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여성독립운동가의 삶을 추적하여 책을 쓰는 과정에서 도움을 받고 있는 자료는 국가보훈처 기록이다. 국가보훈처→보훈인물→독립유공자로 들어가면 누구라도 국가보훈처가 올린 독립유공자를 검색할 수 있다. 이 자료를 볼 때 마다 느끼는 것은 독립유공자에 대한 호칭이 통일성이 없이 제각각으로 표기되고 있다는 점이다. 다음 문장을 보자.(호칭 생략) 그녀는 공주 영명학교에서 수학한 뒤..........................................유관순 그는 러시아 헌병대에서 려순에 있는 일본감옥으로.....안중근 일본군과 싸우다가 그녀는 삼대독자인 유복자를............남자현 선생의 집안은 서울의 명문양반가였으나 고조부 때.....김마리아 백범은 그 자를 발견하자 격분을 참을 길 없어................ 김구 이런 문제는 독립유공자를 기술하는 사람에게 호칭에 관해 일정한 지침을 내려주면 해결 될 일이다. 사실 기자는 국가보훈처의 독립유공자 기술 부분에 호칭이라든지 주어의 불분명한 기술, 비문(非文) 따위가 거슬려 ‘유공자 기술 지침을 공개해 달라’는 문의를 한 적이 있다. 그러나 무슨 까닭인지 ‘공개할 수 없다’는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인천문화재단 인천아트플랫폼(관장 이재언)은 3·1절 100주년 기념전시 《잊혀진 흔적》전을 2월 28일(목)부터 3월 31일(일)까지 인천아트플랫폼 B동 전시장과 윈도우갤러리에서 연다. 《잊혀진 흔적》은 3·1절 100주년을 기념하여 진행되는 사진전으로, 일제강점기 항일투쟁과 민족 문화 수호를 위해 만주로 이주한 조선인과 그들의 후손인 조선족의 삶을 조망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1990년대 초부터 20년간 중국에서 항일운동의 흔적을 수집하고 독립운동가 후손과 재중동포의 모습을 찍어온 사진가 류은규의 작품 70여점과 아카이브 250여점을 선보인다. 작가는 과거의 시간과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조선족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다큐멘터리 사진을 찍었다. ‘잊혀진 흔적’은 점차 잊혀가는 만주 항일투쟁의 시간과 그 공간 속의 주인공들을 다시금 회상하며 민족의 미래상을 그리는 데 목적을 둔 전시이다. 전시는 ‘역사의 증언자들’, ‘그리운 만남’, ‘80년 전 수학여행’, ‘삶의 터전’, ‘또 하나의 문화’의 5부로 구성된다. 1부 ‘역사의 증언자들’은 역사의 현장을 목격한 이들의 사진을 다룬다. 1905년 을사늑약에 이어 1910년 경술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2월, 지금 일본은 곳곳에 활짝 핀 매화향기로 가득하다. 매화꽃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학문의 신으로 추앙 받는 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道真, 845~903)가 그다. 동풍이 불거든 너의 향기를 보내다오. 매화여 ! 주인이 없다 하여 봄을 잊지 말아라. 매화를 지극히 사랑한 문인이자 헤이안시대(平安時代, 794~1185)의 관리였던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는 다섯 살에 와카(わか, 일본 고유의 시)를 짓고 열 살부터 한시를 척척 짓던 신동이다. 교토의 기타노텐만궁(北野天満宮)과 후쿠오카 다자이부 텐만궁(太宰府天満宮)에서 학문의 신이자 천신(天神)으로 받들어지고 있는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는 그 조상이 신라계여서 더욱 우리의 관심을 끈다. 그 집안을 보면 신라왕자 천일창→ 일본 스모의 조상 노미네(野見宿禰)→하지(土師)→스가와라(菅原) 씨로 성을 바꿔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일본인들 사이에 학문의 신으로 추앙받는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는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간케분소(管家文草)》, 《간케코슈(管家後集)》가 있으며 역사 편찬에도 참여해 《루이주코쿠시(類聚國史)》, 《일본삼대실록(日本三代實錄)》에도 관여하는 등 58살의 삶을 치열하게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 서울은 3·1운동의 시작점이자 중심지다. 