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강릉 대관령 옛길을 오르다 보면 유서깊은 대관령 성황사가 있다. 그 유래가 오래되고 특이한 것은 물론 세계유산으로 저정된 강릉의 단오제가 시작되는 곳이기도 하여 근래더욱 유명해졌는데, 이곳에는 신라 후기 불교 선종의 고승으로 구산선문의 하나인 굴산사파를 개창했던 범일국사를 모시고 있어 더욱 특이하다 범일국사는 신라 후기 헌덕왕 2년(810) 강릉에서 태어나 진성여왕 3년 (559년) 굴산사에서 입적한 고승이다. 범일국사는 15살에 출가하여 경주에서 구족계를 받고 831년 당으로 유학을 떠나 당시 선풍이유행하던 당나라에서 보철선사의 선법을 계승하고 문성왕 9년(847년) 귀국하여 자신의 고향인 강릉지방에 대찰 굴산사를 창건하였다. 그는 굴산사와 함께 삼척의 삼화사, 양양의 낙산사, 강릉의 신복사 등을 창건 또는 중창하였고 당시 신라왕실이 신봉하던 교종과 대립하는 위치에서 지방호족들의 정신적구심점이 되어 선종을 키워나갔다. 당시 큰 절이었던 굴산사는 국내 가장 큰 당간지주만이 서있을뿐,지금은 전각하나 없는 빈터로 논밭으로 변해 버렸으며, 그 큰 굴산사지 당간지주를 보면서 굴산사의 규모를 짐작할 뿐이다. 그런데 불교의 고승이 대관령의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 보물 136호 신라시대 경주 남산의 동쪽에 있던 보리사의 석불좌상이다. 전체 높이는 4.36m 이고, 석불좌상의 높이는 2.44m로 당당한 규모의 석불이다. 연꽃으로 장식된 연화대좌에 왼손은 선정인((禪定印,양손을 펴서 위아래로 포개고, 엄지손가락 끝을 서로 맞댄 손 모양), 오른손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부처가 악마를 항복시키는 손 모양)을 한 석가모니불로 불상의 상호(얼굴을 높여부르는 말)는 온화한 미소를 띠고 있으며, 광배에는 연꽃줄기가 늘어져 있고, 사이사이에 연꽃이 피어있으며 작은 불상들도 새겨져 있다. 아침 햇살이 비칠 때 잠시 석불의 상호가 잘 보이는데, 마침 시간을 잘 맞추어 상호에 비치는 미소까지 볼수 있어 무척 행운이었다. 광배의 뒷면에는 약사여래불이 선각으로 새겨져 있으나, 햇살이 비치지 않아 잘 보이지 않았다. 모신 세월 속에서도 온전한 모습으로 노천에 그대로 있으면서도 손상되지 않아 무척이나 다행스럽다. 경주시 배반동에 현재도리사가 관리하고 있으며 도리사 바로 옆에 야외불로 있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기자] 석남사(石南寺)는 울산의 외곽가지산(迦智山)에 깃들어있는 절이다. 석남사의 창건은 신라 후기헌덕왕(신라제41대憲德王 서기809-826) 때 중국의 선종을 받아들여 신라땅에 최초로 선풍을 일으킨 도의국사가 신라땅에 그 선풍을 일으킬 명당을 찾던 중 이곳 가지산에서 터를 찾아 세운 신라 구산선문 최초 가람이다. 도의국사는 당시 선불교를 꽃피운 당나라에 들어가 지장스님의 제자가 되어 그의 불법을 물려받고 "도의"라는 이름을 받았다. 이후 도의는 헌덕왕 때인821년 신라로 돌아와신라에 중국에서 크게 유행한 선종을 받아들여 한국 선종의 시조가 되었다. 당시 신라는 화엄종을 비롯한 부처의 가르침믈 책으로 기록한 것을 최괴의 교재로 공부하는 교종이 번성하고 있었다. 따라서 참선을 통하여 부처님처럼 깨달음을 얻는다는 선종에 대하여는 낮선 상태였기에 선종에 대한 불교계의 이해가 깊어질 때를 기다리며잠시 강원도 양양의 진전사에 들어가 참선 수도하며 있다가, 3년 뒤 이곳 울산으로 내려와구산선문 중 최초의 가람인 가지산파를 창립하고석남사를 창건하여 신라 땅에 선종사찰을 개창하고 제자들을 양성하여 선종이 한국땅에 뿌리를 내리게하였다 석남사에는 도의국사의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동해 거친 파도가 몰아치면 거친 화산암에 부딛혀부서지는 파도가 포말이 되어 바다의 역동성을 느낄 수 있는 곳이 경주 감포앞바다이다. 하지만 바람이 없어 역동적인 바다의 모습을 볼 수 없어 또 아쉬운 날이었다. 