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1844년(헌종 10) 한산거사(漢山居士)가 지은 창작가사 <한양가(漢陽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한산거사가 누구인지는 잘 모릅니다. 형식은 4음보 1행을 기준으로 모두 704행인데 조선 왕도인 한양의 문물제도와 풍속 그리고 왕실에서 능(陵)에 나들이하는 광경 등을 노래한 것입니다. 같은 이름이지만, 내용이 다른 이본이 많은데, 조선 도읍지 한양을 노래한 이 작품을 ‘향토한양가(鄕土漢陽歌)’라 하며, ‘한양태평가(漢陽太平歌)’ 또는 ‘한양풍물가(漢陽風物歌)’라고도 하는 이본들도 있습니다. <한양가>는 한양의 문물을 노래한 것답게 백성의 삶이 집약되어 있는 시장 풍경을 신명나게 읊고 있습니다. “칠패의 생어전에 각색 생선 다 있구나. 민어, 석어, 석수어며, 도미, 준치, 고도어며, 낙지, 소라, 오적어(오징어)며, 조개, 새우, 전어로다. 남문 안 큰 모전에 각색 실과 다 있구나. 청실뇌, 황실뇌, 전시, 홍시, 조홍시며, 밤, 대추, 잣, 호도며 포도, 경도, 오얏이며, 석류, 유자, 복숭아며, 용안, 협지, 당재추로다. 상미전 좌우 가게 십년지량을 쌓았어라. 하미, 중미, 극상미며, 찹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역사 교사들이 한 컷의 사진으로 풀어낸 《한 컷 한국사(해냄에듀)》에 보면 “석주명, 우리 나비에 우리말 이름을 지어 주다”란 글이 있습니다. 석주명은 일본에서 농생물학을 배우고 돌아와 1913년부터 모교인 개성의 송도고등보통학교에서 생물을 가르치면서 나비 연구에 전념한 분입니다. 선생은 방학 때 고향에 가는 학생들에게 나비 200마리씩 잡아 오라는 방학숙제를 냈고, 이래도 부족한 것은 직접 온 나라를 돌아다니며 채집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채집하고 관찰한 다음 서양과 일본학자들이 잘못 분류한 844종을 정리했으며, 선생의 연구는 영국왕립학회의 요청으로 1940년에 펴낸 《조선산 나비 총목록》이라는 책에 담겨, 전 세계에 팔렸다고 하지요, 이 책에는 일본 학자들이 붙인 한국산 나비의 이름을 아름다운 우리말로 새로 지어 붙였습니다. 이때 일제는 한국인을 일본에 동화시키려고 했는데 이에 안재홍, 정인보 같은 민족주의자들이 ‘조선학 운동’을 펼쳤고, 석주명 선생은 나비학 연구도 조선학의 일부로 생각했다고 합니다. 선생은 연구 대상을 철저하게 ‘조선 나비’로 한정하였고, 논문 대부분은 “조선산~”이라는 제목으로 시작했다고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성인 여성들 대부분은 한 달에 한 번, 그들만의 피를 보는 작은 전쟁을 치러야 합니다. 그것은 흔히 성숙한 여성의 자궁에서 약 28일을 주기로 출혈하는 생리 현상 곧 월경(月經)이라고 하는 것인데 월사(月事), 월객(月客)으로도 부르고, 우리말로는 ‘달거리’라고 하며, 빗대어 ‘이슬’, ‘몸엣것’ 등으로도 불렀습니다. 그런데 요즘이야 다양한 크기를 갖춘 생리대를 쉽게 살 수 있음은 물론, 각종 모양의 날개가 달린 최첨단 생리대에 음이온이나 한방 처리된 특수 생리대까지 개발돼 그 불편은 많이 줄었지요. 그런데 조선시대엔 여성들에게 생리는 부끄럽고, 비밀스러운 것은 물론, 꽁꽁 숨겨야 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때는 생리대를 ‘개짐’ 또는 ‘서답’이라 하여 하여 주로 광목 옷감을 빨아서 재활용하는 것었습니다. 딸이 생리를 시작하면 어머니가 마련해 둔 광목천을 내어주며, 달거리 때 이것을 쓰는 방법 등을 가르쳐 주었지요. 때로는 개짐에 베를 쓰기도 했는데 핏물이 잘 지워지는 대신 뻣뻣할 수 있기에 오래 입은 삼베옷을 뜯어서 재활용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조선시대는 지금과 달리 부끄러운 일이라 생각하여, 비밀스럽게 밤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예전 갓난아이에게 입히던 옷으로 배냇저고리와 두렁치마가 있었습니다. 웃옷으로 입히던 배냇저고리는 깃과 섶을 달지 않은 아기 옷으로 배내옷, 깃저고리라고도 합니다. 희고 부드러운 무명이나 명주로 만드는데, 등에 솔기를 하지 않고 배와 손을 덮을 정도로 길게 만들었지요. 그런가 하면 아랫도리로 입히던 두렁치마는 조선시대 어린아이의 배부터 아랫도리를 둘러주는 기능적인 치마로서 '두렁이', 또는 '배두렁이'라고도 하지요. 