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 일본 도쿄 고려박물관 운영위원인 마츠자키 에미코(松崎恵美子) 씨로부터 며칠 전 전화가 걸려왔다. 마츠자키 씨는 고려박물관 근황과 함께 현재 전시 중인 ”한센병과 조선인(ハンセン病と朝鮮人) - 차별을 살아내며(差別を生きぬいて) - (이하 한센병과 조선인으로 약칭)”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지난해 여름 도쿄에 갔을 때 ‘한센병(나병) 전시 기획 중’ 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올 초 생각지도 못한 코로나 감염병으로 전시 준비에도 애를 먹은 모양이다. 마츠자키 씨는 ‘한센병과 조선인’ 전시 기간은 6월 24일부터 12월 27일까지이며 예약제로 관람할 수 있다고하면서 전시장 모습과 자료 등을 사진과 누리편지로 챙겨 보내왔다. 코로나19가 없었다면 벌써 두어 번 이상은 한국에 다녀갈 정도로 한국을 사랑하는 마츠자키 씨는 “일본도 코로나19 재확산으로 비상 상태”라고 했다. 마츠자키 씨가 보내온 ‘한센병과 조선인’ 자료를 꼼꼼히 읽어 보았다. 왜 고려박물관은 이런 전시회를 기획했는가? 그 답은 다음과 같다.(필자가 일본어를 번역하여 정리한 내용임) “일본은 19세기 후반 이래 식산흥업(殖産興業),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이뤄 국제사회의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눅눅한 장마철이라 그런지 집안이 몹시 습하다. 가죽가방이나 허리띠에 곰팡이가 피어오르는가 하면 부엌에서 쓰는 대나무 채반에도 곰팡이가 한가득 피었다. 연일 내리던 비가 잠시 멈춘 날, 간만에 마을 앞산을 산책했다. 앞산이라고는 했지만 거의 공원 수준인 앞산은 그동안 비 때문에 산책 못 한 사람들이 제법 나왔다. 산길을 걷노라니 예전에 눈에 띄지 않았던 이끼가 나무 밑둥 쪽으로 쫙 깔렸다. 푸르른 모습이 제법 볼만하다. 이끼를 바라다보고 있자니 교토의 서방사(西芳寺, 사이호지)가 떠오른다. 서방사는 이끼가 많다고 해서 아예 이끼절(苔寺, 코케데라)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적절한 표현일지 몰라도 “이끼 하나로 먹고 사는 절”이라고 해도 지나친 표현이 아닐 만큼 서방사의 이끼는 유명하다. 이끼 종류만 무려 120종이라니 그저 놀랄 따름이다. 지금은 이 절을 찾아가기 위해 절차가 필요하다. 이끼 낀 정원을 보기 위해 밀려드는 관광객을 제한하려는 방법으로 왕복엽서에 방문 일자를 써서 절에 신청한 뒤 답장을 받아야 비로소 입장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명치 초기(1868년)만 해도 서방사는 폐허 상태였다. 명치왕(明治天皇)이 이른바 신불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오늘이 8월 5일, 슬슬 눈앞에 9일이 다가왔다. 8월 9일 하면 한국인들은 별 감흥이 없을지 모르나 일본인들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을 떠올린다. “1945년 8월 9일 오전 11시 2분. 나가사키시에 투하된 원자폭탄은 한순간에 도시를 폐허로 만들고 수많은 시민과 소중한 목숨을 앗아갔다. 다행히 목숨만은 건진 피폭자들에게도 평생 치유될 수 없는 마음과 몸의 상처, 방사선으로 말미암은 건강장해를 남겼다. 우리는 이러한 희생과 고통을 잊지 않을 것이며 이에 심심한 애도의 뜻을 바친다. 우리는 원자폭탄에 의한 피해의 실상을 나라 안팎에 널리 알리고 후세에 전할 것이며 이러한 역사를 교훈 삼아 핵무기 없는 영원히 평화로운 세계를 구축할 것이다.” 1996.4. -국립 나가사키 평화자료관 홍보물- 나가사키에는 두 개의 자료관이 있다. 하나는 일본정부 돈으로 만든 ‘국립 나가사키 평화자료관’이고 다른 하나는 양심 있는 시민들이 만든 ‘오카마사하루 기념관(나가사키 평화자료관)’이 그것이다. 국립 나가사키 자료관은 위 설명처럼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에 대해 ‘연합국이 일본 시민의 죄 없는 목숨을 앗아간 흉악한 짓’ 쯤으로 포장해놓고 있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서대문형무소수형자카드)를 살펴보면 ‘국가총동원법위반(國家總動員法違反)’을 위반했다는 죄로 잡혀들어간 사람들이 많다. 