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0. 세종대왕 탄신 날짜의 비밀을 아십니까? 우리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분을 꼽자면 누구나 세종대왕을 말합니다. 그만큼 그분은 우리의 삶에 끼친 공이 지대하지요. 그런데 세종대왕이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 아는 사람은 적습니다. 정확히 알려면 세종실록 총서를 보아야만 합니다. 그에는 “태조 6년 정축 4월 임진에 한양 준수방(俊秀坊) 잠저(潛邸) 에서 탄생하였으니”라고 나옵니다. 그런데 이 4월 임진이라면 분명히 음력이었지요. 그러면 그날은 음력 4월 10일인데 양력환산기에 넣어보면 5월 9일이 됩니다. 그럼 우리가 아는 5월 15일과는 엿새 차이가 납니다. 그 까닭이 무엇일까요? 서양 달력의 역사를 보면 로마 최고 집정관이었던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이집트력을 규범으로 BC 45년 로마력을 개정 율리우스력을 만들었는데 이 율리우스력이 전 유럽에 보급되어 16세기 말까지 쓰였습니다. 그래서 음력을 쓰던 동양의 날짜를 양력으로 환산하고자 할 때 당시 서양의 율리우스력에 맞춰 환산해야 하기에 지금 양력 환산과는 조금 다른 날짜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종대왕 탄신은 15세기로 그때는 율리우스력을 쓰던 때여서 이것으로 환산하면 양력으로 5월 15일이 되는 것입니
1659. 꿩고기 요리 석류탕을 아시나요? 정부인 안동 장씨(1598~1680)가 펴낸 음식 조리서 ≪음식디미방≫을 보면 17세기 우리 겨레가 어떤 음식을 만들어 먹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엔 먼저 면병류(麪餠類) 곧 떡과 빵으로 만든 음식, 각종 고기 음식인 어육류, 주국방문(酒麴方文) 곧 술 빚는 법과 기타 식초 만드는 법 등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는 “석류탕(石榴湯)”이란 것이 있는데, 이는 꿩고기나 닭고기를 썰어 두드리고, 무나 미나리나 파와 함께 두부, 표고, 석이버섯을 함께 두드려 기름간장에 후춧가루를 넣고 볶아 만두 속처럼 만듭니다. 밀가루를 곱게 다시 쳐서 물에 반죽하여 지지되, 얇게 만두피를 빚듯이 합니다. 거기에 고기 볶은 것과 잣가루를 함께 넣어 작은 석류 모양처럼 둥글게 집습니다. 그리고 맑은 장국을 안쳐 푹 끓거든 국자로 뜨되 한 그릇에 서너 개씩 떠 술안주로 쓰라고 가르쳐 줍니다. 이 “석류탕”은 석류 모양으로 빚는다는 것이지 석류는 재료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참고 : ≪음식디미방 주해≫, 백두현, 글누림, 2008
1658. 정조임금이 쓴 일기 ≪일성록≫ 이야기 최근 세상을 뜬 김대중 전 대통령의 마지막 일기가 공개되어 사람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일기를 조선시대의 임금인 정조도 썼습니다. 정조는 세손 시절인 1760년(영조 36)부터 매일 일기를 쓰고 이것을 기록으로 남겼는데 그 이름은 ≪일성록(日省錄)≫입니다. 정조는 증자가 말한 “나는 매일 세 번 반성한다.”에 깊은 감명을 받아 일찍부터 일기 쓰는 버릇을 들였다지요. 이후 ≪일성록≫은 신하들이 정리하는 것으로 바뀌어 마지막 왕 순종까지 150년간에 걸쳐 기록되었으며 모두 2,327책이 있습니다. 이 ≪일성록≫은 조선이 기록의 나라임을 증명하는 책의 하나입니다. ≪일성록≫의 첫 부분은 날씨로 시작하여 지금의 일기와 닮은 데가 있지요. 또 ≪일성록≫은 임금 주변에서 일어난 일들을 날마다 요점 정리 방식으로 간추린 기록입니다. 신하들이 올린 상소문을 비롯하여 임금이 한 일, 임금이 백성이나 신하에게 내리는 말, 암행어사의 지방 실정 보고서, 가뭄·홍수 구호 대책, 죄수 심리, 정부에서 펴낸 책, 임금이 행차할 때 처리한 민원 등이 월, 일별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나를 반성하기 위한 “일기”
