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살문 앞에서 본 건원릉 ▲ 홍살문을 들어서서 본 정자각 비각 건원릉의 모습 ▲ 고종이 황제국을 선포한 뒤에 세운 비석, '대한고황제건원릉'라고 쓰여있다. ▲ 정자각에서 본 건원릉 ▲ 건원릉의 능상 정면에서 ▲ 정면에서 본 태조의 릉. 함흥지방의 억새풀이 능상에 수북하다. ▲ 건원릉의 장명등 ▲ 혼유석, 장명등 문인석 석마가 도열한 모습 ▲ 태조의 비서실장 문인석(오른쪽)과 경호실장 무인석 ▲ 고려의 복식이 남아있는 문인석 ▲ 태조의 경호실장(무인석=무석인) ▲ 병풍석에는 세밀한 조각의 인물상이 있다. 보호하고 시중도 드는 듯. ▲ 건원릉 봉분 주변에는 병풍석과 바닥에는 박석, 그리고 박석의 외부에는 난간석이 정연하다. ▲ 건원릉의 석호, 앉아서 주변을 살피고 있다. ▲ 건원릉의 주변 곡장과 석수 석마문인석 무인석 난간석 바닥박석 병풍석이 보인다. ▲ 건원릉의 뒤에서 본 봉분과 주변 석물들, 봉분에는 억새풀이 수북하다. ▲ 조선왕릉의 배치도(건원릉). 각 릉마다 비슷하면서도 약간씩 다르다.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격동의 고려말 몽골로부터의 간섭에서 벗어나 고려의 부흥을 이끌던 공양왕의
▲ 수릉-효명세자(순조의 아들) 추존 문조의 릉 무인석 ▲ 현릉(5대 문종) 무인석 ▲ 목릉(14대 선조) 무인석 ▲ 목릉(14대 선조의 원비-의인왕후) 무인석 ▲ 목릉(14대 선조의 계비 인현왕후) 무인석 ▲ 건원릉(초대 태조) 무인석 ▲ 휘릉(16대 인조계비 장렬왕후) 무인석 ▲ 원릉(21대 영조 + 정순왕후) 무인석 ▲ 경릉(24대 헌종과 효현왕후+효정왕후) 무인석 ▲ 혜릉(20대 경종과 단의왕후) 무인석 ▲ 숭릉(18대 현종과 명성왕후) 무인석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임금 가장 가까이서 안위를 지키는 영원한 경호실장들. 살아있을 때에도 왕릉에 새겨진 무인석들과 비슷한 모습의 장군들이 옆에서 지켰는지 궁금하다. 시대별 장군들의 투구와 복식도 비교해 보고, 더불어그 얼굴형상을 살펴보면장군들은대부분 다음과같은 특징이 있다. 목이 짧아서 거의 보이지 않으며, 얼굴은 옆으로 퍼지고 네모나고 턱은 각이 졌으며,눈이커 왕방울처럼 튀어나고, 코는 주먹코이며, 불도 오동통하다. 대체로 장군들은 얼굴의 형상으로 볼 때에도 문신들보다는 힘이 넘치게 보이고, 얼굴이 위 아리로 길지 않고 옆으로 퍼진 형상이며, 조상의 계통을
▲ 수릉-효명세자(순조의 아들로 즉위하기전에 세상을 떠남)의 문인석 ▲ 5대 문종 현릉의 문인석. ▲ 14대 선조 목릉의 문인석 ▲ 선조의 원비 인의왕후의 릉 문인석 ▲ 선조의 계비 인현왕후의 릉 문인석 ▲ 태조의 건원릉- 고려시대 복식 모습의 문인석 ▲ 16대 인조의 계비-장렬왕후의 휘릉 문인석 ▲ 21대 영조의 원릉 문인석 ▲ 24대 헌종의 경릉 문인석 ▲ 20대 경종의 혜릉 문인석 ▲ 18대 현종의 숭릉 문인석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조선의 왕릉 중 가장 많은 임금이 누워있는 동구릉을 돌아보면, 언듯 비슷 비슷해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다양한 점들을 느껴볼 수 있다. 