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0. 공주의 혼인을 검소하게 할 것을 아뢰다 인조실록 3권, 1년(1623) 9월 2일(기축) 기록에 보면 “사간원이 공주의 혼인을 검소하게 할 것 등을 청하다.”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사간원은 다음과 같이 임금에게 아룁니다. “혼인이란 부부의 시작이요 만복의 근원이므로 반드시 존경과 예의로 해야 합니다. 또 옷이나 집의 사치스러움을 자랑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이번 공주의 혼인 예식은 내탕(임금이 개인적으로 쓰는 돈)이 마르고 백성이 어려워진 것을 생각하면 지금이야말로 전하께서 순박하고 검소한 옷으로 모범을 보여 신하들을 이끌 때입니다. 그리고 여러 왕실과 사대부, 서민까지도 혼인할 때 사치가 벌써 걷잡을 수 없는 폐단이 되었으니, 법으로 엄히 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도 범하는 자가 있으면 가장의 죄를 다스리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요즘 결혼식 때 꽃값만 천만 원대를 쓰는 사람이 있다더니 사치는 예나 지금이나 문제인 모양입니다.
1669. 일제강점기 때 날개 돋친 듯 팔렸던 “박가분” 예나 지금이나 여성들이 예뻐지려는 마음은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때 그 여성들을 공략한 끝에 날개 돋친 듯 팔렸던 박가분을 아시나요? “박가분(朴家粉)”은 일제 강점기인 1920년에 상표 등록하여 판매한 것으로 공산품으로서는 맨 처음 만들고 판매한 한국 최초의 화장품입니다. 박가분이 전성기 때는 온 나라의 방물장수가 몰려들었고, 하루 1만 갑 이상을 팔기도 했다지요. 당시 박가분이 인기를 끈 이유는 바로 포장 방식이었다고 전합니다. 박가분 이전의 백분은 얇은 골패짝 같은 것으로 작게 만들어 백지로 싸서 팔았지요. 그러나 박가분은 훨씬 두꺼웠고(양), 인쇄한 라벨을 붙인 상자에 담아서 팔아 상품 가치를 높였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인기가 좋던 박가분도 유사품은 물론 외제가 들어온데다가 납 성분이 몸에 좋지 않다는 소문이 돌았기에 기울어지기 시작했지요. 게다가 한 기생이 박가분을 쓰다가 얼굴을 망쳤다며 고소하는 사태까지 벌어졌습니다. 결국, 박가분은 1937년 이후 시장에서 사라졌습니다. 한편, 그 뒤로 화장품 광고에는 “절대로 납이 안 들었음”이라는 구절이 필수였다고 합니다.
1668. 추분, 중용과 향기와 겸손을 생각하게 하는 때 오늘은 24절기 중 추분으로 가을이 성큼 다가왔습니다. 그런데 추분이면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먼저 추분엔 낮과 밤의 길이가 같은데 이는 어느 쪽에도 치우침이 없는 균형의 세계입니다. 지나침과 모자람 그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는 가운데에 덕(德)이 존재한다는,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평상(平常)이라는 뜻의 중용을 다시 한 번 새길 필요가 있지요. 그런가 하면 추분엔 향에 대한 의미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추분의 들녘에 서면 벼가 익어가는데 그 냄새를 한자말로 향(香)이라고 합니다. 벼 화(禾) 자와 날 일(日) 자가 합해진 글자이지요. 한여름 해의 사랑을 받으며 자란 벼는 그 안에 진한 향기를 지니고 있음입니다. 그처럼 사람도 내면에 치열한 내공을 쌓아갈 때 저 내면 깊이엔 향기가 진동하지 않을까요? 또 들판의 익어가는 수수와 조, 벼들은 강렬한 햇볕, 천둥과 폭우의 나날을 견뎌 저마다 겸손의 고개를 숙입니다. 이렇게 추분에는 중용과 내면의 향기와 겸손을 생각하게 하는 아름다운 때지요.
