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을사늑약(乙巳條約)은 1905년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압하여 맺은 것으로, 외교권 박탈과 통감부 설치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한 조약입니다. 이 조약으로 대한제국은 명목상으로는 일본의 보호국이나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한성판윤ㆍ참정대신(參政大臣)을 지냈던 한규설은 이 을사늑약을 끝까지 반대해 파면되었지요. 그 뒤 일제가 준 귀족의 작위까지 거부한 채 집에 묻혀 살았습니다. 그 한규설이 1890년에 지어 살았던 집은 중구 장교동에 있었는데 그 집터는 현재 중구문화원과 을지로2가 파출소가 들어서 있지요. 그 한규설의 집은 도시개발에 따라 철거 위험에 있던 것을 국민대학교가 이 학교 후문 건너편으로 옮겼습니다. 아름다운 북한산 자락에 자리 잡은 한규설의 이 고택은 솟을대문ㆍ안채ㆍ사랑채ㆍ별채ㆍ행랑채ㆍ사당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남쪽으로는 녹야정ㆍ초당도 함께 있는 원형이 잘 살아있는 아름다운 한옥입니다. 이 고택은 새롭게 <명원민속관>이란 이름을 붙였고, 2013년부터 전통문화 풍류를 체험하는 마당으로 재탄생시켜 “풍류나누기 명인시리즈”를 열고 있습니다. 지난 9월 19일 이곳에선 국가문형문화재 제29호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오늘은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지고 서서히 음(陰)의 기운이 커진다는 24절기의 16째 ‘추분(秋分)’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추분을 그저 낮과 밤의 길이가 같다는 정도로 생각하고 있지만 옛 기록을 보면 한결같이 제사를 지낼 만큼 신성시 했던 날이지요. 특히 춘분과 추분 뒤에는 춘사일(春社日), 추사일(秋社日)이라고 해서 농사 시작 때는 농사가 잘되라는 마음으로 가을걷이 때는 오곡의 거둠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제사를 지냈습니다. 《정종실록》 1년(1399) 3월 1일 기록에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도 있습니다. “중추원 부사 구성우의 처 유 씨는 계집종 영생을 죽이는 등 악행을 저질러 사헌부에서 유 씨를 죽이기를 청하였다. 이에 임금이 ‘범한 죄가 크기는 하지만, 봄ㆍ여름은 만물이 생장하는 때라, 옛 법에도 죽이는 것을 꺼렸으니, 추분(秋分) 뒤를 기다려서 단죄하는 것이 어떻겠는가?’라고 했다.” 추분 때를 신성시했다는 얘기입니다. 추분은 해가 북에서 남으로 적도를 통과하는 때여서 낮밤의 길이가 같아지는데 이는 더함도 덜함도 없는 중용(中庸)을 뜻하는 것입니다. 살아가면서 중용을 지키기가 쉽지 않지만 중용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중요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절에서는 의식이 있을 때 절의 입구에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幢竿)’이라 하며, 이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幢竿支柱)’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가운데 옷감으로 만들었던 ‘당’은 오랜 세월 남아 있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당간지주’는 곳곳에 유물이 많이 남아있는데 그 까닭은 그 재료를 주로 돌이나 쇠 또는 금동을 썼기 때문입니다. 그 가운데 경북 경주시 보문동에는 보물 제123호 <경주 보문사터 당간지주>도 있지요. 이 당간지주가 있는 곳에서 ‘보문(普門)’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기와조각이 출토되어 이곳이 보문사라는 절이 있던 터임을 알게 해줍니다. 현재도 이곳에서는 금당터ㆍ쌍탑터ㆍ건물의 주춧돌 등 많은 유적과 유물을 발굴했다고 하지요. 높이 3.8m의 이 당간지주는 두 기둥이 62㎝ 정도의 간격을 두고 마주 보고 있으며, 양쪽 기둥 가운데 북쪽 기둥은 윗부분의 일부가 떨어져 나갔고, 남쪽만 완전한 상태로 남아있습니다. 