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 = 최우성 기자] 왕궁리5츧탑의 원경-1 원경-2 원경-3 왕궁리5층석탑 근경-1 근경-2 1965년 해체당시 사진 1965년 해체당시 사진 1965년 해체당시 기단하부 사리장엄구 위치 발굴 결과 나온 사리장엄구와 금박에 새긴 경전 전북 익산에는 국보로 지정된 석탑이 2기 서있다. 하나는 세계 최대의 단일 가람이었던 미륵사지 석탑이 있고 또 다른 하나는 왕궁리5층석탑이다. 왕궁리5층석탑은 그 건립 연대를 정확히 알려주는 근거가 미약하여 여러 설이 있다, 더러는 백제말기에 왕궁이었던 이곳에 건립된 탑이라거니, 신라말 고려초기에 건립된 탑이라거니 논란거리이지만, 그 형식상으로 판단해 보면 왕궁리5층탑은 목조탑과 비슷한 옥개석으로 백제탑의 양식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는 면에서는 백제말로 보기도 하지만 백제 무왕이 왕궁리에 도읍을 이전하기 위해 궁궐과 전각들을 건립했다는 기록도 있는 것으로 보아 궁궐에다 바로 절을 건립하지는 않았으리라 생각도 든다. 그래서 1965년 어렵게 해체복원을 해보았으나, 탑의 하단부에서 발굴된 사리장엄구들은 있었으나 절의 건립이나 탑의 건립에 대하여는 기록이 없고, 오직 사리
▲ 능의 정면 아래에서 본 정릉과 정자각 ▲ 정릉의 홍살문 ▲ 정자각에서 본 수복방과 비각 ▲ 정자각에서 본 정릉 ▲ 능 아래에서 본 모습 ▲ 능 앞의 석물들과 능을 감싸고 있는 곡장 ▲ 문인석과 석마 ▲ 능상의 측면에서 본 모습 ▲ 정릉의 정면모습 ▲ 능의 정면(왕릉에는 아랫부분에 병풍처럼 둘러있는 병풍석이 있으나, 정릉에는 없다)본래 정동에 있을 때에는 이성계가 무척이나 호화롭게 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분명히 있었을 것이나 태종이 이곳으로 옮기면서 모두 없애버린 것이다. ▲ 능 앞의 석등(그 형상이 독특하다) ▲ 능 주변의 석호(돌로 만든 호랑이) ▲ 능 주변의 석양(돌로 만든 양) ▲ 능앞의 석물들(혼유석, 석등 망주석, 문인석) ▲ 신덕왕후 강씨를 호위하는 문인석과 석마(말)왕릉에 있는 무인석은 보이지 않는다. ▲ 능상에서 본 정자각과 시내 ▲ 정자각의 측면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정릉은 조선태조 이성계의 2번째 왕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능이다. 신덕왕후 강씨는 상산부원군 강윤성의 딸로 강윤성은 고려말 권문세가였기에 이성계가 정계에 진출하여 역량을 넓혀 조선을 개국하는데 큰 역할을
[그린경제/얼레빗 = 최우성 기자] 한양도성 톺아보기 3에서는 본래 자리를 벗어나서 세워진 혜화문을 둘러보고 성곽을 따라 올라가보는 코스이다. 혜화문 인근 성벽. 성벽은 있지만 여장은 다 사라지고 없다. 혜화문을 돌아 올라가면 성안팎에 크고작은 집들이 몰려있다.이들은한국전쟁 이후 전국에서 몰려든 난민들로 살집을 마련한다고성곽돌을 헐어다 집의 기초와 기단으로 썼다. 그래도 남아있는 것이 조금이라도 있으니오히려 신기할 따름이다.남아있는 성곽을 살펴보자. 한국의 성곽은 아래에 든든한 지반석을 수평지게 가로로 깔고 그 위에 지상 노출된 부분부터 가능한 큰 돌들을 아래에 쌓고 차츰 차츰 적은 돌들로 쌓아 올라간다. 그 양식은 쌓은 시대별로 차이가 있으나, 성벽의 돌들을 마름모꼴로 쌓지 않고 장방형의 돌들을 수평지게 쌓는 다는 것이 고구려시기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한국성곽의 변치않는 철칙이었다. 과거에는 한양도성의 밖이어서 한적한 야산이었던 구릉지들이 서민주거단지가 되었다. 도성의 안쪽으로 산책로가 마련되었지만, 본래는 병사들이 성안쪽을 순찰하던 순라길이었다. 이제는 그 길을 따라 탐방객들이 산책을 한다. 가파른 성벽의 바로 앞까지 비탈진 언덕위에도 사