그러나 문관들인 만큼 그 모습이 선비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으며, 어쩌면 당시 임금의 비서실장인 도승지의 모습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동구릉에 모셔진 왕과 왕비들의 비서실장들의 모습도 자세히 비교해보면 다양함을 느껴볼 수 있다. 왕릉의 구성도 단릉(1분만 모시거나 합장하여 봉분이 하나인 경우) 쌍릉(1분씩 따로 봉분을 설치한 릉) 또는 3연릉(왕, 왕비1, 왕비2)를 하나의 구역에 설치한 경우 등 봉분도 다양하지만
▲ 수릉-23대 순조의 아들로 왕이 되지는 못했지만 왕의 수업을 잘 받았던 효명세자와 그의 비 신정왕후 릉의 장명등 ▲ 현릉-제5대 문종의 릉 ▲ 목릉-14대 선조의 릉 ▲ 목릉 중 선조의 원비 의인왕후의 릉 ▲ 목릉중 선조의 계비 인목왕후의 릉 ▲ 건원릉-제1대 태조의 릉 ▲ 휘릉- 16대 인조와 장렬왕후의 릉 ▲ 원릉-21대 영조와 정순왕후의 릉 ▲ 경릉-24대 헌종과 효현왕후의 릉 ▲ 혜릉-20대 경종의 비인 단의왕후의 릉으로 유일하게 장명등이 없어졌다. ▲ 숭릉-18대 현종과 명성왕후의 릉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보호받고 있는 조선왕릉중 가장 많은 왕들이 자리하고 있는 동구릉이다. 조선의 도성 한양을 중심으로 볼 때 동쪽에 9개의 릉이 있다고 하여 동구릉이고, 한양의 서쪽에 5개의 릉이 있다하여 고양시에는 서오릉이 있다. 또 3개가 있는 릉도 있으니 고양시 서3릉과 파주3릉도 그와 같이 이름지어졌으며, 기타 1기 또는 2기가 있으면 릉의 이름을 붙여서 부른다. 동구릉에는 처음 이태조가 자리한 뒤로 하나 둘 시대를 달리하면서 들어서게 되었는데, 조선의 28대 왕들중 가장 많은 임금의 무덤
▲ 일주문에서 본 경릉 일곽 ▲ 정면에서 본 정자각 ▲ 능상과 정자각 그리고 비각 ▲ 앞에서 본 3연릉(좌측: 24대 헌종, 가운데 효현왕후, 우측 효정왕후) ▲ 능의 뒷면에서 본 3연릉의 모습 ▲ 장명등의 화사석 사이로 본 무인석과 석마 ▲ 능상에서 본 정자각 저 멀리는 구리시내가 보인다. ▲ 혼유석의 상흔 ▲ 문인석 무인석 석마 ▲ 무인석에서 바라본 경릉 ▲ 무인석의 뒷면에도 상흔이 역력하다. [한국문화신문=최 우성 기자] 조선제24대 헌종과 그의 원비 효현왕후와 계비 효정왕후가 모셔진 동구릉의경릉이다. 헌종은순조의 아들인 효명세자의 아들로1827년 출생하여 1834년(8세) 왕이되었으며 1849년(23세)에 갑자기승하하였다. 7세에 등극하여 23세에 생을 마쳤으니, 짧은 생애동안 왕다운 왕노릇도 못하고 만 것이다. 헌종은 순조의 손자이며 추존 익종(효명세자)의 아들이다. 할머니는 안동김씨 김조순의 딸로 순원왕후이며,어머니는 풍양조씨조만영의 딸로 신정왕후 조씨이고 원비는 김조근의 딸로 효현왕후이며, 계비는 횽재룡의 딸로 효정왕후이다. . 헌종의 능인 경릉은 조선왕릉중 유일하게 3연릉으로 능의 아래