인사동에서 시작된 만세는 탑골공원을 거쳐 종각에 이르렀고, 덕수궁, 서울역, 창덕궁 앞을 거치면서 서울 전역에서 울려 퍼졌다. 이 함성은 곧 8도로 퍼졌고, 나라밖 여러 나라로 확산되었다. 그날, 서울은 ”만세도시“였다. 서울의 골목과 길들은 ‘만세길’이었다, 서울 사람들은 거대한 ‘만세인’들이었다. 3.1운동으로부터 100년이 지난 2019년, 대한민국 수도 서울에서 다시 한 번 그날의 감격이 재현되고, 나라를 빼앗겼던 뼈아픈 역사와 3.1운동의 정신을 기억할 수 있는 기념공간들이 시민들을 맞는다. 3.1운동의 발상지인 삼일대로 일대(안국역~종로2가)는 시민들이 일상에서 쉬며 3.1운동의 정신을 되새길 수 있는 역사적 상징가로로 다시 태어난다. 독립선언문이 보관됐던 ‘독립선언문 배부 터’(현 수운회관 앞), 3.1운동 이후 민족운동 집회장소였던 ‘천도교 중앙대교당’ 등 5개 거점별로 쉼터 같은 시민공간 조성이 완료됐다. 앞서 작년 9월 독립운동 주제역사로 변신을 완료한 지하철 안국역에는 기미독립선언서가 새겨진 ‘100년 계단’(지하 2~3층)이 새롭게 조성돼 3월 시민 발길을 기다린다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어제 17일(일) 낮 2시부터 도쿄 릿쿄대학 예배당에서는 윤동주 시인 서거 74년을 맞아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한 시인 윤동주(1917~1945) 추도식이 열렸다. 릿쿄대학(立敎大學)은 북간도 출신인 윤동주 시인이 1942년 2월 말 일본에 건너가 10월까지 8달 동안 이 대학 문학부 영문과 학생으로 공부하던 곳이다. 이후 윤동주는 교토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으로 편입하기까지 이 대학 캠퍼스에서 ‘쉽게 씌어진 시(1942.6.3.)’를 비롯하여 5편의 시를 남겼다. 이날 릿쿄대학 예배당 열린 “시인 윤동주와 함께(詩人尹東柱とともに) 2019” 추도회는 시인 윤동주를 기념하는 릿쿄 모임(詩人尹東柱を記念する立教の会, 대표 야나기하라) 주최로 순수한 일본인들의 추도행사였다. 2008년부터 시작된 추도회는 올해로 12년째를 맞이하며 이날 행사는 2부로 나뉘어 1부는 김대원 사제(司祭, 릿쿄대학 성직자)의 집전으로 기도회와 자화상 등 시 7편의 시낭송의 시간을 통해 청년 윤동주 시인의 삶을 되새기는 소중한 시간을 가졌다. 3시부터 시작된 2부 행사는 가수 윤형주 씨의 ‘이야기가 있는 작은 음악회’ 시간으로 이어졌다. 윤형주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어제 16일(금)은 윤동주(1917-1945) 시인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한지 74년을 맞는 날이다. 윤 시인의 순국날을 기려 윤동주 시인이 유학했던 교토 도시샤대학과 하숙을 했던 교토조형예술대학 다카하라 캠퍼스에서는 각각 윤동주 시인을 추모하는 추도회가 열렸다. 도시샤대학(16일)과 교토조형예술대학(15일)에서 각각 거행된 윤동주 추도회에는 윤동주 시를 완역한 시인 우에노 미야코 씨가 직접 참여하였으며 기자와의 전화 통화로 상세한 추도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16일 오후 1시 30분 도시샤대학 이마데가와 캠퍼스에서 열린 추도회는 ‘윤동주를 기리는 모임’, ‘도시샤코리아동창회’ 주최, 도시샤코리아연구센터 후원으로 주오사카대한민국 오태규 총영사, 양호석 영사를 비롯하여 도시샤교우회 나카무라 유우이치 부회장 등 100여명의 참석자들이 헌화, 시낭송 등을 통해 청년 윤동주 시인의 순국의 의미를 되새겼다. 추도회를 마친 뒤에는 노가미 다츠히코(野上龍彦, 전 치쿠마출판 편집장) 씨의 ‘청년시인 윤동주’에 대한 강연이 있었다. 노가미 씨는 윤동주 시인의 작품을 소개한 이바라기 노리코 시인의 글을 일본 교과서에 실어 일본인들이
[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꽤 오래전 일이다. 어린이 책을 전문으로 만드는 ‘상수리’라는 출판사 이름이 찍힌 명함을 건네며 나를 찾아 온 사람이 있었다. “어린이들을 위한 여성독립운동가 관련 책을 만들려고 하는데 함께 책을 만들 수 있느냐?”는 제안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그 무렵 나는 여성독립운동가를 기리는 책인 《서간도에 들꽃 피다》 3권 작업을 마칠 때였다. (2019년 1월 10권 완간) 뜻은 아주 좋으나 어린이를 위한 책을 집필할 시간이 없어 정중히 사양하고 대신 어린이 책에 들어갈 여성독립운동가를 추천해주는 것으로 마무리한 적이있다. 그 뒤 오래지 않아 이해하기 쉬운 내용으로 풀어 쓴 글과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그림을 곁들인 《나는 여성독립운동가입니다》 라는 책이 나에게 배달되었다. 