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5. “땡깡부린다”는 간질을 뜻하는 일본어 “뗑깡”을 쓴 것 “17개월 된 아들둥이 엄마입니다. 아이들이 크니 고집이 생겨 땡깡을 부리면서 우는 일이 종종 생기네요. / 글쓴이:707우영우석”라는 글이 한 인터넷 카페에 보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무심코 “땡깡부린다”라는 말을 씁니다. 하지만, 이 “땡깡부린다”라는 말은 일본어에서 왔다고 합니다. 일본말 “癲癇(tenkan, てんかん)”은 “전간” 곧 간질을 말하는데 이것은 이라고 읽는다지요. 그것을 한국인들이 가져다 간질, 발작하듯 억지, 행패를 부린다는 뜻으로 “땡깡”+부리다 꼴로 쓰는 것이라고 합니다. 간질은 갑자기 쓰러져 의식을 잃고 쓰러지며 팔다리가 떨리는 병을 뜻하는데 이 일본말 “뗑깡”을 써서 사랑하는 자기 자식에게 “땡깡부리는 아들”이라고 해야 할까요? 대신 로 써야 합니다. “내가 일본어를 접하기 전까지는 가 일본말인지 몰랐지만 일본어를 공부하다가 이것이 일본말의 라는 뜻임을 알고 기겁했었다. 는 말을 어렸을 때 들으면서 자란 기억이 나는데 요즈음도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쓰고 있어서 일본어를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강한 책임감을 느낀다.”라고 한국외대 연수평가원 이윤옥 교수는
1584. 돌로 만든 악기 특경을 아시나요? 국악기는 만든 재료에 따라 금부(金部)·석부(石部)·사부(絲部)·죽부(竹部)·포부(匏部, 바가지)·토부(土部)·목부(木部)·혁부(革部, 가죽)로 나눕니다. 그 가운데 석부(石部)는 돌을 깎아 만든 악기로 편경(編磬)과 특경(特磬)이 있습니다. 이중 “특경(特磬)”은 돌로 만든 “ㄱ"자 모양으로 된 경(磬)을 16개나 단 편경과 달리 1 개만을 달아 뿔망치 곧 각퇴(角槌)로 쳐서 소리 냅니다. 그 음색은 맑고 청아한데, “가경(歌磬)”이라고도 부릅니다. 특경은 우리 음악의 기본음인 “황종(黃鐘)” 소리를 내지요. 그리고 음악을 시작할 때 치는 특종(磬鐘)과 달리 끝날 때 치는 악기입니다. 특경의 재료는 경기도 남양의 경돌을 캐어다가 만드는데, 경돌은 가로무늬가 있거나 흠이 있는 것은 못 쓴다고 합니다. 조선왕조 세종 때부터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이 악기는 지금 종묘제례악과 문묘제례악에 쓰입니다.
1583. 춤·음악·놀이로 죽은 사람을 보내는 진도다시래기 중요무형문화재 제81호로 지정된 전남 진도 장례풍습 “진도다시래기”를 아시나요? “진도다시래기”는 출상(出喪) 전날 밤 초상집에서 상두꾼과 놀이패들이 벌이는 민속놀이인데 춤·음악·놀이로 죽은 사람을 보내는 것이지요.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면서 노는 놀이로 죽음을 슬픔으로만 받아들이지 않고 새로운 세계로 승화시키는 놀이라고 합니다. 진도다시래기는 다섯 마당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째 마당은 가상제놀이로 가짜 상제가 나와 상여꾼들과 농담을 주고받지요. 둘째 마당은 봉사인 거사와 사당 그리고 중이 나와 노는데, 진도다시래기의 중심이 되는 굿입니다. 셋째 마당은 상여꾼들이 빈 상여를 메고 만가를 부릅니다. 또 넷째 마당은 묘를 쓰며 부르는 가래소리를 하면서 흙을 파는 시늉을 합니다. 마지막 다섯째 마당은 뒤풀이로 놀이패들은 후한 대접을 받습니다. 이렇게 가신 이의 넋을 기리는 아름다운 문화는 지방마다 있었을 터인데 이제는 "진도다시래기"처럼 무형문화재로만 남아 그 명맥을 유지하는 게 안타까울 뿐입니다.
