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0. 오늘은 광복절, 역사왜곡은 계속된다 오늘은 우리 겨레가 일제강점에서 해방된 64돌 광복절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일본과 관련된 역사왜곡은 계속 진행됩니다. 일본 교토에 가면 정유재란 때 조선 민중의 코를 베어다 묻은 코무덤이 있지요. 고 조중화 씨가 쓴 책 《다시 쓰는 임진왜란사, 1996, 학민사》에는 당시 풍신수길의 부하에게서 받은 코 영수증과 풍신수길이 직접 장수들에게 보낸 감사장 등 각종 자료가 있어 분명히 이 무덤에는 귀가 아닌 코가 묻혀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코무덤”이란 말이 너무 야만스럽다며 에도시대(1603년~1867년) 초기의 유학자 하야시 라산(林羅山)이 “귀무덤”이라고 부르자고 하여 그렇게 바뀌었지요. 현재 이 교토시가 세운 코무덤 설명팻말에는 귀무덤이라고 쓰고 가로 안에 코무덤을 덧붙여 놓았습니다. 문제는 현재 한국인들에 의해 분명한 코무덤이 귀무덤으로 둔갑된다는 것입니다. 2009년 8월 14일 자 연합뉴스엔 "만행 사과하고파"…'귀무덤' 지킨 日노인”이란 기사가 보입니다. 또 한 시인은 “코무덤”이란 시에 “코무덤 귀무덤 그게 그 말인데”이란 구절을 씁니다. 제발 일본인이 아닌 우리 스스로 역사를 왜곡하여 원혼의 슬
1639. 여덟 가지 공덕의 부채로 덕을 쌓아보세요 선풍기와 에어컨이 나오기 전엔 더위를 쫓는 일등공신은 역시 부채였습니다. 부채는 가지고 다니기가 편리함은 물론 선비들에게는 체면치레용으로 부녀자에게는 장식품으로도 활용되었지요. 19세기 학자 이유원이 쓴 《임하필기》라는 책에는 황해도 재령 등지에서 나는 풀잎으로 엮어 만든 부채인 “팔덕선(八德扇)”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기서 말하는 부채의 여덟 가지 덕은 곧 맑은 바람을 일으켜 주는 덕, 습기를 없애주는 덕, 깔고 자게 해 주는 덕, 값이 싼 덕, 짜기 쉬운 덕, 비를 피하게 해 주는 덕, 볕을 가려 주는 덕, 옹기를 덮어 주는 덕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손쉽게 가지고 다니기 편리한 쥘부채 곧 합죽선은 아주 유용한 물건입니다. 여름 더위가 막바지 기승입니다. 이럴 때 이웃에게 부채 바람을 선물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1638. 이발사, 목욕탕 주인과 친하라 “제군이 도회에 살려면 첫째 이발사와 목욕탕 주인과 먼저 친해 두어야 한다. 돈 육전이 없어 몸에서 악취가 물쿵물쿵 나고 불과 삼사십전 이발료가 없어 얼굴이 털투성이가 되고 장발이 되고 보면 혹 별종 색맹객이 있어 사상가나 철학가로 보아준다면 다행이지만 날카로운 시대 처녀들의 눈이 잔나비(원숭이) 상판을 연상할 우려가 많으니 연애하기는 벌써 빗나간 일이다. 그러니 돈 없을 때라도 마음 놓고 자가용처럼 쓸 이발관, 목욕탕이 있어야 한다.” 《모던 모세, 1930; 김진송, 1999》 위 글은 1930년에 쓰인 “도시생활 5계명” 제일조입니다. 우리나라에 공중목욕탕이 처음 생긴 것은 1924년 평양에서였다고 하지요. 이때 목욕탕은 부(府)에서 직접 관리하였습니다. 서울에는 1925년 공중목욕탕이 생겼고, 광복 당시에는 온 나라에 있는 공중목욕탕이 48개였다고 합니다.
