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겨울 해당화 앞에서 있는 해수관음상 [한국문화신문=최 우 성 기자] 양양 낙산사는 관세음보살의 성지로 유명하다. 관세음보살은 불교에서 중생의 소원을 가장 잘 들어주는 보살로, 중생이 고통속에 신음할 때, 그 이름을 진심으로부르면 그 어떠한 고통도 다 해결해준다는 보살이어서, 중생에 가장 가까운 보살이다. 관세음보살은 바닷가에서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해난사고가 잦을때 더욱 큰 의지처가 되었기에, 바다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 양양 오봉산 언덕에 거칠고 광대한 바다를 응시하고 있다. '낙산사'란 이름은 관세음보살이 상주한다는 상상의 산이 '보타락가산'인데, 그 '보타락가산'의 줄임말이 바로 '낙산'이다. 낙산사는 의상대사가 홍련암에서 관세음보살을 직접 만났다고 전하는 사찰로, 전체가 관세음보살의 성지로 많은 불자들이 꼭 한번은 가고 싶어하는 절이다. 낙산사에는 관세음 보살이 여러곳에 모셔져 있는데, 바닷가에는 홍련암이 오방산 맨 꼭대기에는 원통전에 그리고 바다가 내려보이는 언덕 위에는 이 해수관세음 보살이 있다.요즈음에는 중국의참배객들도 많이 오는 곳이 되었다. 최우성(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문화재수리기술자로
▲ 눈내리는 12월 아직도 단풍잎이 그대로 붙어있어 더욱 운치가 느껴진다.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올해는 눈이 자주 올것이라는 예보가 나왔다. 겨울에 눈이 내리면 고궁의 풍경은 더욱 운치가 느껴진다. 특히 경복궁의 향원정은 눈내리는 모습을 사진으로 담기 위해 많은 사진가들이 찾는 명소 가운데 하나이다. 눈과 어우러진 단풍잎이 향원정의 느낌을 더욱 멋스럽게 하여 사진으로 담아보았다. 최우성(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문화재수리기술자로 한국인의 삶을 담아온 전통건축의 소중한 가치를 찾아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을 하고 있다. 북촌한옥마을 가옥 보수설계, 혜화동주민센타 개보수설계,파주 화석정, 파산서원 등과 영주 소수서원의 정밀실측설계, 불국사 일주문, 안동하회마을, 제주성읍마을, 영주 무섬마을 등 문화재보수설계 일을 맡아했다. 포천시민의 종 종각설계, 용마산 고구려정, 도피안사 대웅전, 봉선사 종각 등을 설계하였다. 현재 한국불교사진협회 회원, 문화재청 문화유산사진작가, 불혹의 포토클럽 회원
▲ 방화수류정과 포루가 보이는 정경 ▲ 화홍문(화성으로 들어오는 물 위에 지은 정자)과 방화수류정 ▲ 반영으로 본 방화수류정 ▲ 북측성곽과 포루 ▲ 방화수류정에 앉아서 본 포루 [한국문화신문화=최우성 기자] 화성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인 방화수류정을 오르 내리면서 사진으로 담아 보았다. 방화수류정은 크기는 작지만북쪽의 수원지에서화성으로들어오는 물길주변에 적을 감시하기 좋은높은 곳에 지은 복잡한 정자로, 여름에는 시원하여 순찰을 돌던 병사들의 휴식처로 가장 좋은 곳이기도 하지만, 전시에는 북쪽의 수문근처로 접근하는 적군을 감시하고 작전을 지휘하는 작전 본부이기도 하다. 물길이 비록 작지만, 그래서 오히려 적들이 성을 공격하기에는 좋은 곳이고 방어하기에는 취약점이 들어나는 곳이다. 그래서 방화수류정의 북쪽에는 연못을 파서 해자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여 적들이 쉽게 물길을 따라 처들어오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그 연못에는 사철 방화수류정의 모습이 반영으로 비추고 있다 방화수류정은 눈이 내리고 칼바람까지 불어대는 겨울에는 잠시도 앉아있기 어려운 추운 곳이지만, 그 운치만은 계절에 관계 없이 좋기만 하다. 봄에는 철쭉을 비롯한 꽃으로, 여름이면 푸