감포에 사는 갈매기를 불러모아먹이를 찾아 날아드는 갈매기떼 모습을 멋지게 담고자 하였으나, 이 또한 쉽지가 않았다. 이른 아침 아름다운 해와 파도와 갈매기를 상상하며 나섰지만, 결과는잠만 설치고 일어나 별 성과도 없이 촬영하고 보니, 아직 차가운 감포에서바람을 맞은 하루 였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석가모니 부처님이 인도에서 도를 이루어 생겨난 불교는 인도에서 힌두교와 경쟁하며 성장하고번성하며 세를 얻어갔다. 그런불교는 인도를 벗어나 외국으로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그 최초의 전파지는 다름 아닌 인도의 아래 작은 섬스리랑카였다. 부처님 입멸후 300년 뒤 인도대륙은 마우리아왕조의 통일 대왕이었던 아쇼카왕이 인도대륙을 통일하였다. 여러 수십개의 작은 나라들로 이루어졌던 인도를 최초로 통일한 아쇼카왕은 통일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전쟁을 치를 수밖에 없었고, 그 전쟁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을 죽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살생으로 인간적고민과 갈등을 하였다. 그런 고민속에 부처님의 유적을 발굴하고 그 유적속에서 부처님이 예언한자신의 현재 모습이 부처님과의 전생인연과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신의 현생 모습은 부처님 당시 자신의 과거생에 모래로 지은 밥을 부처님께 바쳤던 선한 인연으로 오늘날 자신이 왕이 되었다는 예언을 알게 된 것이다. 자신의 전생과 현생의 인연을 알게된 아쇼카왕은 피비린내 나는 전쟁으로 죽어갔던수많은 사람들의 원한도 씻고, 다시는 전쟁이 없는 나라를 만들기 위하여 불교에 귀의하였고, 자신이 믿게 된 불교를 인도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입춘, 우수가 지나고 봄이 찾아온다. 우수에는 대동강물도 풀린다고 하지만, 전국은 꽃샘추위로 움추러 들었다. 그러나해 주위를 돌고 있는 지구가 그 축이 바뀌지 않는 이상 계절은 어김없이 찾아올 수 밖에 없다. 한국에서 가장 먼저 봄을 느낄 수 있는 곳은 남쪽나라 제주도다. 봄을 느낄 수 없이 추운 꽃샘추위 속에서도 제주는 이미 봄을 맞이하는 듯, 봄꽃 유채가 노랗게 피어나고 있었다. 이제 곧 그 봄은 바다를 건너 뭍으로 올라올 것이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싱가포르는 2차세계대전 이후 독립된 작은 도시국가이다.2차 세계대전 이후 버려진 땅이었떤 이곳은 말레이지아 반도의 끝에 위치하여 말레이지아가 자신들의 땅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여 별도의 도시국가가 생겨나게 된 것이다. 이곳에는 여러 문화속에 살던 사람들이 몰려들어 통일된 사상이 없이 혼재하여 하나의 나라로 다스리기에는 여러모로 어려운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그런데 이곳이 싱가포르를 통치한 한 정치가의 노력으로 이제는아시아의 다양한 문화가 혼합하여 공존하는 곳으로 자리잡았다. 싱가포르는 지역적으로 인도와 중국 그리고 인도네시아의 사이에 있어, 고대의 아시아 문화가 모조리 융합되어혼재하는 것이다. 싱가포르는 2600년 전에 성립된 불교와 흰두교 유교등 아시아의 문화와 이후 들어온 근세에는기독교와 이슬람교까지 다양한 종교들이 상호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기자는 이중에 티벳에서 번영하던 티벳불교사원으로 유명한 석가사를 방문해 보았다. 티벳불교는 중국의 불교와는 또 다른 모습으로 대승불교와 라마불교의 혼재된 듯한 모습이었다. 같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긴 하지만, 우리가 늘 보아오던 한국의 절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의 전각에 우선국가가