1637. 일본 나라 동대사 안의 가라쿠니신사를 아시나요? 일본 나라에 있는 “동대사”라는 절은 8세기 나라시대에 백제 장인들에 의해 창건된 절이라고 문화재전문위원 김정동 교수는 말합니다. 그 동대사는 25m 높이의 거대한 남대문, 가로 57m, 세로 40m, 높이 48m의 대불전, 그 안에 모셔진 높이 15m의 대불상으로 큰 규모를 자랑합니다. 그런데 이 대불전 옆 언덕에 한반도인의 흔적인 신국사(辛國社, 가라쿠니신사)가 있음을 아시나요? 이 “신국사”라는 이름에 매울 신(辛) 자를 쓴 것은 원래 “가라쿠니(韓國)”인 것을 한반도의 흔적을 감추려고 일본어로 가라(韓)와 같은 소리의 한자 “辛”으로 바꾸었다고 《일본열도에 흐르는 한국혼》(동아일보사) 을 쓴 고 김달수 씨는 말합니다. 가라쿠니신사는 한반도에서 건너간 "한국신"을 모시던 곳으로 이 신은 역병(疫病)을 다스리는 신으로 알려졌습니다. 옛날 일본에서는 역병이 돌면 신의 노여움으로 여기고 마츠리(祭)을 지냈으며, 교토의 기온마츠리는 대표적인 것이지요. 그러나 현재 동대사 대불전 옆 언덕 가라쿠니신사는 초라한 도리이 곧 신사로 들어가는 문만이 형식적으로 서 있을 뿐 아무도 찾지 않는 버려진 신사로 남아
1636. 쉬지 않고 입을 놀려 먹어대는 것은 주전부리 경상도에서 “가시나(가시내)”라고 하는 것은 주로 젊은 여성을 업신여기거나 가까운 사이에서 부르는 말인데 어디서 유래한 말일까요? 조선 후기 학자 조재삼은 자신 쓴 책 《송남잡지》에서 이 말의 뿌리를 한자어 ‘稼産兒(가산아)’라며 그 유래를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고려 말 원나라에서 어린 여자아이를 선발해 갔는데, 가정(稼亭) 이곡(李穀)이 원으로 가서 그런 일을 하지 말도록 상소했다. 그래서 지금 시골 여자아이들을 ”가시나(稼産兒)“로 칭한다.” 곧 그는 ‘가산아(가시나)’는 가정 이곡이 구한 아이라는 것이지요. 또 그 책에는 “주전부리”에 대한 재미있는 설명도 있습니다. “술 마시는 사람이 술 마시기 전에 안주를 먹으면 술이 잘 받고 또한 크게 취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세 끼 식사 외에 시도 때도 없이 쉬지 않고 입을 놀려 먹어대는 것을 “주전부리(酒前喙)”라고 한다.” 여기서 “훼(喙)”라는 한자는 ‘새 부리’를 일컫습니다.
1635. 조선시대 서빙고의 얼음, 죄수들에게도 주었다 조선시대에는 겨울철 한강의 얼음을 떠서 동빙고와 서빙고에 보관하였습니다. 동빙고는 한강변 두뭇개, 곧 지금의 성동구 옥수동에 있었고, 서빙고는 지금의 서빙고동 둔지산(屯智山, 용산 미군기지 안) 기슭에 있었지요. 이에 대한 내용은 19세기 서울의 관청, 궁궐 풍속 등을 정리한 《한경지략(漢京識略)》의 궐외각사(闕外各司) 조항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얼음은 네 치(한 치는 약 3.03cm로 12cm가량) 이상 얼면 뜨기 시작하였지요. 얼음을 뜨고 저장하는 일은 쉽지 않았는데 얼음을 뜰 때에는 칡으로 꼰 새끼줄을 얼음 위에 깔아 놓아 사람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했습니다. 또 《세종실록》에는 장빙군(藏氷裙, 석빙고에 얼음을 저장하는 군인)에게 술 830병, 생선 1,650마리를 내려주었다는 기록이 있어 얼음을 저장하는 사람들에게 세심한 배려를 했음을 알 수 있지요. 동빙고의 얼음은 주로 제사용으로 쓰고, 서빙고의 얼음은 임금의 친척과 높은 벼슬아치들에게도 주었지만 활인서의 병자, 그리고 의금부 죄수들에게까지 나누어 주었습니다.