▲ 성곽안에서 본 화서문 ▲ 서북공심돈과 화서문 아래는 돌로 되고 위는 벽돌로 쌓은 서북공심돈과 전체를 벽돌로 쌓은 화서문의 옹성 ▲ 화서문의 옹성에서 본 서북공심돈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초겨울이지만 눈이 와서 겨울운치가 느껴지는 화성의 서북공심돈과 화서문이다. 서공심돈은 높은 곳에 올라서 적을 관찰하며 공격작전을 세우기 위한 망대이고, 화서문은 화성의 동서남북 4문중에 서쪽에 있는 문으로 남북방향으로는 통행이 많고 그에 따라 큰 길이 놓여있기에2층의 장안문과 팔달문이 세워졌고 동과 서에는그에 보조적인 문이기에 1층으로 된서쪽의 화서문과동쪽에 창룡문이 있다. 성문앞으로는 적의 침입으로 성이 함락되지 않도록 성문으로 접근하는 적을 공격하기 위한 옹성이 둘러있다. 성벽의 주변에는 음양오행 가운데 서쪽을 뜻하는 하얀깃발들이 펄럭이고 있다. 산책로에 쌓인 눈길을 조심해서 걸어가는 탐방객들이 보이고 있는 평화로운 정경이지만, 옛날에는 곳곳에 수비병사들이 보초를 서는 삼엄한 방어진지였다. 성벽의 위에는 여장이 있고, 그 여장의 군데군데는 총을 쏘는 구멍들이 있는데, 경사가 급하게 된 총안은 가까운 곳에 접근한 적에게 총을 쏘는 근총안이고, 경사가 완
▲ 서장대의 모습 ▲ 서장대와 서노대 ▲ 서장대 옆에 있는 서노대: 노대는 '노'를 쏘는 곳이라는 뜻인데 '노'란 우리가 '석궁'이라고 잘못 알고 있는 무기로 활보다 훨씬 강력하고 조준도 정확한 무기다. ▲ 서장대에서 북쪽 성벽을 따라서 내려오는 계단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눈내린 화성의 서장대의 모습이다. 서장대는 화성에서는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전망 좋은 곳으로 전쟁 때에는 화성의 주변을 둘러보면서 작전을 지휘하던 곳으로 활용하기 위한 지휘본부가 되었던 곳이다. '서장대'의 바로 옆에는 '서노대'가 지어져서 강력한 쇠로 만든 '노'를 쏠 수 있도록 하였다. 화성이 축조된 뒤에 한 번도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당시에는 가장 튼튼한 방비를 위하여 최선을 다했던 국방유적으로 기능성뿐 아니라 아름답기까지 하다. 여기서 '노대(弩臺)란 우리가 요즈음 '석궁(石弓)이라 부르는 무기로 '석궁'이란 말은 잘못된 말이고, '노'라고 불러야 맞는 말이다. 화성행궁의 좌측계단을 따라서 10여분 오르면 닿을 수 있는 곳으로 비록 짧은 거리이지만 둥줄기에 땀이 흠뻑 날 만큼 운동도 되어 많은 수원시민들이 운동삼아즐겨 찾는 곳으로 사랑받고 있다. 서장대에 올라
▲ 행궁의 맨 안쪽에 자리한 운한각 전경 ▲ 운한각과 좌익사 ▲ 운한각 현판 ▲ 정조의 어진이 모셔져 있는 운한각의 내부 ▲ 정조의 어진, 이루지 못한 조선의 개혁이 너무도 아쉽다. 그런데 어진의 옷차림은 곤룡포를 입고 있는 근엄한 모습이 아니라 군사를 이끄는 대장군의 모습을 담았다. ▲ 정조의 어진과 위패를 모시고 나갈 때 쓰는 가마.그러나 한번도 탄적은 없다. ▲ 정조의 어진과 위패가 운한각을 벗어날 때 쓰던 일산과 기 ▲ 운한각을 지키는 지붕위의 잡상신들.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조선후기 마지막 조선의 르네상스를 꿈꾸며 개혁을 시도했던 개혁군주 정조가 신도시 화성과 행궁과 관아와 백성들이 살아갈 민가를 짓고, 화성의 주변에는 당시우리의 전통축성기법에 세계적인 축성법을 두루 모아서 지은네모난돌과 흙을 구워만든 벽돌로 지은 5.3km의 성곽과 문루를 지었던 정조.!! 그러나 정조는 49살의 나이로 개혁을 한참 진행하던 중 갑자기 승하하고 말았다. 그가 그리도 허무하게 간 뒤 그의 아들 순조는 화성행궁의 가장 안쪽에 아버지 정조의 어진을 그려서 모실 별도의 사당을 짓고 그 옆에는 혹시라도 발생할 화재시에 어진이 대피할 작은
▲ 양동마을 전경-1 ▲ 양동마을 전경-2 ▲ 양동마을 전경-3 ▲ 양동마을 전경-4 ▲ 양동마을 전경-5 ▲ 양동마을 전경-6 ▲ 가을에 담근 메주가 익어가는 중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경주 양동마을은 500년이 넘는 집성촌으로 많은 유학자들을 배출한 유서깊은 고장으로 이제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수많은 국내외 관광객들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양동마을은 조선시대경주손씨와 여강이씨 2성씨의 집성촌으로 잘 알려져 있으나,본래는 손씨와 이씨 이전에는 오씨와 장씨가 살았던 작은 마을이었다. 이곳에 1400년대 말기에 양민공 '손소'가 사위로 들어와 살면서 손씨가입향하였고, 입향조 손소와 그의 아들 손중돈이 높은 벼슬을 하게되어 마을의 위상이 높아졌고, 이어 손중돈의 사위로 회재 '이언적'이 들어오면서 새로운 성씨가 입조하였는데 이언적의 이후로는 이씨들이 더욱 번성하게 되었다. 이언적의 후손들이 크게 번성하던 양동마을은 조선조 후기까지 이씨와 손씨들의 집성촌으로 내려오다가 임진왜란시절에는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손엽'이 있었으며, 이후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양반과 상민들간의 갈등도 있었고 근대화 이후로는 많은 동네사람들이 마
