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했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어쩌면 그것은 유럽인들의 시각으로 해석한 발견이고 실제로는 아메리카 대륙에는 수만 년 전부터 원주민이 사는 평화로운 마을이었으니 원주민의 처지에서 보면 발견이 아니고 침입이라는 표현이 옳습니다. 1492년 10월 12일, 바하마 제도의 한 조그만 섬에 사는 벌거숭이 인디언들 앞에 느닷없이 커다란 날개를 편 배 세 척이 나타납니다. 그것은 인디언들이 일찍이 본 적이 없는 '괴상한 물건'이었지요. 조그마한 배가 큰 배에서 내려지더니, 살갗이 흰 사람들이 뭍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들은 인디언들의 코에 걸고 있는 황금 고리를 무척 가지고 싶어 했습니다. 인디언들은 남쪽으로 멀리 떨어진 섬에 황금을 많이 가진 종족이 살고 있다고 손짓으로 알려주자 백인들은 서둘러 그곳을 떠났습니다. 훗날 백인이 다시 찾아와 부서진 배 한 척과 선원 44명을 남겨 두고 떠났습니다. 인디언들은 섬에 남은 백인들을 아주 잘 대해주었지요. 인디언들은 순진했고, 욕심도 없어서, 백인들이 무엇을 달라고 하면 망설임 없이 내주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인디언들은 백인을 멀리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공자가어(孔子家語)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 공자가어(孔子家語) : 논어(論語)에 빠진 공자의 일화를 기록했다는 고서 芝蘭生於深林 지란생어심림, 不以無人而不芳 불이무인이불방 “깊은 산 속의 영지와 난초는 사람이 찾아오지 않는다고 해서 향기가 없는 것이 아니다.” 꽃이 화려한 이유는 번식을 위해서입니다. 벌레와 새를 유인하여 수정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죠. 원시시대에는 고사리와 같이 씨와 꽃 없이 포자로 번식하는 식물이 많았지만, 지금은 화려하게 자신을 치장하여야 번식에 성공할 수 있으니 화려함은 처절함의 다른 표현일 수 있습니다. 식물은 좋은 환경을 찾아 움직일 수 없고 단지 평생을 한자리에서 기다리기만 해야 하니까 누군가가 자신을 바라봐주기를 바라며 한세월을 지내야 하니까... 그것이 쉽지만은 않을 겁니다. 그럼에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다고 향기가 없는 것은 아니니 항상 준비하는 모습이 가슴 아리게 다가옵니다. 남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서 사람의 인품과 학식이 사라지거나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스스로 자신을 닦고 자신의 길을 가면 자연히 그 향이 퍼지게 되겠지요. 자신의 신념은 쉽게 저버리기 어렵습니다. 때로는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포장도로 위에 줄지어 선 은행나무가 누릇한 가을 냄새를 풍기고 마알간 주황색으로 물들어가는 감나무가 가을을 재촉합니다. 산 위에 단풍나무는 성급하게 물들어 버렸고 어디를 봐도 풍성함으로 가을이 깊어가고 있습니다. 가을은 풍성함도 좋지만, 나뭇잎이 시들어 떨어지는 계절이기도 합니다. 여름내 정들었던 잎과의 이별의 계절이기도 하고 모든 것을 비워내고 허(虛)의 세계로 돌아가는 때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부족함이란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어쩌면 살아가면서 남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부족함이 시작되었는지도 모릅니다. 후진국 가난에 허덕이는 나라의 주민들보다 서구의 부유한 선진국에 사는 사람들이 더 불행하다고 느끼는 것을 우린 한 번쯤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부와 권력, 명예와 지위를 많이 가지고 있을수록 성공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헤아릴 수 없는 부와, 나는 새를 떨어뜨릴 수 있는 권력 남부럽지 않은 명예와 만인지상의 지위가 행복을 담보해주지는 않습니다. 진정한 성공은 자신의 인생에서 스스로 행복을 찾을 때 찾아오는 것이지요. 제 인생에도 가을이 왔습니다. 어쩌면 앞만 보고 달려온 세월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등산하다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참나무는 나무의 이름이 아닙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참나무란 나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신갈나무, 떡갈나무, 갈참나무, 졸참나무, 상수리나무, 굴참나무 등을 아울러서 참나무로 부르고 있으니 말이지요. 