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한낮 땡볕 논배미 피 뽑다 오신 아버지 / 펌프 꼭지에 등대고 펌프질 하라신다 / 마중물 넣어 달려온 물 아직 미지근한데 / 성미 급한 아버지 펌프질 재촉하신다 / 저 땅밑 암반에 흐르는 물 / 달궈진 펌프 쇳덩이 식혀 시린물 토해낼 때 / 펌프질 소리에 놀란 매미 제풀에 꺾이고 / 늘어진 혀 빼물은 누렁이 배 깔고 누워있다." 고영자 작가의 시 '펌프가 있는 마당풍경'입니다. 무더운 여름날 펌프가 있는 마당 풍경이 한 폭의 수채화 같습니다. 이 펌프를 우리말로는 ‘작두샘’이라 합니다. 작두는 짚이나 풀 따위 사료를 써는 연장으로 작두질을 하듯 펌프질을 하면 물이 솟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겠지요. 아주 더 예전엔 물을 길어 올리는 우물이나 샘이 있었지만 지금처럼 수돗물을 쓰기 전에는 한동안 집집마다 마당가에 작두샘이 있었습니다. 작두샘은 압력작용을 이용하여 관을 통해 물을 퍼올리는 기계입니다. 널찍한 마당 한켠에 놓여 있던 작두샘은 싸구려 쇠로 되어 있어 검붉은 빛깔로 녹이 슬어 있었습니다. 그 작두샘으로 퍼 올린 물은 목이 마를 때 시원하게 마실 수 있는 것은 물론이요, 으스스할 정도로 시원하게 등목을 했으며 아이들은 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제주시 내도동은 반질반질하고 색이 다양한 조약돌로 이루어진 바닷가(알작지) 마을입니다. 이 마을에는 돌로 탑을 쌓아 큰 재앙을 막을 수 있다고 믿는 “거욱대[방사탑-防邪塔]”가 있는데 사람 키보다 높은 크기로 돌탑을 쌓아 올린 곳에 언뜻 보면 남성의 상징물 같은 뾰족탑이 서 있습니다. 내도동 거욱대는 제주시 유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이 밖에도 제주시 이호동, 북제주군 한경면 용수리, 남제주군 대정읍 무릉리 등에 38기의 거욱대가 남아 있으며, 그 가운데 17기가 민속자료로 지정되었습니다. 이 거욱대는 마을 어느 한 방향으로 불길한 징조가 비치거나, 풍수지리설에 따라 기운이 허하다고 생각되는 곳에 액운을 막으려고 세웠는데 거기에 더하여 마을의 안녕을 지키며 전염병과 화재 예방, 바닷일에서의 안전과 아이를 잘 낳게 한다는 속설까지 섞여 있어 섬지방인 제주의 고유신앙을 엿볼 수 있습니다. 거욱대는 마을에 따라 까마귀ㆍ극대ㆍ거왁ㆍ가매기동산ㆍ거웍ㆍ가막동산ㆍ액탑ㆍ매조자귀 따위로도 불린다고 하지요. 거욱대를 만들 때는 우선 큰 돌로 밑단을 둥글게 만든 뒤 그 안에 잔돌을 채우는데 속에 밥주걱이나 솥을 묻은 후 그 위에 사람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 심순택(沈舜澤)이 아뢰기를, ‘신들이 명령을 받들어 연호(年號)를 의논하여 정하였는데 <광무(光武)>, ‘경덕(慶德)’으로 비망하여 써서 들입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광무>라는 두 글자로 쓸 것이다.’ 하였다. 이는 《고종실록》 고종 34년(1897년) 기록으로 조선개국 506째인 122년 전 오늘(8월 17일) 연호를 광무로 결정한 것입니다. 이렇게 결정한 뒤 15일엔 임금의 조칙으로 개국 506년을 ‘광무원년’으로 하였으며, 17일에는 각국 외교사절들에게 연호를 광무로 고였음을 통보하는 한편, 원구(圜丘)ㆍ사직(社稷)ㆍ종묘ㆍ영녕전(永寧殿, 임금ㆍ왕비로서 종묘에 모실 수 없는 분의 신위를 모신 곳)ㆍ경모궁(景慕宮, 사도세자ㆍ헌경왕후의 신위를 모신 사당) 등에 건원고유제(建元告由祭, 나라의 연호를 정하고 신명에게 고하는 제사)를 올리고 죄인들을 특별사면 하였습니다. 또 10월에는 임금을 대군주(大君主)에서 ‘황제’로 승격시키고, 나라 이름을 ‘대한제국’으로 고쳐 나라 안팎으로 완전 자주독립을 선언했지요. 그리고 고종은 그동안 입던 붉은빛 곤룡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총독부 관원 및 평창군 서무주임 히구치 그리고 조용원, 조병선 등이 월정사에 머무르며, 사고와 선원 보각에 있던 사책(史冊, 《조선왕조실록》) 150짐을 강릉군 주문진으로 운반하여 일본 도쿄대학으로 직행시켰다. 간평리의 다섯 동민이 동원되었는데 3일에 시작하여 11일에 역사를 끝냈다.” - 《오대산 사적(오대산의 각 암자와 절들의 역사를 기록한 책)》 중에서 여기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오대산사고에 보관 중이던 《조선왕조실록》이 어떻게 일본으로 불법 반출이 되었는지를 알 수 있게 합니다. 1909년 조사에 따르면 오대산사고에는 《조선왕조실록》 761책, 《의궤》 380책을 비롯하여 모두 30,610책이 보관되고 있었다고 하지요. 