1582. 과거시험의 심각한 부패, 거벽과 사수 조선 말기 과거시험은 심각한 부패로 물들었습니다. 특히 부유한 사대부들은 즐기며 한가롭게 노느라 평소 붓을 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가난한 선비를 집에 데리고 있다가 과거시험이 있으면 시험장에 데리고 들어가 대신 글을 짓거나 쓰게 했습니다. 요즘의 대리시험과 같은 것이지요. 이때 글을 짓는 사람은 거벽(巨擘, 학식이나 어떤 전문적인 분야에서 뛰어난 사람), 글씨를 쓰는 사람은 베껴 쓰는 사람이라는 뜻의 사수(寫手)라 했습니다. 그들은 드러누워 조보(朝報) 곧 승정원의 발표사항을 필사해서 배포하는 관보를 들춰보다가 과거를 연다는 기사를 보면 “거벽과 사수는 어디 있느냐?”라고 소리쳤다고 하지요. 그래서 글자 한 자 안 읽은 부유한 집의 아들들이 과거시험에 합격했다고 합니다. 당시 “공자가 시관을 하고 석숭(중국 서진의 갑부)이 장원으로 뽑혔다.”라는 노래가 불렸습니다. 참고 : ≪매천야록≫, 황현 지음, 허경진 옮김, 서해문집
1581. 소변의 토박이말을 아시나요? 우리는 보통 대변 곧 똥 누는 일을 점잖게 “뒤를 본다.”라고 합니다. 똥구멍의 자리가 뒤에 있기 때문입니다. 화장실을 “뒷간”이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소변의 우리 토박이말 오줌을 점잖게 이르는 말은 무엇일까요? 똥 누는 것과 달리 오줌 누는 것은 “앞을 본다.”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대신 “소마”라는 말을 씁니다. 곳에 따라서는 소피 또는 소매라고도 합니다. “내가 급한 김에 눈에 띄는 대로 공중변소에 들어가 허리춤을 풀고 소마를 보고 있는데, 옆에서 일을 보던 작자가 힐끗힐끗 내 거시기를 넘겨 보는 게 아닌가.”라고 쓰기도 하지요. 한편, 거름으로 쓰려고 오줌을 받아 모아두는 그릇은 “소매구시”입니다. 또 ‘소마’는 똥과 오줌이 섞인 ‘분지’를 뜻하기도 하는데, 어떤 지방에서는 이를 퍼내는 바가지를 ‘소마쪽박’이라고 부릅니다.
1579. 남녘의 앉은뱅이술 소곡주, 북녘엔 감홍로주 우리 겨레의 전통술 중에는 맛과 향이 뛰어나 한번 맛을 보면 자리에서 일어날 줄 모른다고 하여 일명 '앉은뱅이술'이라고도 부르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 앉은뱅이술로 남한에선 충청남도무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된 한산 소곡주를 이릅니다. 소곡주는 조선시대 과거길에 오른 선비가 한산지방의 주막에 들렀다가 소곡주의 맛과 향에 사로잡혀 한두 잔 마시다가 과거날짜를 넘겼다는 일화가 있지요. ,br>그런가 하면 북녘에선 평양 대동강 좋은 물로 빚는다는 감홍로주(甘紅露酒)가 앉은뱅이술이라고 합니다. 감홍로주는 술을 빚을 때 약초의 일종인 지치(일명 지초)를 넣어 붉은빛을 우려낸 뒤 꿀을 섞어 달콤한 맛이 나도록 한 술입니다. 여기에 각종 약재를 첨가해 약주로 마시기도 했지요. 술의 빛이 붉고 맛이 달아 이름을 감홍이라 붙였다는데 북한이 선정한 3대 명주라고 합니다.