▲ 장충단공원에 세워진 사명대사상 [한국문화신문 = 최우성 기자] 지금으로부터 422년 전 임진왜란이 발생하자사명대사는 살생을 가장 큰 금지하는불도를 닦는 수행자의모습을 접고기꺼이 전쟁을 위하여모든 생명을 죽이지 말라는부처님의 가르침에 어긋나게 불경대신 칼과 창을 들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모든 생명있는 것들의 존엄성을 존중하기에살생을 금하는 것이지만, 평화롭게 살고 있는 이웃나라를 침략하여 자신들의 욕구를 채우고자 총칼로 무장하고 군인뿐 아니라무고한 백성을 살육하는 극악무도한 이웃나라 일본의 행패를 일방적으로 당하면서견디고서는 부처님의가르팀도 무의미 하다고 생각 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중에 사명당 유정은 그의 사형이었던 휴정 서산대사의 부름을 받고 기꺼이 스님들로 편성된 군대를 이끌고 전쟁에 참여하여 혁혁한 공을 세웠다. 뿐만 아니다. 사명당은 7년간의 임진왜란 정유재란이 끝난 후에는, 당시 권세만 누리던 선비 유생들이 겁에질려아무도 가려하지 않았던 적국의 나라 일본에 자진하여 건너가, 일본에 붙잡혀갔던 조선의 백성들과 포로들을 데리고 돌아왔으며, 일본에서는 일본의 불교계뿐 아니라 일본의 사무라이들 까지도 감복시키는 대선사로서의 행적을 남기고 왔다.
▲ 장충단 전경 ▲ 장충단 뒷면 ▲ 장충단 정면 ▲ 장충단 전경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배호의 '안개낀 장충단(奬忠壇)공원'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장충단공원입니다. 그런데 그 '장충단(奬忠壇)'이 무슨 곳인지는 아마도 대부분 잘 알지 못하고 그저 서울 남산의 한 자락에 있는 도시공원으로만 알고 있습니다. 장충단의 설립의미를 알고나면편한 마음으로만 산책 삼아 들르는 곳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장충단은 1900년 고종이 세운 영령들을 위로하고 제사를 지내던 제단인데, 이는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과정에서 함께 목숨을바친 궁궐의 수비대장과 당시 내부대신 이경직을 비롯한 원혼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세운 것입니다. 하지만 1910년 강제한일병합으로 대한제국이 사라진 뒤 일본은 장충단을 폐하고 비석도 파서 멸실시켰습니다. 그리고 이곳에 벚나무(사쿠라)를 심고 일본식 공원으로 만들어 장충단공원이라 이름하였지요. 이렇게 제사를 모시던 장충단은 장충단공원이 되어버렸고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많은 사람들은이곳이 단순한 공원인지 알고 찾고 있는 것입니다. 배호의 노래로 '장충단공원'은 더 널리 알려지게 되었지요. 하지만, 역사의 숨결은 되살아나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조선은 유교의 한 유파인성리학을 국가이념으로 삼았다. 정신이 성리학에 이상을 둔 탓인지, 조선은 건축을 각종 예술품을비롯한 생활도구의 전반적인 가치가 성리학의 정신을 구현하는데 맞추어졌다. 성리학은 사치를 금하고 근검과 절약을 우선하며, 산업은 농업을 위주로 공업과 상업은 천한 것으로 여겼다. 이런 연유로 그릇에 있어서도, 고려가 크고우아하고 귀족적인 청자를 발전시킨 반면 조선은 깨끗한 선비의 이상인 군자를 나타내고자 백자를 들여와 발전시켰다. 그 중에도 아무런 무늬가 없는 순수 백자가 있는가 하면, 당시 유행하던 산수화 문인화 각종 길상문과 동물무늬가 있는 아름다운 백자에 산화코발트로 문양을 넣은 청화백자는 궁궐의 그릇들에 많이 사용되었다. 무늬가 없는 순수한 백자는 주로 민간에서 사용되었다. 조선의 청화백자는 경기 광주 분원리의 관요를 설치하여 도자 장인들에 의해서 생산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궁궐에서도 초기에는순수 백자를 사용하다가, 세조대(1445년경까지)에 와서는 채색한 백자들이 사용되었으며, 광주에 분원을 설치한 후(1446년)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