강간난(姜干蘭) 지사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 황해도 평군 고북면 서오리가 고향인 강간난 지사는 1908년 10월 27일생으로 그가 언제부터 경성부 창신동으로 이주해 와서 살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강간난 지사는 32살 되던 해인 1942년 7월 9일 경성지방법원으로부터 국가총동원법위반으로 징역 6개월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갇히는 몸이 된다. 김귀현 지사도 마찬가지다. 37살 때인 1943년 11월 1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8개월을 선고받고 역시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강간난, 김귀현 지사를 잡아넣은 ‘국가총동원법’이란 1938년 4월 1일, 일본에서 공포한 법으로 5월 10일 조선에도 적용되었다. 국가총동원법이란 말 그대로 전시(戰時)에 모든 물자ㆍ산업ㆍ인원ㆍ단체ㆍ근로조건ㆍ생산ㆍ유통구조ㆍ출판ㆍ문화ㆍ교육을 통제ㆍ징발ㆍ징용할 수 있게 한 법이다. 국가총동원법을 두 가지 측면으로 요약하면 첫째가 조선인의 황국신민화를 통한 내선일체화이며, 둘째가 전시(戰時) 체제의 확립이다. 예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서대문형무소에 잡혀들어간 독립운동가들의 ‘수형자카드’를 작성했던 일본인 순사(경찰관)들의 수준은 어느 정도였을까? 나는 서대문형무소 ‘수형자카드’를 정리하면서 오랫동안 이 점을 숙제처럼 머릿속에 담고 있었다. 일제강점기 순사들의 수준을 의심하게 된 계기는 바로 한 장의 수형자카드 때문이었다. 핼쑥한 모습의 ‘유고두’ 지사는 충남 공주군 정안면 운궁리 출신으로 1898년 9월 4일생이다. 기미년 3월 만세 운동 때 유고두 지사는 21살이었고 직업은 농사꾼이었다. 3월 1일 서울을 시작으로 전국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공주군에서도 4월 1일 대대적인 만세시위가 있었다. 이때 유고두 지사는 공주 만세시위에 참여하다 일경에 잡혀 징역 8개월을 선고받고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당시 서대문형무소에 잡혀들어온 조선인은 누구나 예외 없이 수형자카드에 신상을 기록하게 되어있는데 카드 앞면은 사진과 함께 씨명(이름), 연령, 키, 특징을 적는 칸이 있고 뒷면에는 본적, 출생지, 주소, 신분, 직업, 죄명, 형기(刑期), 언도년월일, 언도재판소, 집행감옥, 출옥년월일 등을 적게 되어있다. 문제는 유고두 지사의 한자 이름이다. 순사들은 수감자의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강원도 홍천 수타사(壽陁寺)로 이르는 길목에는 제법 굵은 소나무들이 나란히 숲을 이루고 있다. 이 숲으로 들어선 사람은 이내 몇 발자국 안 가서 <역사의 상처를 안고 자라는 소나무>라는 안내판과 마주친다. 홍천군에서 만든 안내판에는 “일제강점기 말 자원이 부족한 일본은 송탄유(松炭油)를 연료로 사용하기 위해 한국인을 강제 동원하여 송진을 채취하고 남은 모양이 V자로 깊게 파인 당시의 상처는 지금까지 아물지 않은 수탈의 흔적”이라고 쓰여 있다. 순간 움푹 팬 소나무 상흔이 가엾은 생각마저 든다. 여기서 말하는 송탄유(松炭油)란 송유(松油) 또는 송근유(松根油)라고도 하는데 일본에서는 쇼콘유(松根油)라고 한다. 전쟁의 광풍 속에서 일제는 1940년대 말 극심한 석유 부족 사태를 만나게 되는데 이때 석유 대용품으로 쓰고자 고안한 것이 송진에서 추출한 송탄유다. 송탄유는 비누나 도료 등 생필품 원료는 물론, 군용기 기름으로도 유용한 전쟁 물자였다. 따라서 조선총독부는 지역별로 할당량을 정해주고 조선인들을 송진 채취에 동원했다. 홍천 수타사의 소나무도 이때 칼질을 당했다. 해인사, 안면도 등등에도 현재 홍천 수타사와 같은 ‘송진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일본 열도에 집중호우가 내려 전국이 물난리로 야단이다. 큐슈 일대 일본 남부지방을 강타한 집중호우로 사망자는 ‘구마가와’마을(球磨村)의 노인요양원인 천수원(千寿園)에서 숨진 14명을 포함하여 ‘히도요시’시(人吉市) 17명 등 모두 49명이다. (7월 6일 밤 11시 현재) 이곳은 산사태 등으로 연락이 끊기거나 도로 등의 파손으로 피해 상황이 제대로 파악되지 않고 있는 가운데 약 2,600세대 정도가 고립상태에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번 집중호우로 122만 명이 시 당국으로부터 피난 지시를 받은 상태다. 아사히신문이 7일 아침, 헬기로 피해지역을 돌아본 영상에 따르면 후쿠오카 최남단 ‘오오무타’시(大牟田市)의 경우 도시 전체가 물바다로 지붕만 빼꼼히 드러나는 건물이 많았다. 물에 잠긴 주택은 물론이고 세워둔 자동차도 둥둥 떠다니는가 하면 사람들은 구명보트를 타고 안전지대로 피난하고 있는 모습 등으로 부산해 보였다. 