두렁치마는 뒤가 겹치지 않게 만들었는데 이는 누워있는 아기에게 뒤가 배기지 않도록 하는 것은 물론 기저귀 갈기에도 편리하게 했습니다. 요즘처럼 옷감의 종류도 많지 않았고, 아기 속옷도 없던 옛날에 몸이 여린 갓난아이에게 보온용으로 입혔던 것이지요. 흔히 무명이나 명주, 융 따위를 겹으로 하거나 솜을 두어 만들었으며 누비로 만든 것이 많았습니다. 최남선의 《조선상식문답》에서 보면 두 이레쯤(14일) 될 때 이 두렁치마를 입히기 시작한 듯합니다. 아기들이 기어다니기 전까지는 남아나 여아같이 입었지만, 자라면서 주로 여아들만 입었습니다. 석주선기념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두렁치마는 1900년대 여아용 누비 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난 2016년 김지운 감독, 송강호, 공유, 한지민, 츠루미가 출연한 영화 <밀정>이 상영되어 관객수 750만 명을 달성하는 성황을 이뤘습니다. 영화 <밀정>은 일제강점기 속 독립운동단체 ‘의열단’이 중심이 되어, 폭탄을 준비하고 일제의 주요 기지를 겨냥했던 실화에서 출발했지요. 영화에 등장하는 정태산이라는 인물은 실제 의열단을 이끌었던 김원봉 단장을 본보기로 하고 있습니다. ‘의열단(義烈團)’은 1919년 11월 김원봉의 주도 하에 만주 지린성에서 조직된 항일 무장 투쟁 단체였는데 의열단은 의로운 일(義)을 맹렬히(烈) 행하는 단체(團)라는 뜻입니다. 김원봉은 일본과 군대로는 정면으로 대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암살과 파괴 투쟁이 효과적이라고 판단한 뒤 자기 뜻에 공감하는 청년들을 모아 3ㆍ1만세운동이 일어난 해인 1919년 오늘(11월 9일), 지린성 파호문 밖의 중국인 농가에 모여 의열단(義烈團)을 창립했습니다. 비밀결사 조직인 탓에 의열단원이 몇 명이었는지는 알 수는 없지만, 2010년에 기밀 해제된 영국의 비밀문서에 따르면 단원이 무려 2천여 명에 달했으며 적진인 도쿄에도 50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입 동 - 이덕규 곡식 한 톨이라도 축내면 그만큼 사람이 굶는다 가을걷이 끝나자마자 서둘러 빈손으로 떠난 오직 사람 아닌 것들의 안부가 궁금하다. 오늘은 24절기 가운데 열아홉째 절기 입동(立冬)으로 이날부터 '겨울(冬)에 들어섭니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따르면 10월부터 정월까지의 풍속으로 궁궐 내의원(內醫院)에서는 임금에게 우유를 만들어 바치고, 기로소(耆老所)에서도 나이 많은 신하들에게 우유를 마시게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임금이나 나이 많은 벼슬아치들에게 우유를 주었다고 하는데 이제 임금이 아니어도 우유를 맘껏 마실 수 있는 우리는 행복한 처지일 것입니다. 이런 궁궐의 풍습처럼 민간에서도 ‘치계미(雉鷄米)’라고 하는 아름다운 풍속도 있는데 이는 입동 등에 나이 든 노인들을 모시고 음식을 준비하여 대접하는데 이때는 아무리 살림이 어려운 집이라도 치계미를 위해 곡식을 내놓았습니다. 그러나 그마저도 형편이 안 되는 사람들은 도랑탕 잔치로 대신했지요. 입동 무렵 도랑을 파면 누렇게 살이 찐 미꾸라지를 잡을 수 있는데 이 미꾸라지로 추어탕을 끓여 노인들을 대접하고는 이를 ‘도랑탕 잔치’라고 했다고 합니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 외국에 공사를 파견하여 국가 대표로 삼는 것은 국가 체면을 손상시키지 않으려는 것인데, 그 이름과 지위가 허식에 지나지 않는 것이 무릇 얼마인가, 차라리 우방 정부에 위임하여 그 힘에 의거하여 국권을 보존하고 유지하는 것 또한 폐하의 대권이 발전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가운데 줄임) 수백 명 사상자를 내면서도 기필코 적은 공이나마 세워 동맹국에게 신의를 표하려 했던 계책이었다.” 이는 119년 전인 1905년 내일(11월 6일) 친일 단체였던 일진회가 발표한 선언서입니다. 내용은 “일본의 지도를 받아 독립을 유지하는 일이 옳은 일이다. 일진회를 매국노라 부르지만, 자기들은 수백 명의 사상자를 내면서도 오로지 나라의 독립과 안녕을 위해서만 일하고 있다”라고 강변하고 있습니다. 일진회는 1904년 8월 송병준이 조선 안에 친일단체를 설립하라는 일본의 비밀명령을 받고 친일 인사들을 모아 조직했습니다. 