▲ 사명대사께 예를 드리고 있는사람 ▲ 사명대사 동상을 아는지 모르는지사람들이 무심히 지나고 있다. ▲ 사명대사 동상 6환장을 들고 있는 모습. 육환장이란 끝에 6개의 고리가 달린 지팡이라는 뜻으로 6도 윤회를 하는 중생들을 구제한다는 뜻. ▲ 동상 기단부의 승병상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조선시대 불교가 탄압받던 시대에도 국란을 맞이하여 외면하지 않고 그 국난의 최선봉에 섰던 스님들!. 당시 스님들은 그동안 받았던 수모에 아랑곳 하지 않고 아무 죄없이 죽어가는 백성들을 구하기 위하여 의연하게 나섰다. 불교의 가장 중요한 금기인살생금지를 어기면서까지 불의를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전국의 산간벽지에 숨어살던스님들이 각종 농기구며 죽창을 무기로 들고 왜병들의 신식병기에 맞서서 싸웠던 것이다. 그 최선봉에 섰던 사명대사는 전쟁이 끝난 뒤에도 조선의 선비며 유생들이 가지 않으려 했던 일본으로 기꺼이 나아가서, 그들을 감화시켰고, 붙잡혀갔던 백성들과 조선의 보물들을 되찾아 왔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불교는 또 다시 탄압 받았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누구보다도 조선을 사랑한 사명대사의 동상은 지금 장충단공원에서 동국대로 올라가는 언덕
▲ 달집 주변에 둘레를 치고 둘러서있는 시민들 ▲ 달집에 소원지를 달고 있는 모습 ▲ 달집 주변의 무대에서는 한바탕 풍물이 쳐지고 있다. ▲ 달집에 한해의 소망들을 묶어둔 모습의 소원지들 ▲ 달집에 불을 붙이기 전에 한바탕 놀아보자. ▲ 아이들과 엄마들이 달집에 불을 붙이고 ▲ 불붙은 달집이 타오르기 시작한다 ▲ 한해의 액운을 다 태워버리자.. ▲ 월훨 타오르는 달집의 열기가 무섭다. ▲ 훨훨 타오르는 달집 주변을 돌면서 춤춘다. ▲ 달집 주면을 돌면서 한마음이 되어보기 ▲ 달집주변에 모인 사람들. 한옥마을에 가득했다.모두가 한해 소망 다 이루어질 것을 믿으면서..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어제는 음력으로 1월 15일 정월 대보름날이었다. 매년 정월대보름은의 양력 날짜는 바뀌지만, 옛사람들은 새해가 바뀌고 난 첫보름달이 두둥실 떠오르면 한해의 무사와 소망을 떠오르는 큰 달에 빌면서 모두가 어우러져 흥겹게 놀았다. 정월 보름이 되면 농촌에서는마을의 한 복판에 커다란 달집을 만들었는데, 이 달집은 움집처럼 둥근 평면에 5m 이상의 긴 나무들을 서로 기대 세워서 끝이 서로 맞닿게 한 뒤, 윗부분을묶어 형태를 만들고,
▲ 비각의 전경 ▲ 비각의 정면 ▲ 비각 현판 ▲ 비각의 모서리기둥 상부 공포 ▲ 비각의 내부 천장에는 용이 조각되어있다. 비각을 보호하려는 듯! ▲ 비석의 앞면 ▲ 비석의 뒷면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현재 한국에서 가장 큰 사찰로 알려져있는 경남 양산시 통도사의 적멸보궁(대웅전)뒤 금강계단에 모셔진 석가모니(세존)의 사리(捨利)와 의발(衣鉢)에 대한 사연을 기록한 비각이다. 이름하여 '세존비각'이다. 유래를 모르는 사람들은 금강계단의 담장옆에 지어진 한칸짜리 비각이라 도대체 그게 무슨 비석이며 또 비석에 별도의 집까지 지어진 연유가 궁금할 것이다. 주변에 설명도 없어지나치기 쉽지만, 통도사에 가장 중요한 보물인 석가모니의 진신사리가 금강계단에 모셔지게 된 사연을 비석의 양쪽면에 빼곡히 적어놓은 것이다. 