그 참나무들의 열매인 도토리가 산야에 지천입니다. 통통하고 매끈한 도토리를 보고 있노라면 절로 마음이 풍성해집니다. 식물은 대단히 훌륭한 생존전략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도토리의 전략은 허접하기 그지없습니다. 단지 열매를 둥글게 만들어 떨어지는 힘에 의지하여 좀 더 멀리 보내 우 연에 의해 싹틈을 기대하는 것과 청설모 다람쥐의 먹이를 통한 이동으로 그들에게 먹히거나 아니면 보관된 장소가 그들의 뇌리에서 잊히기를 바라는 다소 위험한 생존전략을 갖고 있습니다. 자연에 있어서 식물의 씨앗은 참으로 대단합니다. 그 조그만 열매 안에 식물의 완전체가 이미 유전인자로 채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좋은 생존전략은 씨앗은 아주 작게 만들어서 다량으로 멀리 퍼뜨리는 전략입니다. 하지만 도토리는 그러기에는 너무나 크고 단단합니다. 잘 정비된 생존전략이라고 하기엔 부족함이 많지요. 그들의 대부분은 벌레에 파먹히거나 썩어서 없어지고 일부는 동물의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능서불택필(能書不擇筆)’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글씨를 잘 쓰는 이는 붓을 가리지 않는다는 뜻으로, 경지에 오른 사람은 도구나 재료에 구애받지 않고 자기 실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음을 이르는 말입니다. 훌륭한 목수는 연장을 탓하지 않는다는 말과 상통하고 뒤집어 말하면 선무당이 장구 나무란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하지만 실력이 중요한 만큼 그에 못지않게 붓도 중요합니다. 거친 갈필(葛筆, 칡뿌리로 만든 붓)로 위대한 작품을 남길 수는 있지만 좋은 붓, 잘 만들어진 명품이 좋은 작품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됩니다. 뛰어난 사진작가가 좋은 렌즈를 위하여 돈을 아끼지 않는 까닭이고 목수가 좋은 연장을 구하기 위하여 애쓰는 까닭이며 훌륭한 연주자가 값비싼 악기를 사는 까닭이지요. 중요한 것은 아무리 좋은 명품이 손에 쥐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실력이 없으면 무용지물과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지요. 서예가에게 기천 만 원짜리 바이올린이 필요 없듯이 바이올리니스트에게 명품 붓이 필요 없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요즘 일반적인 붓은 양털로 만든 양모필(羊毛筆)입니다. 붓 중에서 셋째로 치는 것이 황모필(黃毛筆) 곧 족제비 꼬리털로 만든 것이고 둘째로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한자 서예는 ‘전예해행초(篆隷楷行草)’ 곧 전서(篆書)ㆍ예서(隷書)ㆍ해서(楷書)ㆍ행서行書)ㆍ초서(草書)로 분류합니다. 글자의 발전과 흘려 쓰는 정도에 따른 분류법이지요. 개인적인 차이는 있지만 저는 ‘예서(隸書)’를 가장 좋아합니다. 제가 예서를 좋아하는 이유는 고풍스런 맛과 획의 수려함, 가로획이 주는 웅혼함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예서체는 노예들이 발전시킨 서체입니다. ‘隷’자가 노예 ‘예자’거든요. 사회 초년병 시절에 아이들에게 한자 빽빽이를 시킨 적이 있습니다. 물론 효과가 적지는 않았지만, 억지 반복 속에서 학습효과를 기대할 수 없어 중간에서 그만둔 것이 생각납니다. 인쇄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시기에 책을 소장하기 위해서는 필사가 가장 일반적이었을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같은 내용을 베껴 적어야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요. 그 귀찮은 일을 노예에게 시켜서 하게 합니다. 그것이 예서체가 발달하게 된 배경입니다. 고문은 수많은 판본이 존재합니다. 그 까닭은 필사하면서 잘못 베낀 이유도 있고 진시황의 분서갱유 사건 이후로 흔적도 없이 사라진 책을 단지 머릿속에 기억돼있는 지식을 중심으로 다시 기록했기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제주도에 갔을 때 마상 무예를 본 적이 있습니다. 대부분 몽골 출신의 출연자들은 말 위에서 서고 매달리고 심지어 물구나무서기도 하는 등 고난도의 마상 무예를 보여주었습니다. 말과 하나 되어 자유자재로 공연을 펼치는 것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훌륭한 승마자는 말이 아무리 날뛰어도 말에서 떨어지거나 위험에 빠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승마자의 몸이 말의 움직임에 자연스럽게 대응하기 때문입니다. 바닷가에서 파도타기 하는 써핑족을 봅니다. 