일진회의 강령은 조선 군대를 해산시키고 내각을 교체하고 국가의 재정을 축소해 결국 주권을 포기하는 것으로 일제의 조선 지배권을 강화시키려는 목적을 나타냈습니다. 지난 8월 이종찬 광복회장은 “일본의 수탈을 항의하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한글 붓글씨체로 반포체와 궁체가 있습니다. ‘반포체(頒布體)’는 훈민정음 반포와 더불어 《동국정운(東國正韻, 1448)》이나 《월인석보(月印釋譜, 1459)》 같은 책에 처음으로 쓰인 글씨체를 부르는 말입니다. 이 글씨 꼴은 우리의 삶에서는 크게 쓰이지 않지만, 무덤 비문 같은 곳에 쓰이지요. 또한 ‘궁체(宮體)’는 반포체가 가진 단점인 ‘딱딱한 모양’ 대신 부드러운 모양으로 반흘림, 흘림, 정자의 3종류가 있습니다. 궁체라는 이름은 말처럼 궁중에서 쓰이고 발전한 서체입니다. 오늘(11월 3일) KBS 진품명품 프로그램에는 신정왕후의 답장을 지밀내인이며, 서사상궁인 이씨가 수준 높은 궁체로 대신 쓴 <궁체편지>가 출품되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국립한글박물관에는 효정왕후가 윤용구의 부인에게 보낸 편지가 있습니다. 이 편지는 서사상궁 서기 이씨가 쓴 것으로 나와 있는데 덕온공주의 손녀 윤백영은 서기 이씨가 대필한 편지의 여백에 적은 기록에서 서기 이씨를 가리켜 “국문이 시작된 후 제일 가는 명필”이라 하였습니다. 이 편지에 종이를 붙여 적어 넣은 설명에는 서기 이씨의 생애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신정황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마고 선녀에 천일주 늙지나 말자고 불로주요 죽지나 말자고 불사주 달이나 밝다고 월광주요 날이나 맑다고 일광주 이백의 기경 포도주요 뚝 떨어졌다고 낙화주 삼월 하루 두견주요 이 아니 두나 좋을 소냐 이 술 한 잔을 잡수시면 없는 자손은 생겨를 주고 있는 자손은 수명 장수 재수나 소망도 생겨를 주마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네. 위는 서도에서 황해도굿을 할 때 부르는 노래 가운데 ‘술타령’ 일부입니다. 황해도굿은 황해도 무당들이 때를 맞아 신령께 만물 생성과 가을걷이에 감사드리고 마을 평안은 물론 각 가정 구성원의 무사태평, 무병장수, 부귀공명, 소원성취를 비손하는 무속적 의례로 이 가운데 「술타령」은 술을 신령에게 올리면서 장수와 재수를 비는 내용이지요. 위 노랫말에서도 “이 술 한 잔을 잡수시면 없는 자손은 생겨를 주고 있는 자손은 수명 장수 재수나 소망도 생겨를 주마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네.”라고 합니다. 지난 10월 23일 저녁 7시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는 유지숙의 소리인생 60 <기원ㆍ덕담> 공연이 열렸습니다. 이날 공연은 국가무형유산 서도소리 전승교육사며, 국립국악원 민속악단 예술감독인 유지숙 명창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조선시대에는 ‘날틀’이란 말이 있었습니다. 일본 역사서인 《왜사기》에도 전라도 김제의 정평구라는 사람이 비거 곧 날틀을 발명하여 진주성 전투에서 썼는데 왜군들이 큰 곤욕을 치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당시 날틀은 지금으로 말하면 무인기라고 생각되는데 포위된 진주성과 외부와의 연락을 담당한 이 ‘날틀’은 마치 해일처럼 밀려오는 10만의 왜적 앞에서 진주성 사람들에게 희망 그것이었을 것이라고 장편역사소설 《진주성전쟁기》를 쓴 박상하 작가는 말합니다. 일제강점기와 광복 뒤 으뜸 한글학자였던 외솔 최현배 선생은 비행기를 “날틀‘이라고 해서 국수주의라고 비판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전 솜틀, 재봉틀처럼 기계를 ’틀‘이라 했고, 조선시대 이미 ’날틀‘이란 말이 쓰였음을 생각할 때 최현배 선생이 꼭 국수주의로 비판을 받아야 했는지 의문입니다. 굳이 날틀 대신 비행기라는 한자말을 써야만 유식한 것일까요? 나라 밖에서 새로운 문물이 들어오면 그 문물이 생긴 나라의 말을 쓰기보다는 우리에게 맞는 말을 만들어 써도 좋을 것입니다. <우리문화신문>은 ’스마트폰‘을 ’슬기말틀‘이라고 부릅니다. 중국 북경대학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