통도사의 창건역사부터 그동안의 우여곡잘 역사유래를 기록한 통도사 사적기의 기록에 따르면자장율사는 신라 왕족중 진골 출신으로 통일전 신라에서 당으로 불교의 진수를 얻고자유학한 학승이었다. 그는 화엄불교의 진수를 얻고자문수보살이 상주한다고 믿던 청량산으로 들어가서 문수보살의 소상(塑像)에 지극정성으로 예배했다.그런 정성 끝에 꿈속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투박스럽지만 정감이 넘치는 석등이다. 사찰의 석등은.그 형태가 만들어진 시기별로 특징이 있다.통일신라와 고려시대에는 크기도 웅장하고 상세하게 조각된 장식이 무척 아름답지만, 조선시대에 들면서는 크기도 줄어들고 간략화 되고 투박스럽기 까지 하다. 본 석등은 통도사의 경내에 만들어진 조선시대 석등이다. 본래 석등의 의미는 어두운 사찰의 경내를 밤새 밝히기 위함이라 생각하지만, 사찰에서 석등의 의미는 등을 밝혀 경내를 환하게 한다. 초생달도 없는 칡흙처럼 어두운 밤이면 작은 촛불이라도 하나 밝히면 세상이 얼마나 밝아지는지 그리고 그 빛의 고마움을 잘 알 수 있다. 작은 촛불이지만그 빛을 의지하면 어두운 밤길을 두려움없이자기가 가고 싶은 곳에 갈 수 있다는 원리를 불교의 가르침에 비유하는 것이다. 또한 석등에 밝히는 불은 자신의 깨침을 의미하여,쉬지말고 열심히 공부하여진리를 깨치고 이를 통하여 세상을 밝히는 등불이 되겠다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등불을 비유하여 진리를 말한 적이 있다. 그는열반에 들기 전에많은 제자들이 모인 장소에서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登明)이라 하였다. 자기 안에 있는 불성을
▲ 용화전 앞에 있는 관음전과 봉발탑 ▲ 봉발탑-1 ▲ 봉발탑-2 ▲ 봉발탑-3 ▲ 봉발탑-4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여러 방향에서 담아본 봉발탑. !!!. 통도사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모양의 탑이다. 봉발탑의 구성은 납작한 기단석과 그 위에 세로로 길쭉한 탑신석 그리고 탑신석 위에납작한 받침석이 있고 그 위에 밥그릇(바루)모양의 돌과 뚜껑돌로 이루어져 있다. 바루는 불교에서 스님들이 가지고 다니면서 공양을 받아 식사하는 밥그릇을 뜻하는데, 이는 부처님 당시부터 수행자는 신도들이 제공하는 식사를 받아서 연명하고 그 나머지 시간에는 쉴새없이 공부해야 한다는 뜻도 곁들여 있다. 봉발(奉鉢)이란 밥그릇인 바루를 받들어 모신다는 뜻으로, 불교에서는 스승이 제자의 깨침을 인정할 때 스승이 제자에게 내려주는 전통이 있다. 통도사의 봉발탑은 관음전 뒷편과 용화전 앞에 있는데, 용화전에는 다음 세상에 부처님이 될 미륵보살(미륵불)이 있고 그 미륵불이 그다음 세상에부처님으로 올 것이라는 수기를 석가모니 부처님에게 받았기 때문에 수기를 받고 미륵보살이 가사와 바루를 전해 받았다는 의미로 미륵전(용화전) 앞에 봉발탑을 세운 것이다. 전국의 수많은 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