1667 바다의 탱크라 불릴만한 거북선 우리는 임진왜란 때 이순신이 개발하여 일본 수군을 격파한 거북선을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거북선은 종래 조선 군함인 판옥선에다 철판으로 된 덮개를 씌우고 용머리를 붙인 전투함입니다. 지금까지 복원된 거북선은 모두 정조 때에 편찬된 《이충무공전서》에 기록되어 있는 전라좌수영 거북선을 바탕으로 해서 만들었다고 합니다. 겉모습은 앞에 용머리가 있고, 거북선 왼쪽과 오른쪽에 각각 6문의 포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거북선의 장점은 내부 전투원을 보호할 수 있다는 점과 함께 앞뒤 그리고 오른쪽과 왼쪽에무려 14개의 화포가 달려서 적선에 포위된 때에도 얼마든지 공격할 수 있는 것이지요. 또 배 위에 철판이 씌워져 있어 적군을 막는데 뛰어나기 때문에 적선이 접근전을 펼쳐도 쉽게 막아낼 수 있습니다. 그 까닭에 거북선이 맹렬히 돌진하여 닥치는 대로 포를 쏘고, 용머리를 이용하여 적선을 깨뜨리는 작전도 펼칠 수 있었지요.
1666. 일본 가가미신사의 수월관음도는 가장 아름다운 고려불화 고려시대 미술품의 대표작을 꼽으라면 불교회화와 청자 등을 들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는 달이 비친 바다 가운데 금강보석(金剛寶石)에 앉아있는 관음보살을 그린 그림인데 고려시대 불화 중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꼽힙니다. 그런데 지난봄 양산 통도사에서 열린 전시회에는 일본 규슈 가라쓰시의 가가미신사(鏡神社)에 소장 중인 수월관음도가 전시되어 관심을 끌었습니다. 이 수월관음도는 세로가 4.19m, 가로가 2.54m의 어마어마한 크기로 가장 아름다운 고려 불화라고 합니다. 투명한 베일을 걸친 관음보살의 고귀한 자태가 어둠 속에서 마치 달처럼 아름답게 빛나며 현신하는 것 같은 신비한 효과가 있는 데에서 표현기법상의 우수한 경지를 엿볼 수 있는 국보급 문화재라고 하지요. 그런데 ≪고려사≫ 1357년(공민왕 6) 9월 26일의 기록에는 "왜구가 승천부의 흥천사에 침입해 충선왕과 계국대장공주의 초상화를 가지고 갔다."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가가미 신사의 '수월관음도'는 이때 도둑맞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1665. 시어머니를 화병 나 죽게 한 며느리 유배보내다 현종개수실록(현종실록을 완전히 뜯어고친 것) 19권, 9년(1668) 10월 3일 자에는 다음의 내용이 있습니다. 판부사 정치화가 의논드리기를, “죄인 비희가 평소 시부모에게 불순했을 뿐만 아니라 그 시어미가 화병이 나서 결국 죽게 되었다는 말이 남편인 유진의 공초(신문기록)에서 이미 나왔고 (중략) 도리와 법을 참작하여 죽이지는 말고 유배를 보내는 게 맞을듯합니다.” 또 형조가 아뢰기를, “유진은 집안을 잘 단속하지 못하였고, 또 처를 위해서 앞뒤로 감싸준 죄가 있으니, 한 해 동안 유배를 보내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를 보면 조선시대엔 시부모를 화병에 이르게 하여 죽도록 했다는 것이 밝혀질 때는 그 며느리는 물론 집안 단속을 잘못한 남편까지 유배를 보냈는가 봅니다. 다만, 남편은 다른 죄와는 달리 1년이란 짧은 기간을 정하여 보냈습니다.
1664. 동대문 밖 채소시장은 금남구역이었다 순조 임금 때 펴낸 ≪한경지략≫이란 책에 보면 동대문 밖 “동묘”의 남서쪽에는 한양에서 가장 큰 푸성귀(채소)시장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시장은 남자들이 드나들 수 없었던 금남구역이었다지요. 그 까닭이 무엇일까요? 그곳에서 가까운 곳에는 단종비인 정순왕후 송씨가 단종이 죽고 과부가 된 뒤 초막을 짓고 살았던 “정업원(淨業院)”이 있었습니다. 이후 세조는 정순왕후가 동냥으로 끼니를 잇는다는 소문이 돌자 그 근처에 영빈정이란 집을 짓고 살게 했지만 정순왕후는 영빈정에 들어가기를 거절했다지요. 또 조정에서 식량을 주어도 완강히 거부하고, 말년에는 베에다 자줏물 들이는 염색을 하면서 겨우 풀칠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 근처 마을을 자줏골이라고 불렀는데 장안 부녀자들이 정순왕후를 도우려고 앞다투어 몰려들었다지요. 그런데 조정에서 이를 금하자 시장을 만들고 장사하는 척하면서 정순왕후의 생계를 도왔으며 혹시 조정에 밀고할까 봐 남자들은 일절 출입을 금하였습니다.