그 가운데 《조선왕조실록》이 주문진에서 배에 실려 일본으로 직행한 것입니다. 도쿄대학에 《조선왕조실록》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혜문 스님은 ‘조선왕조실록환수위원회’를 만들어 이를 반환해달라는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반환 운동에 굴복한 도쿄대학은 문화재 약탈자로 지목받을 것이 두려워 ‘기증’이라는 형식으로 서울대학교에 반환했습니다. 서울대학교는 1932년부터 오대산사고본 실록 가운데 27책을 소장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어제는 무더위의 막바지를 뜻하는 말복(末伏)이었습니다. 복날 우리 겨레는 예부터 개고기를 즐겨 먹었습니다. 그 근거로 먼저 조선 순조 때의 학자 홍석모가 지은 《동국세시기》에 따르면 ‘사기’에 이르기를 진덕공(중국 진나라) 2년에 처음으로 삼복제사를 지냈는데, 4대문 안에서는 개를 잡아 해충으로 농작물이 입는 피해를 방지했다고 하였다."라는 내용이 전합니다. 제사상에 오르는 음식은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인 만큼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도 개고기를 일찍부터 식용으로 썼음을 말해줍니다. 또 17세기 중엽 장계향 선생이 쓴 《음식디미방》에는 “개장”, “개장꼬치누루미”, “개장국누루미”, “개장찜”, “누렁개 삶는 법”, “개장 고는 법” 등 우리나라의 고유한 개고기 요리법이 다양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정조 때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 상차림에 구증(狗蒸, 개찜)이 올랐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개고기는 임금님의 수라상에도 올라가는 음식이었음을 알 수 있으며, <농가월령가>에는 며느리가 친정에 갈 때 개를 삶아 건져 가는 풍습이 나옵니다. 이렇게 조선시대엔 개고기를 즐겨 먹었다는 근거가 여러 문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眼垂簾箔耳關門(안수렴박이관문) 눈은 주렴을 드리웠고 귀는 문을 닫았으니 松籟溪聲亦做喧(송뢰계성역주훤) 솔바람 시냇물 소리 또한 시끄럽구나 到得忘吾能物物(도득망오능물물) 나를 잊고 사물을 사물로 볼 수 있음에 이르렀으니 靈臺隨處自淸溫(영대수처자청온) 마음은 처한 곳에 따라 절로 맑고 온화해지네. 위는 조선전기의 학자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의 한시 “주제 이수(無題 二首)” 중 하나입니다. 눈꺼풀을 드리우고 보지 않으려 하고 귀는 문을 닫아 듣지 않으려 하지만 여전히 솔바람 소리와 시냇물 소리가 시끄럽게 들립니다. 하지만 나 자신을 잊고 자연과 하나 되는 경지에 이르자, 내 마음은 어디에 있든 절로 맑아지고 온화해집니다. 또 서경덕은 <무현금명(無弦琴銘)>이란 한시에서 “줄 없는 거문고에 거문고 소리는 없으나 진실로 소리가 없는 것이 아니라 고요함 속에 그 소리를 품고 있네.”라고 노래합니다. 그는 자연의 소리든, 악기 소리든 마음으로 들어야 제대로 들린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서경덕은 찢어질 듯 가난한 집안 출신인 탓에 스승도 없이 독학으로 깊은 학문세계를 이루었는데 그러한 그는 “공부하는 데 있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휴가를 맞아 시골에 갔다가 얼마나 더위가 심하던지 죽는 줄 알았어요.” 어떤 이가 입추가 다가온 어느 날 한 말입니다. 오늘은 가을 시작된다는 24절기 열셋째 입추(立秋)입니다. 이제 절기상으로는 가을철로 들어서는 때지만 아직 불볕더위는 기승을 부립니다. 《고려사(高麗史)》에 보면 “입하(立夏)부터 입추까지 백성들이 조정에 얼음을 진상하면 이를 대궐에서 쓰고, 조정 대신들에게도 나눠주었다.”라고 나와 있는데 이를 보면 입추까지 날씨가 무척 더웠음을 말해줍니다. 또 “입추에는 관리에게 하루 휴가를 준다.”라고 하여 된더위에 고생한 것을 위로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가을 절기에 들어섰어도 여전히 기승을 부리는 불볕더위 때문에 모두가 지치는 때지만 대신 이때의 불볕더위 덕에 하루하루 곡식은 튼실하게 여물어간다는 걸 생각하면서 참아내면 좋을 일입니다. 