1657. 옛 그림과 글씨는 어떻게 진짜인지 구별할까요? 가끔 문화재 위조 사건을 보기도 하고 어떤 그림은 진짜냐 가짜냐를 둘러싸고 법정싸움까지 벌어집니다. 그러면 옛 그림과 글씨는 어떻게 감정할까요? 옛 그림과 글씨 곧 고서화는 주요근거와 보조근거를 따져 감정합니다. 주요근거는 작품이 창작된 당시의 흐름 곧 풍격을 보고, 작가 개인의 출신, 배움, 사상, 성격 등과 함께 젊었을 때의 작품이냐 나이 들어서의 작품이냐를 보게 됩니다. 작품을 창작할 때가 전쟁통이냐 평화시냐에 따라 다르고, 노동자냐 지주냐에 따라 다르겠지요. 그다음 보는 보조근거로는 어쩌면 가장 중요한 것인데 작품에 쓰인 발문(跋文, 책이나 그림의 끝에 그림의 뜻이나 그린 뜻을 간략하게 적은 글), 작가의 이름, 작품의 이름 등과 함께 낙관을 봅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그림을 그린 종이나 비단이지요. 그 종이가 만들어진 때, 지역은 물론 재료나 기법도 작품이 진짜인지를 가늠할 수는 재료입니다. 특히 옛 비단의 폭은 보통 50cm 정도여서 그보다 큰 그림이라면 분명히 잇댄 자국이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꼼꼼히 뜯어보아도 가짜가끊임없이 나오는 것은 문화유산이 "돈으로 환산"되기 시작 하면서부터
1656. 1960년 8월21일 자 신문 한번 보실래요? 자료를 찾으려고 조선일보 1960년치를 뒤졌더니 온통 한자투성이였습니다. 일반 정치, 사회면은 물론 광고면까지 한국 신문이라고 하지 못할 만큼 한자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지요. 특히 광고면은 영화광고 천지였는데 그것들도 물론 한자로 도배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그것은 킷쓰로 始作했다.”라는 영화 광고 내용을 보면 “情熱的인 長時間킷스나 가벼운킷스를 不問하고 입과 입이 交錯된 것을 1回로 셈함. 主役킷스와 助演陣킷스를 모두 셈해야 됨.”이라고 되어 있어 한자를 모르는 사람은 전혀 이해할 수 없게 되어 있지요. 2009년 신문은 이제 한자가 거의 없을 정도로 한글전용이 되었습니다. 격세지감을 느낄 수밖에 없지요. 예전 한 단체가 한자를 평소에도 써야 한다고 외쳐댔지만, 이제 한글만 쓰는 것은 대세가 되었습니다. 학문적인 쓰임새 말고는 일상생활에서 한자는 쓸모없어졌지요. 제나라 글자가 있으면서 아직도 남의 나라 글자를 즐겨 써야 할 까닭이 있을까요?
1655. 제주도의 대문 ‘정“을 아십니까? 제주도 옛집에 가면 뭍 집들의 대문과는 사뭇 다른 “정”이라고 하는 대문이 보입니다. “정”은 걸쳐두는 통나무 가지인 “정주먹”과 이 정주먹을 걸쳐 놓게 만든 구멍 세 개가 뚫린 나무 기둥 곧 “정낭”을 통틀어 말합니다. 이 “정”은 대문이라기보다는 집에 사람이 있고 없음을 표시하고, 말이나 소의 드나듦을 막으려는 소박한 아름다움이지요. 손님이 남의 집에 가면 정주먹이 몇 개 걸쳐 있는지를 보고 행동을 하게 됩니다. 먼저 정주먹이 하나 걸쳐있으면 집에 주인이 있으니 들어오라는 뜻이고, 두 개가 걸쳐있으면 가까운 데 간 것으로 잠시 뒤에 들어온다는 뜻이며, 세 개가 걸쳐 있으면 나들이 중이니 나중에 오라는 뜻으로 생각하면 됩니다. 전하는 말로는 과부집의 정낭은 네 개가 걸쳐진다고 하지요. 혹 어떤 집에서 정이 아닌 대문을 달려고 하면 마을 사람들은 “무슨 보물덩이라도 감추어 두었기에 남을 못 믿어 “이문간”을 만드느냐고 못마땅하게 여긴다고 합니다. 지금은 이 정이 있는 집이 많이 사라졌지만 성읍민속마을 등에 가면 볼 수 있습니다. 참고 : ≪제주 민속의 아름다움≫, 진성기, 제주민속연구소
1654. 갖은 양념이 빚는 맛깔스러운 나물 반찬 이제 처서가 지나고 백로를 맞으며 가을을 시작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한여름 고생했던 몸을 추슬러야 합니다. 그럴 때 좋은 것은 바로 가을 나물들입니다. 가을볕에 푸성귀들을 말리면 비타민 전구체가 비타민 D로 변하면서 영양이 풍부해진다고 합니다. 특히 여름철을 나면서 얻을 수 있는 호박, 가지, 무 등을 말리면 훌륭한 밑반찬이 됩니다. 거기다 고춧잎, 깻잎, 고구마순 등도 우리의 입맛을 돋우기에 충분합니다. 그런데 이런 나물들도 양념이 없으면 곤란합니다. 우리가 많이 쓰는 양념은 파, 마늘, 고추, 생강 등과 간장, 된장, 고추장 같은 것들이지요. 거기에 더하여 고소한 맛이 나게 하려면 깨소금과 참기름을 넣고, 매콤하고 톡 쏘는 맛을 내려면 산초, 후추, 겨자를 씁니다. 또 달짝지근하게 하려면 꿀과 조청이요, 시큼한 맛은 식초를 치지요. 거기에 빠질 수 없는 것은 김치나 생채를 담글 때 쓰는 젓갈입니다. 이런 갖은 양념이 어우러져 한국 음식의 묘미를 보여줍니다. 그래서 들이나 산에서 나는 온갖 푸성귀들은 맛깔 나게 우리의 상 위로 올라올 수 있습니다. 맛나게 무친 나물 한 접시로 가을 미각을 찾아보시지요.