1578.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과 심청이의 죽음 "선인(船人)들을 따라간다. 끌리는 치맛자락을 거듬거듬 걷어 안고, 비같이 흐르는 눈물, 옷깃이 모두가 사무친다. 엎어지며 넘어지며, 천방지축(天方地軸) 따라갈제…." 이것은 심청가 중 심청이 뱃사람들을 따라 인당수로 죽으러 가는 대목인데 이로써 심청은 죽음을 택했고, 그 죽음을 통해 예수처럼 다시 사는 영광도 누렸습니다. 세상에는 논개, 안중근처럼 나라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린 사람도 있으며, 단종이나 김구처럼 정적에게 죽임을 당한 사람도 있습니다. 또 아버지에게 죽은 사도세자도 있으며. 선조, 정조, 고종처럼 독살당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조선의 화가 최북처럼 술에 취해 눈밭에서 얼어 죽은 사람도 있지요. 이틀 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노 전 대통령은 죽음으로써 주변 사람들의 모든 고통을 혼자 짊어지고 가려 했는지도 모릅니다. 슬픈 일입니다.
1577. 남명 조식, 퇴계에게 충고하다 “요즘 공부하는 자들을 보건대 손으로 물 뿌리고 빗자루질하는 예절도 모르면서 입으로는 천리를 말하여, 헛된 이름이나 훔쳐서 남들을 속이려 합니다. 퇴계선생 같은 어른이 꾸짖어 그만두게 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충분히 억제하고 타이르심이 어떻습니까?” 위 글은 퇴계 이황과 함께 16세기 영남학파의 양대 산맥으로 불렸던 남명 조식(1501~1572)의 ≪남명집≫ “퇴계에게 드리는 편지”에 나오는 것입니다. 이 편지는 당시 퇴계와 고봉 기대승 등에 의해 주도되고 있었던 성리학 이론논쟁의 문제점을 지적하고자 보낸 남명의 충고편지입니다. 남명은 수양을 바탕으로 과감하게 현실의 부조리와 모순을 극복해 가는 실천적인 선비 학자였다는 평가입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정인홍, 곽재우, 김면 등 남명 문하에서 최대의 의병장이 배출된 것은 남명이 어떤 사람인지를 잘 보여주는 예지요.
1576. 고종임금의 비밀국새, 황제어새 고종은 대한제국을 세우면서 황제의 나라에 걸맞는 새로운 도장을 만들었습니다. 이때 만든 국새와 어보는 대한국새(大韓國璽), 황제시새(皇帝之璽), 황제지보(皇帝之寶, 3과), 칙명지보(勅命之寶, 2과), 제고지보(制誥之寶), 시명지보(施命之寶) 총 9과입니다. 이 가운데 “대한국새”만이 외교문서에 사용하는 공식적 국새이고 다른 인장들은 모두 국내용 행정문서에 사용되는 어보이지요. 이 외에도 “황제어새(皇帝御璽)”라는 비밀국새가 있습니다. 최근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재미교포로부터 사들인 이 국새는 당시 만들었던 기록이 보이지 않지만,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유리필름에 실물의 모습과, 당시 고종이 서구열강에 보낸 친서에 찍혀진 사례가 다수 남아 있다고 합니다. 대한제국은 풍전등화와 같은 운명 앞에서 공식적인 도장을 쓸 수 없었지만 이 황제어새는 고종이 비밀리에 쓴 국새로서 역사적 가치가 큽니다.
1575. 조선시대 우유는 임금이나 마시는 귀한 음식 "태복(太僕, 궁중의 수레와 말을 관리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아)의 우유죽은 임금께 올리는 것인데, 낙부(酪夫, 우유를 짜는 일을 맡은 이)가 그릇을 들고 가서 그 집에서 끓이기를 어전임금께 올리는 것처럼 하며, 자녀와 첩 그리고 종들도 싫증이 나도록 먹었다." 이 내용은 1545년에 일어났던 을사사화(乙巳士禍)에서 화를 입은 여러 사람의 전기를 모은 책인 ≪을사전문록(乙巳傳聞錄)≫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명종이 임금이었던 시절 큰 권력을 가졌던 영의정 윤원형은 임금이 즐겨 먹는 우유죽을 집에서 만들어 먹었다가 탄핵의 대상이 되어 귀양을 당할 뻔하기도 했습니다. 고종 1년(1901)에는 임금이 마실 우유죽의 원료인 우유를 제때에 구하지 못한다고 담당자가 파면당할 뻔 한 일도 있었습니다. 그만큼 우유는 조선시대 임금이 보양식으로나 마실 정도로 아주 귀한 것이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