그리고 이제 서늘한 음기가 불볕더위 속에서도 잉태하고 자라고 있음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이 무렵에는 김매기도 끝나고 농촌도 한가한 때여서 이때를 “어정 7월 건들 8월”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이 말은 5월이 모내기와 보리 수확으로 매우 바쁜 달임을 표현하는 “발등에 오줌 싼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밤한울 구만리엔 은하수가 흘은다오 / 구비치는 강가에는 남녀 두 별 있엇다오 / 사랑에 타는 두 별 밤과 낯을 몰으것다 / 한울이 성이 나서 별하나를 쪼치시다 / 물건너 한편바다 떠러저 사는 두 별 / 秋夜長 밤이길다 견듸기 어려워라 / 칠석날 하로만을 청드러 만나보니 / 원수의 닭의소리 지새는날 재촉하네 / 리별이 어려워라 진정으로 난감하다 / 해마다 눈물흘러 흔하수만 보태네” 이는 1934년 11월에 나온 《삼천리》 잡지에 실린 월탄 박종화의 <견우직녀> 시입니다. ‘하늘이 성이 나서 별 하나를 쫓으시다’라는 말이 재미납니다. 그런데 까마귀와 까치가 오작교를 만들려고 하늘로 올라갔기 때문에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 칠월칠석만 되면 유달리 비가 내리곤 합니다. 다만 언제 내리냐에 따란 그 비의 이름은 다릅니다. 칠석 전날에 비가 내리면 견우와 직녀가 타고 갈 수레를 씻는 '세거우(洗車雨)'라고 하고, 칠석 당일에 내리면 만나서 기뻐 흘린 눈물의 비라고 하며, 다음 날 새벽에 내리면 헤어짐의 슬픔 때문에 '쇄루우(灑淚雨)'가 내린다고 합니다. 칠월칠석 아낙네들은 장독대 위에 정화수를 떠놓거나 우물을 퍼내어 깨끗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며칠 전 KBS 텔레비전에서는 “3.1운동 100주년특집 아리랑로드”라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이 방영되었습니다. 프로그램에는 특히 한국전쟁 참전용사들이 많이 등장했습니다. 특히 마이클 하울리 씨는 참전 기간 동안에 한국인으로부터 ‘아리랑’을 배웠다면서 아리랑을 직접 들려주었지요. 그러면서 “하루는 우연히 만난 한국인에게 내가 한국 노래를 들려주겠다며 아리랑을 불러주었더니 그는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을 흘렸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슬기전화(스마트폰)에 자신이 직접 불러 녹음해둔 아리랑이 많다고 했습니다. 또 엘비스키 한국전쟁참전용사협회 사무총장은 “아리랑은 한치 앞을 모르는 전쟁터로 나가는 병사들을 위로해 주었다. 아리랑은 한국인들의 가장 깊은 감정과 자유인으로서 하나됨을 표현하는 희망의 노래며, 사람들의 영혼을 표현한다.”라고 정의했습니다. 아리랑은 이렇게 미국인들까지도 감동으로 기억하고 부르는 사람이 많은 노래임을 프로그램은 얘기하고 있었습니다. 이 ‘아리랑’은 대한민국 국가무형문화재 제129호로 지정되었고, 2012년에는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대표목록에 올랐지요. 김연갑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는 “아리랑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일반적으로 그 논조는 총독부의 시정을 비난, 공격하고 세계 약소민족의 독립운동을 빙자하여 조선이 독립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풍자하고, 매사를 편견과 중상을 바탕으로 한 집필을 강행함으로써 멋모르는 민중으로 하여금 총독정치를 오해하게 하였다.” 이는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중외일보에 대해 기록한 내용입니다. 중외일보는 시대일보를 백산 안희제 선생이 동지들과 함께 인수하여 발행했는데 선생은 사장, 발행인 겸 편집인 등으로 활동하면서 잦은 압수와 정간처분 등 일제의 언론 탄압을 뿌리치고 젊은 기자들과 편집진의 항일 언론투쟁을 지원하였습니다. 134년 전 어제(8월 4일)는 백산 안희제 선생이 태어나신 날입니다. 백산 선생은 1916년 무렵 고향의 논밭 2천 마지기를 팔아 자본금을 마련하고, 부산 중앙동에 포목과 건어물 따위를 파는 백산상회(白山商會)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1918년 주식회사로 바꾸었는데 백산무역주식회사는 독립운동자금을 위한 나라 안 독립운동기지로 삼기 위해 영남지역 지주들이 여럿 참여해 조직한 대규모 무역회사였습니다. 이때 함께한 이들은 경주 최부자집 주손 최준, 경상우도관찰사를 지낸 윤필은의 아들 윤현태 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