그런가 하면 ‘구마모토’현(熊本県)은 구마가와강(球磨川)이 범람하여 큰 피해를 보았다. 구마가와강(球磨川)의 범람 문제로 구마모토일일신문(熊本日日新聞)에서는 가바시마이 이쿠오(蒲島 郁夫) 현지사(県知事)에게 댐건설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야후제팬에는 ‘모두의 의견’이라는 꼭지가 있다. 여기에는 다양한 질문이 있으며 독자들의 투표로 순위를 매겨 실시간으로 발표한다. 이 꼭지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일본 사회의 뜨거운 관심사가 무엇인지를 엿볼 수 있어 흥미롭다. 그렇다면 2020년 6월 30일, 독자들이 뽑은 1위부터 10위까지 관심사가 무엇인지 살펴보자. 1위 코로나로 긴급사태 선언 해제 뒤 1주일에 며칠이 출근일로 적당한가? 2위 코로나19의 2차 확산에 대해 대비하고 있는가? 3위 나들이 때 마스크를 쓰고 있는가? 4위 국내여행 언제부터 가려고 생각하나? 5위 정부 특별재난지원금 10만 엔을 받았는가? 6위 음식점에서 점주에게 맛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 7위 편의점의 비닐봉지 유료화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는가? 8위 코로나19를 대비하여 식료품 비축의 변화는? 9위 코로나19 계기로 택배가 늘었는가? 10위 코로나19 대책으로 체온을 잘 재고 있는가? 독자투표 결과 상위 10개 가운데 코로나19 관련이 아닌 것은 6위의 ‘음식점에서 맛없는 음식이 나왔을 때 주인에게 맛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와 7위의 ‘유료 비닐봉지에 대한 의견’을 빼고 8개가 모두 코로나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코로나19’로 일본 최고의 마츠리(축제)로 꼽히는 교토의 기온마츠리(祇園祭)도 중지한다는 발표가 나왔다. 코로나19가 아니었다면 교토는 7월 1일부터 한 달 내내 축제 분위기였을 테지만 올해는 아쉽게도 기온마츠리 구경은 접어야 할 판이다. 그렇다고 기온마츠리 자체를 취소하는 것은 아니며 기온마츠리의 절정인 17일에 실시하는 가마행렬(山鉾巡行)이 중지된다는 것으로 축제기간(7월1일 ~31일) 내내 크고 작은 다채로운 행사는 그대로 진행된다. 교토의 3대 마츠리라고 하면 5월 15일의 아오이마츠리(葵祭), 7월 17일의 기온마츠리(祇園祭), 10월 22일의 지다이마츠리(時代祭)를 꼽는다. 오래된 순서를 꼽으라면 올해를 기준으로 아오이마츠리(568년), 기온마츠리(864년), 지다이마츠리(125년) 순이지만 가장 화려하고 볼만하다는 평을 듣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기온마츠리(祇園祭)다. 기온마츠리의 유래는 돌림병이 퍼지지 않도록 신에게 기도하는 의례에서 생겨났다. 지금부터 1,100여 년 전 교토에 돌림병이 크게 번져 죽는 사람이 속출했는데 오늘날과 같은 돌림병 대책이 없던 당시에는 돌림병 발생을 신 곧 우두천왕(牛頭天王, 일명 스사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군함도>는 나가사키항에서 18km 떨어진 섬으로 1887년부터 1974년까지 석탄 채굴을 하던 곳이다. 1890년 미츠비시가 이 섬을 매입해 해저광산으로 이용했는데 미츠비시는 1916년 급증하는 노동자를 수용하고 태풍으로 인한 파손을 막기 위해 일본 최초의 콘크리트 구조 대형 아파트(9층 규모) 단지를 건설하기도 하였다. 탄광으로 최전성기였던 1960년에는 5,300명이 거주할 만큼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인구밀도가 수도 도쿄의 9배가 넘을 정도였다. 탄광이나 금광지역이 활황기 때에는 언제나 광부와 그 가족들 그리고 돈벌이를 찾아 몰려든 사람들로 만원을 이루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군함도>가 단순한 일본인들의 돈벌이 장소였다면 오늘 우리와는 별 관계가 없는 곳이지만 그러나 이곳은 일제강점기 때 수많은 조선인이 강제징용으로 끌려가 허리 한번 펴보지 못하고 석탄을 캐다 숨져 간 곳이기에 우리에게는 치욕의 장소다. 해저 700m에 있는 지옥 같은 탄광 속에서 조선인들은 12시간씩 2교대로 구부린 채 탄을 캐 날라야 했다. 탄광 일이란 갱이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열악한 작업 환경이라 한 달에 적게는 수명씩 많으면 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