보성 댓재 녹차밭-1 보성 댓재 녹차밭-2 녹차 잎을 따는 아낙 - 1 녹차 잎을 따는 아낙-2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신록의 계절 5월이 되었다. 세월호의 참사로 온 세상이 침울과 분노로 들끓고 있지만, 계절의 변화만은 어김없이 변하고 있다. 따스한 햇볕을 받아 푸른 녹차의 여린 잎이 새움을 티우고, 여린 녹차잎을 따서 좋은 녹차를 만들려는 녹차농가의 일손은 바쁘다. 한국에 전통차가 들어온 것은 멀리 김수로왕비 허황옥이 서기 42년 무렵에 인도의 차를 들여왔다고 하지만, 공식적으로는 통일신라 흥덕왕때(828년)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김대렴이 차씨를 받아온 때를 그 기원으로 삼기도 한다. 하지만 기록에는 없는 또 다른차가 있다는 이야기도 있고, 한국에는 자생차가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 기원이야 어떻든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까지는 차를 무척이나 아끼고 애용했다는 기록들이 있다. 유학인 성리학이 통치이념이 된 뒤로는 전통차는 차츰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고 조선 말에는 완전히 그 명맥이 끊기기까지 하였다. 그런 전통차가 되살아난 것은 1800년대 다산 정약용이 해남으로 귀양을 가면서 차를 가까이 하고 사찰에서 그 명맥이
갈 건너편에서 본 혜화문 제 자리가 아닌 조금 옮겨진 곳에 1992년 복원된 혜화문 혜화문 편액이 보이는 정면 [그린경제/얼레빗 = 최우성 기자] 1392년 태조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하고 한양에 도읍을 정한뒤 7년 한양도성을 축성하면서 동서남북으로 4대문을 세우고 그 사이사이에 4개의 소문을 세웠다. 그래서동문과 북문사이에 세워진문이 바로 동소문이고 그 본래 이름은 홍화문이었다. 그런데 1483년 성종이 창경궁을 건립하고 궁의 정문을 홍화문으로 하자 홍화문이 2개가 있어 많은 혼란이 있었다. 그리하여1611년 중종때 창경궁의 정문은 홍화문으로 그대로 두고,동소문인 홍화문은 혜화문으로 이름을 고쳤다.한양에서 북쪽지방으로 나가려면혜화문을 통해야 동두천 의정부 양주로 나갈 수 있었다. 혜화문의건축형식은 성벽의 높이에 맞추어 육축을 쌓고 그위에 누각형의 목조로 집을 지었는데. 우리네 문루는 중국과 달랐다. 중국의 상징인 자금성을 보면 우리 궁전인 경복궁의 근정전처럼 지붕이 팔작지붕인 것이 형태상 바로 알 수 있는 차이점이다. 그런데 우리네 건축은 궁궐의 정문이나 성문은 팔작집이 아니라 대부분우진각지붕을 하고 궁궐의 정전은 팔작지붕을 하고
신록이 물들어가는 성곽의 외부 흥인지문의 근처에는 배달용 오토바이들이 즐비하다. 성곽의 돌틈에도들꽃이 피어있다. 이화동 고갯길에는 성안마을. 서민주택 재개발로 사라질 위기에서 다시 깨어나고 있다. 한양 성곽을 해설해주는 해설사와 탐방객들. 새롭게 단장된 이화동 고개마을 성안마을에서성박으로 돌러본 서울-1 성안에서 성밖으로 둘러본 서울-2 성벽에서 둘러본 서울-3 성벽의 외부 한양도성길-1 성벽의 외부마을-1 성벽의 돌들을 자세히 살펴보는 탐방객 무너져 내리던 성벽과 여장들이 새롭게 정비된 구간 보수 완료된 경사진 구간 성벽의 외부 한양도성길-2 성밖의 장수마을 한양도성길과 정자도 잘 정비되었다. 성벽 외부 한양도성길-3 성벽 외부 한양도성길-4 성벽외부 한양도성길-5 성벽 마을의 주민이 화분을 손질하는 모습 [그린경제/얼레빗 = 최우성 기자] 서울 한양도성을 감싸고 있는 한양성 성곽 가운데 동대문에서 낙산구간을 탐방해본다. 서울성곽은 조선의 정궁이 있는한양성의 도성으로 남으로는 남산에서 시작하여,동으로 낙산, 북으로 북악산, 서로는 인왕산을 거쳐서 숭례문을 돌아 다시남산까지 이어진 성곽이다
[그린경제/얼레빗 = 최우성 기자] 종이컵에 연꽃잎을 붙여 만든 연등! 소나무 가지에 매달려 있으니 더욱 운치가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크고 화려한 데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어디든 마음이 있고 이를 실천하는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고양시 한미산 흥국사에서