2013년 2월의 일이다. 김일옥 작가가 쓰고 백금림 화가가 그린 책을 드는 순간 무척 설레고 기뻤다. 이 땅에 어린이를 위한 여성독립운동가 책의 등장은 우리 모두가 함께 축하할 일이기 때문이다. 독립운동을 하고도 전혀 사회의 조명을 받지 못한 여성독립운동가를 알리는 일을 상수리 출판사에서 해냈구나 싶어 울컥 눈물이 났던 기억이 새롭다. 이 마음은 지금도 유효하다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애국지사 노순경의 가족역사전시회’는 묻혀있는 가족들의 독립운동사를 알리기 위해 마련한 전시회입니다. 3.1만세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100돌 기념으로 여는 이번 전시회는 원주시립중앙도서관 전시실에서 열흘간 열 예정입니다. 아무도 챙겨주지 않으니 저희라도 챙겨야하는 것이지요. 개관식은 특별히 하지 않고 2월 20일부터 28일까지 자료 전시를 합니다.” 간호사 출신의 여성독립운동가인 노순경 애국지사의 외손자인 김영준 선생은 전화통화에서 이번 전시회에 대한 취지를 그렇게 말했다. 노순경 지사의 아버지는 노백린 장군이다. 가족의 역사라고는 했지만 이번 전시회는 노순경 지사(대통령표창. 1995), 노순경 지사의 아버지 노백린(건국훈장 대통령장. 1962) 장군, 노순경 지사의 시아버지 박승환(건국훈장 대통령장. 1962), 노순경 지사의 오라버니 노선경(건국훈장 애족장. 1990), 동생 노태준(건국훈장 독립장. 1968) 등 온 집안이 독립운동을 한 가족이다. “우리 집안의 어르신들인 이분들은 일제침략기 굴곡진 역사에 굴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를 극복하고 헌신과 희생으로 나라사랑을 실천한 분들입니다. 이는 한 개인의 업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 / 오곡백화가 만발하게 피었고 종다리 높이 떠 지저귀는 곳 / 이 늙은 흑인의 고향이로다 내 상전 위하여 땀 흘려가며 / 그 누른 곡식을 거둬들였네 내 어릴 때 놀던 내 고향보다 / 더 정다운 곳 세상에 없도다. 이는 윤동주 시인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자주 불렀던 노래다. 2년 전 필자는 후쿠오카 형무소 담장에서 마나기 미키코 씨와 이 노래를 불렀다. 마나기 미키코 씨는 후쿠오카지역에서 윤동주 시인을 기리는 모임인 <후쿠오카・윤동주 시를 읽는 모임(福岡・尹東柱の詩を読む会)>의 대표다. 철창 속에서 머나먼 북간도의 고향땅을 그리며 ‘고향으로 보내달라’고 절규했을 윤동주 시인이 모습이 떠올라 눈시울이 뜨거웠던 기억이다. 오는 2월 16일은 윤동주 시인이 27살로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삶을 마감한 날이다. 한글로 시를 쓴다는 이유를 들어 제국주의 일본은 젊은 청년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러나 앞날이 창창한 꿈 많던 청년의 죽음은 일본 땅 전역에서 서서히 부활하고 있다. 윤동주 시인이 숨져간 곳에 사는 사람들은 <후쿠오카・윤동주 시를 읽는 모임(福岡・尹東柱の詩を読む会)>를 통해 윤동주 시인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오늘은 선생님 보따리에 무엇이 들어 있을까요? 한글문화연대 대표 이건범이 주시경 선생님께 올립니다. ‘주보따리’ 주시경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는 한글문화연대라는 시민단체의 대표 이건범입니다. ‘한글’, 선생님께서 지으신 이름이죠? 1908년에 만든 <국어연구학회>의 이름을 1911년에 <배달말글몯음>으로, 1913년에 <한글모>로 바꾸셨던 걸로 압니다. 1910년 경술국치 뒤로 ‘국어’란 곧 일본어였으니 ‘국어’라는 말을 더 이상 사용할 수는 없었겠지요. 그때 처음 사용하신 ‘한글’이라는 말이 세종대왕께서 만든 훈민정음의 새 이름으로 자리를 잡은 지는 꽤 오래되었습니다. 선생님 돌아가신 뒤 제자들이 꾸려간 <조선어학회>에서 1933년에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제안하고 ‘조선말 큰 사전’ 편찬에 적용한 데에서 알 수 있듯이, 1920년대 이래 ‘한글’이라는 이름은 학계와 민간에서 두루 쓰였습니다. 1926년에 처음 기린 한글날은 그 이름이 ‘가갸날’이었지만, 1928년부터는 ‘한글날’로 바뀌었고, 조선어학회의 동인지 이름도 <한글>이었습니다. 그 이름을 지금 저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