1663. 도량 넓은 황희, 인색한 변계량 성현의 ≪용재총화≫에 보면 세종임금 때의 유명한 두 신하 황희와 변계량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세종 시대를 빛나게 한 황희정승은 도량이 아주 넓었다고 하지요. 그는 나이 아흔 살이 넘었는데도 종일 방에 앉아서 책만 읽었는데 방 밖에 아이들이 와서 복숭아를 함부로 따도 “나도 맛보고 싶으니 다 따가지는 마라.”라고 할 뿐이었습니다. 또 밥 먹을 때마다 아이들이 모여들어 먼저 먹으려고 떠들고 다투어도 그냥 빙그레 웃었다고 합니다. 반면에 변계량은 몹시 인색하여 조그만 물건이라고 남에게 빌려주지 아니하고, 수박을 쪼갤 때는 쪼개는 대로 기록했으며, 손님을 맞아 술을 마실 때에도 잔 수를 센 다음 술병을 조심스럽게 거둬들였지요. 그런가 하면 임금이 내리는 술과 음식을 방에 저장해 두고 오래되어 구더기가 생기고 냄새가 담 밖에까지 나도 썩으면 갖다 버릴지언정 종 등 아랫사람은 한 모금도 얻어 마시지 못했다고 합니다.
1662. 저인망보다는 쓰레그물이라고 불러주세요 우리는 가끔 신문에서 다음과 같은 기사를 봅니다. “우리 해역을 침범한 중국 어선 두 척이 저인망으로 고기잡이하는 것을 우리 해양경찰이 발견하여 법적인 조치를 취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저인망이란 무슨 말인지 아시나요? “저인망(底引網)”은 바다 밑바닥까지 쓸어 작은 고기까지 잡을 수 있는 그물을 말합니다. 어떤 이는 이 저인망을 “트롤망(trawl)網”이라는 영어와 한자로 조합된 말을 쓰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때 저인망이란 어려운 한자말보다는 토박이말 “쓰레그물”을 쓰는 것이 훨씬 알아듣기 쉽고 정겹지 않나요? 여기서 “쓰레”는 “쓸다”에서 갈래친 말로 쓸어 담는 것을 말합니다. 예로부터 어부는 새끼물고기는 잡으면 놓아주고 아예 잡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자연과 함께 더불어 살려는 슬기로움이지요. 참고로 뭍에 가까운 바다는 “든바다” 먼바다는 “난바다”입니다.
1661. 당파 싸움의 결과 고쳐진 조선왕조실록들 국보 제151호이며,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오른 ≪조선왕조실록≫은 조선 태조에서부터 조선 철종 때까지 25대 472년간(1392∼1863)의 역사를 사건이 일어난 순서대로 기술하는 역사서술의 한 방식인 편년체(編年體)로 기록한 책입니다. 그런데 이 가운데는 실록이 편찬된 뒤 고쳐진 실록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선조수정실록, 현종개수실록, 경종수정실록, 숙종실록보궐정오 입니다. 여기서 “수정실록”은 본래의 실록에서 일부 내용을 고치는 것이고, “개수실록”은 처음부터 완전히 뜯어고치는 수준이어서 분량도 훨씬 늘어납니다. 그리고 “보궐정오”는 본래의 실록에서 잘못된 글자나 내용을 찾아내 빠진 것을 채워 넣고 틀린 것을 고친 뒤 부록처럼 붙이는 것이지요. 문제는 그렇게 고쳐지는 대부분은 당파싸움의 결과로 이루어진 집권세력의 뜻에 따르는 것이기에 왜곡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