서울(한양)의 동대문 흥인지문 ▲ 흥인지문의 옹성 ▲ 흥인지문의 안쪽에서 본주변모습 ▲ 2층으로 된 지붕의 잡상 ▲ 대문 안쪽의 천장그림 [그린경제/얼레빗 = 최우성 기자] 서울(한양)의 동대문 흥인지문(興仁之門), 2층 누각형으로 지어진 한양도성의 대문이다. 대문의 형식은 남대문인 숭례문과 같은 형식이나, 옹성을 잘 갖추고 있다. 인(仁)은 유학에서 인간이 갖추어야 할 법도를 5상이라 하여 이를 함축한 것이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이다.이는 또 방위도 나타내는데 동-仁, 서-義, 남-禮, 서-義, 중-信으로 표현하였고, 그 동쪽에 있음으로 인(仁)을 넣고 그 인(仁)이 잘 자라라는 뜻으로 흥인지문이라 하였다고 한다. 지금은낙산방향으로도 광희문 방향으로도 끊긴 상태이나 동쪽으로 들어오려면 반드시 거쳐야할 한양 도성의 관문이었다. 이제는 도로로 둘러싸인 섬이 되었으니 세월의 무상함을 새삼 느끼게 한다.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문화재수리기술자로 한국인의 삶을 담아온 전통건축의 소중한 가치를 찾아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을 하고 있다. 파주 화석정, 파산서원 등과 영주 소수서원의 정밀실측설계, 불국사 일주문, 안동
▲ 곡선으로 디자인된 디자인파크의 입구 ▲ 디자인파크의 지하공간에서 올라오는 가족 ▲ 곡선과 직선의 조화 ▲ 디자인파크 아래서 발굴된 옛 유적 ▲ 디자인파크를 거니는 사람들 [그린경제/얼레빗 = 최우성 기자] 한양의 동쪽인 흥인지문에서 광희문에 이르는 구간에 성벽을 헐고 들어섰던 동대문운동장이 사라진 자리에들어선 디자인파크.. 옛자취 대신 가장 현대적인 건물이 들어서서 서울의 새로운 명소로 자리잡고 있다. 근현대가 직선으로 이루어진 합리성과 효울성이 강조된 시대라면 미래는 곡선으로 채워진 초현실과 상상의 세계가 될 것임을 이야기 하는 듯 하다.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문화재수리기술자로 한국인의 삶을 담아온 전통건축의 소중한 가치를 찾아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을 하고 있다. 파주 화석정, 파산서원 등과 영주 소수서원의 정밀실측설계, 불국사 일주문, 안동하회마을, 제주성읍마을, 영주 무섬마을 등 문화재보수설계 일을 맡아했다. 포천시민의 종 종각설계, 용마산 고구려정, 도피안사 대웅전, 봉선사 종각 등을 설계하였다. 현재 한국불교사진협회 회원, 해리티지채널사진기자, 불혹의 포토클럽 회원
열사의 흉상 아래에 묘소가 있다. 이준 열사의 흉상과 돌벽 열사의 묘(태극문양의 덮개돌이 놓여있다) 이준열사의 묘역 전경 [그린경제/얼레빗 = 최우성 기자] 1859년 1월 21일 출생하여 1907년 7월 14일 머나먼 이국땅 네델란드 헤이그에서 돌아가신 열사다. 열사는 1894년 함흥에 순릉의 능참봉이 되었으나 1895년 갑오경장으로 김홍집내각이 들어서자 사직하고 한양으로 올라와 법관양성소를 마치고 한성재판소의 검사보로 법관생활을 하였다. 법관생활 중에는 대관 중신들의 비행과 비리를 들추어내어 올바른 사회정의를 위해 애쓰기도 하였다. 그러나 탐관오리들의 중상모략으로 오랫동안 법관생활을 하지 못하고 사퇴하고 말았다. 이후 서재필등이 미국에서 귀국하자 협성회를 조직하여 구국운동에 투신하였고 독립협회에 평의원으로 피선되고 독립신문발간과 독립문건립 가두연설등으로 활약하였다. 만인공동회에서는 정부의 비리를 탄핵하다 체포되어 이승만 이동휘 등과 함께 투옥되었다. 1902년에는 효율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민영환, 이상재, 이상설, 이동휘, 양기탁, 남궁억, 노백린, 장지연 등과 함께 개혁당을 창립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이 박탈당하자, 비분강해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