1653. 건춘문은 봄을 세우고, 영추문은 가을을 맞이한다 옛날 각종 건물에는 그를 뜻하는 이름이 있고 그 이름을 써서 붙여놓은 현판 곧 편액이 있습니다. 보통은 “현판(懸板)”이라고 하지만, 그 뜻을 보다 정확하게 담는 말은 “편액(扁額)”입니다. 현판은 ‘글씨를 쓴 널빤지[板]를 걸었다[懸]’는 단순한 뜻인데, 편액은 ‘건물의 문 위 곧 이마[額] 부분에 써 놓은 글씨’라는 뜻이지요. 여기서 “편(扁)은 문 위에 써 놓은 글”을 뜻합니다. 세종 때 물시계와 천문 관측기구를 설치한 곳인 경복궁 “흠경각(欽敬閣)”은 “하늘을 공경하여, 공손히 사람에게 필요한 시간을 알려 준다.”라는 뜻으로 붙인 이름입니다. 그런가 하면 창덕궁의 “취한정(翠寒亭)”의 뜻은 정자 주위의 나무들이 “추위를 무릅쓰고 푸른 자태를 잃지 않는다.”라는 것입니다. 숙종이 취한정을 읊은 시 중에 “빽빽하게 자라나서 온통 정자를 둘러싸고, 눈 덮인 채 추위를 이겨 빛이 더욱 맑도다"라는 구절을 보면 그 뜻이 분명해집니다. 경복궁 동문 “건춘문(建春門)”은 “봄을 세운다.”라는 뜻이 들어 있고, 서문인 “영추문(迎秋門)”은 “가을을 맞이한다.”라는 뜻이 있지요.
1652. “조선 이름은 촌티가 난다”라며 창씨개명했다 일제강점기 막바지인 1940년 조선총독부는 조선 사람들에게 창씨개명을 강요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성씨를 버린다는 것은 조상에게 죄를 짓는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곳곳에서 죽음으로 항거했고, 그것도 안 되면 이상한 이름으로 개명해서 일본 관헌들을 곤혹스럽게 했습니다. 그 가운데는 “태분창위(太糞倉衛)” 곧 “이누쿠소구라”로 “개 같은 놈 똥이나 먹어라.”도 있었다고 하며, 전병하라는 사람은 성에 한 자만 보태어 “전농병하(田農丙下)”로 했는데 일본 발음으로 "덴노헤이카“ 곧 ”천황폐하“가 되었다는 얘기도 전합니다. 그러나 친일파로 꼽히는 이광수는 “가야마 미츠로(香山光郞)”으로 짓고는 칼럼에 “황공하고도 위대하신 천황폐하의 이름과 읽는 법이 같은 씨명을 가지려고 그렇게 지었다.”라고 밝혔습니다. 또 “을사 5적”의 하나인 송병준은 “나에게 조선 풍속 습관이 어울리지 않고, 조선 이름은 촌티가 난다.”라며 “노다 헤이지로”라고 바꾼 이름을 자랑스럽게 떠벌리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불놀이”의 시인 주요한의 창씨명은 “마쓰무라 고이치”인데 여기서 “고이치”란 일본 천황제 파시즘 핵심사상으로 태평양 전
1651. 제주도에 가면 꼭 이분을 만나보세요 어떤 이는 살아있음을 확인하려고 여행을 떠난다 했고 어떤 이는 잃어버린 것을 찾으러 떠난다고 했으며, 누군가는 자신을 버리고 새로운 나를 만나러 떠난다고 했다던가요? 어쨌거나 여행은 삶 속의 기쁨이므로 우리는 여행을 떠납니다. 나는 제주도 여행의 한 길목에서 참으로 감동적인 삶을 산 “제주민속박물관” 74살의 진성기 관장님을 만났습니다. 제주도 토박이로 제주 땅에 내려오는 많은 설화를 모았고 사라져 가는 토박이말을 정리했으며 발길에 차이는 돌과 지나가는 바람 그리고 풀조차 모두 그의 손에 닿으면 전설집이요 민속품이었지요. 그는 1964년 한국 최초로 사립박물관 “제주민속박물관”을 개관한 이래 현재 수집한 민속품이 무려 1만 점이 넘습니다. 그가 수집한 수집품 속에는 고려시대 "해시계”, 무속악기 “울쇠”, 조개껍데기를 이용한 등잔 받침(등판)은 물론 해녀들이 쓰던 물건들과 각종 제주도 특유의 민속품 등이 그득합니다. 또 박물관 뜰에는 지난 세월 제주인들이 민간신앙으로 모셔오던 오묘한 갖가지 얼굴 모습을 한 “무신궁”을 모아 놓았지요. 진 관장님은 이렇게 청춘을 불사르고도 아직도 모자란 열정으로 박물관을 지키고 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