1634. 고추장 국제공인 이름으로 세계에서 통한다 서양인들이 땅에서 꺼내먹는 미개한 식품이라고 했던 “김치(Kimchi)”는 이제 세계 5대 건강식품의 하나로 꼽힙니다. 또 김치라는 말은 세계에서 통하는 한국어로 된 고유 이름이지요. 그런데 지난달 29일 로마에서 열린 제32차 국제식품규격위원회(CODEX) 총회에서는 한국의 전통식품 “고추장(GOCHUJANG)”이 아시아 지역 국제식품규격으로 통과되어 김치(Kimchi)처럼 세계 시장에서 한국어로 된 고유 이름을 쓸 수 있게 됐습니다. 이제 세계 시장에서 고추장은 영어 ‘Korean hot pepper paste’가 아닌 한국어 발음 ‘Gochujang’으로 불리게 되었지요. CODEX에 등록된다는 것은 국제사회에서 식품으로 공식인정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유중림이 1766년(영조 42)에 쓴 《증보산림경제》에 "메줏가루 한 말에 고춧가루 세 홉, 찹쌀가루 한 되를 넣어서 진하지 않은 간장으로 가라앉히고 나서 햇볕에 숙성시킨다."라고 쓰여 있어 요즘과 비슷한 고추장이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참고 : ≪이규태의 600년 서울≫, 이규태, 조선일보 출판국
1633. 동대문 밖 청백리집 우산각을 아시나요? “일산(日傘)이 없는 집에서는 장마철을 어떻게 견디어 내나?” 이 말은 조선조 청백리로 소문난 유관(柳寬) 선생이 집안에 비가 새자 아내에게 건넨 말입니다. 요즈음 장마철입니다. 엊그제는 굵은 장대비가 내리더군요. 유관선생이 과거 급제 때 임금께 받은 일산을 비가 새는 방안에서 펼친 모습이 그려집니다. 유관선생은 고려 말·조선 초 문신으로 조선의 개국공신이 되어 대사성, 대사헌 등을 지낸 분입니다. 그런 그가 성 밖 후미진 곳에 돌담은커녕 나무 울타리도 없고 물론 대문도 없는 두어 칸 오두막집에 살면서 나갈 때면 말을 타지 않고 짚신에 지팡이를 짚고 나갔다가 집에 돌아오면 맨발에 베옷을 걸치고 남새밭(채소밭)을 가꿨다고 합니다. 이렇게 청빈하게 살았던 유관이 살던 집을 뒷날 사람들은 “우산각(雨傘閣)”이라 불렀습니다. 또 먼 훗날 이 집을 물려 살았던 지봉유설의 이수광은 우산을 펴 근근이 비를 가렸다는 뜻으로 “비우당(庇雨堂)”이란 이름을 붙였다고 하지요. 이 청빈한 선비가 살던 곳은 지금 서울지하철 6호선 창신역 근처라고 하는데 이곳을 지나갈 때마다 유관 어른이 생각나는 것은 그분이 높은 관직을 살았기 때문
1632. 며느리와 관련된 들꽃 이야기 예전엔 화장지가 따로 없어서 호박잎을 따서 밑을 씻었는데 그 호박잎도 아까워서 며느리에겐 쓰지 못하게 했습니다. 가시범벅인 식물을 가리키며 "너는 저 걸로 닦아라."고 해서 이름을 얻게 된 며느리밑씻개. 시어머니의 가시 돋친 구박을 다 받아내며 참고 살았을 이 땅 며느리들의 서글픈 인생살이가 훤히 보입니다. 예쁜 며느리배꼽에 시샘이 나서 언제든 할퀼 것처럼 가시가 돋쳐서 며느리배꼽이라고 이름 붙여준 것은 애교스러운 셈입니다. 또 밥풀 두 개를 물고 있는 것 같은 꽃며느리밥풀꽃을 아시나요? 가난한 집에서 부잣집으로 시집 온 며느리가 시아버지 제삿밥이 뜸이 잘 들었나 밥풀 몇 알 맛보다 시어머니에게 들켰습니다. 시어머니는 시아버지 밥을 넘봤다며 때려서 며느리를 쫓아냈고 갈 곳 없는 며느리는 기진해서 죽었지요. 뒤늦게 묻어준 묏자리에서 피어난 꽃이 바로 밥풀을 물고 있는 듯 한 꽃며느리밥풀꽃입니다. 참고 : 다음 들꽃글방(http://cafe.daum.net/61wildflower)
1631. 국보 경천사십층석탑을 지켜낸 한글학자 헐버트 1907년 일본 궁내부대신인 다나카는 황태자 순종 결혼식에 축하사절로 참석했다가 개성에 있던 경천사십층석탑을 85명의 일본군을 보내 뜯어서 우마차에 실어 일본으로 가져가 버렸습니다. 이를 안 한국문명화와 한국의 국권수호를 위해 온몸을 불사른 헐버트(Homer B. Hulbert, 교육자, 역사학자, 한글학자, 언론인, 선교사, 독립운동가) 박사는 즉시 현장을 답사한 뒤 ‘Japan Chronicle’과 ‘뉴욕포스트’ 등에 기고하고 만국평화회의가 열리고 있는 헤이그에서도 이 사실을 폭로했지요. 이런 헐버트의 노력으로 국보 제86호 경천사석탑을 되돌려 받을 수 있었습니다. 헐버트는 ‘사민필지’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교과서를 펴내면서 한글애용을 적극 주장한 한글학자이기도 했지요. “나는 웨스트민스터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한다.”라고 평소 소원한 대로 그는 서울 양화진에 묻혔습니다.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는 해마다 8월 5일 양화진묘지에서 헐버트박사 추모식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