파도를 잘 타는 사람은 파도에 맞서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파도에 몸을 맡기고 그 힘을 이용하여 자연스럽게 흐르는 사람입니다. ‘우생마사(牛生馬死)’라는 말이 있습니다. 요즘처럼 큰물이 나서 소와 말이 떠내려갈 때 소는 살아남지만, 말은 익사하고 만다는 뜻입니다. 대부분 네발 달린 짐승들은 수영을 배우지 않아도 생득적으로 헤엄을 칠 줄 압니다. 고여 있는 물이라면 소나 말 모두 헤엄쳐 난관을 극복합니다. 그런데 큰물에 빠졌다면 문제가 달라지지요. 말은 근육질로 이루어진 만큼 헤엄은 소보다 훨씬 빠릅니다. 그런데 왜 빠른 말은 익사하고 느린 소는 살아나올까요? 말은 물살을 이겨내려 애씁니다.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원소는 조조와 대전을 벌이기 전에 진림에게 명하여 조조의 죄상을 성토하는 격문을 쓰도록 명합니다. 【조조의 할아버지 중상시 등은 좌관과 서황과 더불어 요사스러운 짓거리를 하고 탐욕스럽게 수탈을 일삼는 횡포를 부렸다. 그 아버지 승은 균지를 구걸하여 양자가 되었고, 뇌물을 바치고 벼슬을 샀는데 권문세가에 뇌물을 바치고 요직을 꿰차고 중요한 인물들을 쫓아냈다. 조조는 환관에게 양자로 들어간 더러운 씨알로 본래 덕을 쌓지 않았고 경박하고 교활하여 무기를 제멋대로 휘두르며 난리를 좋아하고 재난을 즐겼다.】 작성된 격문은 곧바로 허도의 조조에게 전해집니다. 격문을 접한 조조는 갑자기 모골(毛骨)이 송연(悚然)해지며 온몸에 식은땀이 흘러내리지요. “누가 이 격문을 작성했느냐?” “진림이란 자가 지었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들은 조조는 웃으며 말합니다. "격문 속의 일들은 반드시 무략이 있어야 이룰 수 있다. 진림의 글은 비록 아름답지만 원소의 무략이 모자라니 어쩌겠느냐?" 훗날 조조가 기주를 공격하여 진림을 포로로 잡은 뒤 물었습니다. “경이 이전에 지은 글을 보면 죄상은 나 혼자만의 것이고, 악인에 대한 통박도 내 몸에서 그칠 일이거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지구의 나이는 약 46억 년이라고 합니다. 지구상에 현생 인류가 처음 출현한 것이 약 300만 년 전이라고 하지요. 그리고 진정한 의미인 현생 인류 호모 사피엔스가 출현한 것이 4만 년 전이랍니다. 그것을 계산하면 지구 나이의 0.00086%만큼만 인류가 살아왔다는 이야기지요. 그 4만 년의 기간에도 문자가 없었던 시기를 선사시대라고 하고 문자가 발명되어 기록으로 남긴 때부터를 역사시대라고 하는데 대략 BC 5000년을 기준으로 합니다. 선사시대는 문자가 없기 때문에 출토된 유물을 갖고 생활상을 유추할 수밖에 없습니다. 뗀석기니 간석기니 청동기니 철기니 하는 것들이 그것이지요. 문제는 남아있는 것들이 썩거나 없어지지 않는 물질들인 것이고 그 외 쉬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것은 속단이나 예단할 수 없어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무인도나 야생으로 돌아간다면... 오랜 시간 걸리는 돌을 다듬거나 흙을 빚어 그릇으로 사용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합니다. 취하기 쉬운 나뭇잎으로 그릇을 만들어 쓰거나... 무른 목질의 재료를 이용하여 도구를 만들어 쓰겠지요. 문제는 그 일상의 재료들이 오랜 세월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이고 그런 이유때문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모든 식물은 뿌리를 내릴 땅이 있어야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것이 옥토이든, 바위 틈새이던, 화분이던 간에 말이지요. 가끔 집안에 놓인 화분을 보며.. 좀 더 너른 공간에 좀 더 많은 햇볕과 자연을 접하지 못하고 성장을 제한당하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개인의 정서적 안정감과 행복을 위하여 식물을 홀대하지는 않은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을 대하지만 식물의 본성과는 거리가 먼 경우가 많으니까요. 특히 석부작(石附作)이니 목부작(木附作)이니 하는 아주 식물에게 필요 최소한의 영양을 공급하면서 그 살아있음의 아슬아슬함을 즐기는 경우도 많습니다. 저는 분재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물론 예술원에 가서 팔뚝만 한 굵기로 자라 최소화한 크기(미니멀사이즈)의 멋진 풍광을 연출하고 있는 것을 보면 시간 속에서 조금씩 이뤄놓은 성취물이 감탄으로 다가오긴 하지만 분재를 사거나 기를 생각은 없습니다. 그만한 돈도 없을뿐더러…. 기르다가 십중팔구는 고사시킬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잠시 인간의 눈요기를 위하여 삶을 재단 당하고 이리 꼬이고 저리 비틀리며 팔다리를 잘리고 성장을 방해받고 인고의 세월을 견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