 장식으로 쓰던 구슬)과 순금 귀걸이를 같이 사용하던 모습은 과연 어땠을까요? 쪽진 머리도 없고 머리 장식도 별로 안 하는 요즈음 여인들에게 있어 대모머리빗은 그저 박물관 유리 상자 안의 한낮 유물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1704. 목이 칼칼, 코가 맹맹 감기 기운일 때 “배숙”을 “배를 시루에다 푹 삶은 뒤에 / 서당에서 마음껏 맛보노라니 / 약간 신맛이 입 안에서 시큼시큼 / 남은 열기가 뱃속에서 뜨끈뜨끈 / 배고픈 느낌도 어느새 사라지고 / 졸음 귀신도 줄행랑치누나. / 생각나네, 깊어가는 연경의 어느 날 밤 / 이 배 먹고 싶다고 문간에서 소리치던 일이” 위 글은 고려말 문신 목은 이색의 ≪목은고≫에 나오는 “증리(蒸梨)” 곧 “배숙” 이란 시입니다. ≪본초강목≫ 등 한방서에 따르면 배는 해열, 기침 등에 효과가 있고, 권태, 근육통, 두통, 백일해에도 좋다고 되어 있습니다. 배숙은 배에 통후추를 박아 생강 끓인 물에 꿀과 함께 넣고 서서히 끓여 만든 것입니다. 은근한 통후추의 향에 코가 뚫리고 생강 기운에 열이 나며, 배 성분에 기침도 잦아 들 것입니다. “얼마 전 새벽, 피곤함에 그만 창문을 닫지 못했다. 아침에 일어나니 여지없이 목이 칼칼한 것이 그분이 오셨음이 느껴졌다. 그날 오후 배숙을 즐겼고, 그분은 흔적도 없이 떠나셨다.”(“이트” 블로그에서)
1703. 옛사람에게 인기 있었던 이야기꾼을 아시나요? 요즘은 인터넷이 발달하여 저 멀리 미국이나 영국의 소식도 즉시 알 수 있는 지구촌 시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통신이 발달하지 못한 옛사람들은 한양에서 일어난 일을 저 아래 남도 사람이 알려면 몇 날 며칠을 기다려야 하거나 아니면 상당한 세월이 흐른 뒤에야 알 수 있었지요. 그래서 옛사람들은 그렇게 세상 소식에 목말라 있었는데 조선 후기쯤 오면 전문적으로 책을 읽어주는 “이야기꾼” 곧 “강담사” 또는 “강청사”, “재담꾼”이라고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그들이 장터 등에서 같은 이야기를 하거나 ≪수호지≫ 등을 읽을 때 나쁜 놈의 역할을 어찌나 그럴듯하게 읽었던지 이야기를 듣던 사람이 격분하여 칼로 이야기꾼을 찔러 죽였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나올 정도입니다. 예전 서양에서도 이 이야기꾼 곧 “소식 배달부”의 전통은 마찬가지였다고 합니다. 사람 사는 세상은 조금씩 다를 뿐 세상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이 있고 또 그를 전해주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은 진리입니다.
1702. 옛사람이 꿈꾸던 완벽한 행복은? 요즘 사람들의 꿈은 무엇인가요? 혹시 부동산대박 아니면 로또 대박? 대부분 잘 먹고 잘 사는 것 그런 물질적 풍요로움은 물론 명예도 꿈꾸지 않나 싶습니다. 그런데 옛사람들은 어떤 행복을 꿈꾸었을까요? 그 옛사람이 꿈꾼 “완벽한 행복”을 조선시대의 한글 단편소설 모음집인 ≪삼설기(三說記)≫ 가운데 “삼사횡입황천기(三士橫入黃泉記)”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 내용을 한 번 보면 다음과 같지요. [세 선비가 봄날 산에 올라 술에 취했다가 염라대왕에게 끌려갔는데 죽은 때가 안 된 사람들인지라 돌려보내게 되었는데 소원을 말하면 들어준다고 했다. 그런데 그중 한 선비는 “명당에 집을 짓고 대자연을 벗 삼아 의식주 걱정 없고 아들 형제 딸 하나에 내외손이 번성하고 180살까지옛 를 살다가 병 없이 죽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염라대왕은 “생사와 길흉화복의 모든 권리를 다 쥔 나도 그렇게는 못하니 네 소원은 들어줄 수 없다.”라고 말했다.] 그 선비는 효도와, 먹고사는데 부족함이 없는 것과 아름다운 자연과 함께 하는 것 그리고 명예나 높은 관직 대신 무병장수 하는 것을 소원합니다. 이는 운치 있고 맑으면서도 부귀를 겸한 완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