지주에는 당간을 고정하기 위해 마련한 구멍이 위ㆍ가운데ㆍ아래 3곳에 있는데, 남쪽 기둥은 구멍이 완전히 뚫렸고, 북쪽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수원 화성은 조선시대 수원의 도심 전체를 둘러싼 전체 길이 5.4km 가량의 성곽입니다. 화성은 정조가 양주에 있던 사도세자의 능인 영우원(永祐園)을 화산(花山: 지금의 화성시에 있는 융건릉)으로 옮겨 이름을 현륭원(顯隆園)으로 고치고는 현릉원 능행을 위한 행궁을 지은 것이지요. 물론 화성 성곽 전체 길이는 처음 다산 정약용에게 설계를 명했을 때는 길이가 4.2km 정도였지만 1794년에서 1796년까지의 축성 과정에서 1km가 늘어났습니다. 성곽을 쌓을 때 부드러운 곡선 형태로 이어 들쭉날쭉 지은 것입니다. 화성의 건축 과정을 기록한 비석 ‘화성기적비’에는 “봄의 버들잎 같은 모양으로 지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팔달산 아래에 버들개천 곧 유천(柳川)이라는 땅이름이 있었는데 정조도 “성벽을 세 번 구부리고 세 번 꺾으면서 이름처럼 ‘내 천’자 모양이 됐다”고 평가했을 정도였지요. 성곽이 구부정하게 된 것은 정조가 영의정 채제공에게 화성을 쌓을 때 그곳에 살던 백성을 쫓아내지 말라고 명을 했던 데에 있습니다. 기존의 집을 피해서 성곽을 쌓자니 자연 꾸불텅하게 쌓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그뿐만이 아닙니다. 《화성성역의궤》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海禁開時國已愚(해금개시국이우) 바다 금지를 풀었을 때 나라 이미 어리석었으니 空聞關稅較錙銖(공문관세교치수) 부질없이 관세를 약간 붙인다고 들었네 漆箱磁盌知安用(칠상자완지안용) 옻 상자와 자기 사발을 어디에 쓸 것인지? 擲盡東南萬斛珠(척진동남만곡주) 동남쪽으로 만곡의 구슬을 다 던지는구나 이 시는 일제에 의해 나라를 빼앗기자 자결로써 항거했던 우국지사 매천 황현이 쓴 <발학포 지당산진(發鶴浦 至糖山津)>이란 한시입니다. 황현은 “문호 개방을 금지했던 바닷길을 개방하여 불평등 조약으로 외세가 들어오게 되었으니, 나라의 정책이 어리석었다.”고 말합니다. 또 “외국상품에 관세를 붙인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옻 상자와 자기 사발과 같은 사치품을 어디에 쓸 것인가? 사치품에 대한 댓가로 만곡의 구슬 같은 곡식을 다 던져 주다니.”라고 개탄하지요. 그렇다고 황현이 개화를 반대하여 무조건 “위정척사(衛正斥邪, 조선 말기 유학자들이 개화를 반대했던 사상)”를 고집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는 개화를 ‘개물화민(開物化民)’ 곧 물질문명의 발전이며 풍속과 제도의 변화를 뜻하는 것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매천 황현은 1910년 8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광복군은 한ㆍ중 두 나라의 독립을 회복하고자 공동의 적인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며 연합군의 일원으로 항전할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김구 선생이 1940년 9월 17일 충칭에서 광복군을 창설하면서 창립 취지로 한 말입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군대를 창설한다는 원칙하에, 1919년 「대한민국육군임시군제(大韓民國陸軍臨時軍制)」를 제정하였지만 임시정부가 여러 곳으로 피난처를 옮겨다니는 상황에서 실천에 옮기지 못하다가 겨우 1940년이 되어서 광복군을 창설하게 된 것입니다. 이때 광복군 총사령부는 총사령에 지청천(池靑天), 참모장에 이범석(李範奭)이 임명되었고, 총사령부 아래에 4개 지대(支隊)를 편성하였습니다. 그리고 광복군은 병력 모집을 위해 대원들이 일본군 점령 지역으로 들어가 그곳에 있는 한인 청년들을 대상으로 지원병을 모았지요. 그 결과 광복군 창설 1년여 만에 3백여 명에 이르는 병력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1941년 12월 8일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면서 미ㆍ일 사이에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임시정부는 12월 10일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게 됩니다. 