								[우리문화신문=최우성기자] 조선말 누란의 위기에 살았던 암행어사 이건창. 그는 1852 강화도에서태어나 1898년 까지 그리 길지 않은 삶을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당시 세도정치 하에서 각지방의 수령들에 시달리던 때, 관리들의 비행을 추적하여 이들을 벌주는 일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그의 행적을 살펴보면 1875년 충청도 암행어사로 관찰사 조병식을 탄핵했다가 오히려 유배생활을 하게 된 후 벼슬을 포기하였다. 그러자 강직하고 청렴한 그의 성품을 알고 고종은 1880년 간곡히 청하여 다시 그를 암행어사로 임명하여 백성들의 민폐를 잘 해결해주어 존경을 한몸에 받았다. 관직은 오래 하지 않았으나, 1890년 한성부소윤과 승지를 역임하였으며 1894년 이후 관직에 나오지 않아 고종의 노여움을 사 전북지역 고군산도에 유배되기도 하였다. 그는 학문적으로는 조선의 유학자들이 조종하던 성리학보다는 이단시하던 양명학의 학풍을 따랐다. 그는 조선이 당파로 나뉘어 세월을 보냈던 세월을 정리한 《당의통략(黨議通略)》을 저술하여 조선시대 당쟁의 원인과 전개과정을 기술하여 후대의 당쟁에 대한 자료를 정리하여 남겼다. 그가 세상을 떠난뒤 오랫동안 빈터로 남아있던 이건창 암행어사의 생가는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격동의 19세기 중엽, 양극 독일 스페인 프랑스 이탈리아 러시아 미국등이 제국주의로 식민지 쟁탈전이 한창일 때, 조선은 세도정치하에 백성들은 삶조차도 제대로 영위하기조차 힘들게 지배관료들과 왕의 외척들에 시달리며 살고 있었다. 이때 수운최제우(1824~1864)는 경주시 현덕면에서 태어나 어리럽고 혼탁한 세상을 구제하기 위하여 무엇을 해야할 것인지를 고뇌하며 고래로 전해오던 각종 사상을 섭렵하고 수도정진하였다. 그러던 최제우는젊은 날 집근처 구미산 기슭에 있던용담정에서 수도하던 중 37세되던 해인1860년 4월 5일하늘의 계시를 받으며 무극대도의 도를 깨친후 새시대가 도래한다는개벽을 선언하였다.한 인간으로 깊은 고난의 수행을 거쳐 깨달음을 얻어 도를 깨쳤던 것이다. 그리고 주변사람들을 대상으로 자신이 깨친 가르침을 펼치자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이렇게 사람들이 모여들자, 이들이 민란의 주동세력으로 커질 것을 염려한 조선의 지배층들은, 최제우를 민중선동의누명을 씌워1864년 3월 10일 41세의 나이에 대구성내에서 혹세무민의 죄를 쓰고 효수하고 말았다. 이후, 최제우가 세운 동학은 그의 뒤를 이은 2세교주 해월 최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경주시 인왕동에 있는 통일이전 신라시대 선덕여왕 때 축조된 첨성대는 동양에서 현존하는 천문대 가운데 가장 오래된 '천문관측대'이다. 첨성대는 맨 밑부분에 정사각형의 평면에 잘 다듬어진 장대석으로 기단을 만들고, 그 몸체는 원형의 평면에 잘 다듬은 직사각형의 화강석을 층을지어쌓으면서도위로 올라가면서는 유연한 S자 곡선을 이루어 원통형이 아니어서동적 긴장감속에균형을 잡고 있다. 또아랫부분에서는 체감이 없이 올라가다 차츰 줄어들어높이의 2/3쯤에서는 지름이 가장 작은 원형으로 되었다가 다시 그 원이 커지고 있다. 현대미학적으로 분석해보면 비례균형상 황금비율을 이루고 있어, 누가 보아도 아름답게 보인다. 그리고 원통의맨 위에는 2단의 장대석을 겹쳐서 쌓아 전체적으로 곡선과 직선의 균형속에 안정감이 잘 갖추어진 조형성이 뛰어난 구조물로 1,400년의 세월을 이겨내고 서있는 것이다. 그동안 많은 전란 중에도 훼손되지 않았고, 경주지역에 발생했던 여러 차례의 크고작은지진에도 훼손되지 않았다. 최근 경주지역의 지진을 분석해본 결과, 윗부분의 2단 장대석이 없었더라면 그 균형감각을 잃고 무너져 내렸을 것이라는 실험결과도 있다. 석조구조물은 그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