또 김원봉(金元鳳)이 이끌던 조선의용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홀로 만향헌에 앉아서 서글피 인왕산을 마주했도다 하늘은 넓고 구름 빛도 맑은데 돌아간 기러기는 어느 때에 돌아올까“ 이는 효명세자(孝明世子, 1809~1830)가 명온공주(明溫公主)에게 보낸 편지로 한시에 음을 나란히 적고 한글 번역과 풀이를 달아 한글로 문자생활을 한 공주에 대한 따뜻한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효명세자는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가 세도를 부리던 순조(純祖, 재위: 1800∼1834) 때의 세자였지요. 그는 대리청정을 하면서 국정의 혼란과 민생의 파탄을 가져온 ‘세도(勢道)정치’를 누르고, 왕권을 회복하려 했지만 22살의 짧은 나이에 병으로 삶을 마감한 비운의 왕세자였습니다. 국립고궁박물관에서는 오는 9월 22일까지 “문예군주를 꿈꾼 왕세자, 효명” 특별전을 열고 있지요. 이 특별전에서는 효명세자가 아버지 순조를 대신해 정사를 돌본 3년 동안의 대리청정 기간(1827~1830)에 궁중 잔치와 궁중정재(呈才, 궁중잔치의 악기연주와 노래 그리고 춤), 궁궐 영건(나라가 건물이나 집을 짓는 것), 궁궐도 제작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이룩한 업적과 이러한 성과를 남길 수 있었던 배경으로 그의 성장 과정과 교육, 문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독자여러분!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으소서!!! < 우리문화신문 모두 드림 >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문화재청 창경궁관리소는 창경궁 풍기대(풍향을 관측하기 위해 깃발을 꽂아두는 받침돌) 주변에 대형 달 모형을 설치해 보름달을 연출한 ‘궁궐에 내려온 보름달’ 행사를 오는 12일부터 22일까지 열흘간 운영한다고 합니다. 또한 여러 딸림 행사도 함께 열릴 예정인데 특히 창경궁 대온실 앞에서 ‘달밤의 과학’을 엽니다. ‘달밤의 과학’은 달, 목성, 토성과 가을철 별자리를 관측할 수 있어 가을로 들어선 궁궐의 자연 속에서 역사와 과학문화를 함께 체험할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의 달은 고래등같이 덩실한 기와집 추녀 끝에 보름달로 걸터앉아서 토끼와 계수나무의 꿈이 되고 옛 구리거울의 그리움이 되고 은쟁반에 흘러넘치는 서러움이 되고 하였는데 여기 도시에서는 색 바래고 구겨진 광고종이 한 조각처럼 깜박거리는 네온등의 오색불빛에 파리해져버린 밤하늘 저켠에 겨우 붙어있습니다.” 중국 연변의 동포 석화 시인은 그의 시 “도시의 달 –누나에게”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전에 보름달을 보고 계수나무 아래서 토끼가 방아를 찧고 있다고 믿었지요. 어려웠던 시절에는 방아 찧는 상상만 해도 배가 불렀던 것입니다. 그런데 명절이 명절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귀신도 떡 하나로 쫓는다. / 귀신 떡 먹듯 한다. / 귀신에게 비는 데는 시루떡이 제일이다. / 아닌 밤중에 웬 찰시루떡이냐? / 귀신은 떡으로 사귀고 사람은 정으로 사귄다. / 떡 본 귀신이다. /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 / 떡이 있어야 굿도 한다." 우리 겨레는 이렇게 유난히 떡과 관련한 속담이 많습니다. 이틀 뒤면 우리 겨레의 가장 큰 명절 한가위입니다. 우리 겨레는 설이나 한가위 같은 명절은 물론이고 혼인이나 아기의 돌잔치 때에도 떡을 해먹었지요. 그런가하면 제사 때도 떡이 쓰였으니 떡과의 인연이 참으로 깊습니다. 그 가운데 송편은 대표적인 한가위 음식입니다. 그래서 조선 후기인 1849년에 펴낸 《동국세시기》에 한가위 때면 햇벼로 만든 햅쌀 송편을 먹는다고 했고, 1925년에 펴낸 《해동죽지》에도 한가위에 햅쌀로 송편을 빚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한가위와 송편의 관련 기록은 주로 근대 문헌에 보일 뿐입니다. 예전의 문헌 기록들을 보면 계절에 관계없이 특별한 날이면 빚어 먹던 겨레의 으뜸 떡이었을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19세기 초반의 문집인 《추재집》에는 정월 대보름에 송편을 놓고 차례를 지낸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