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대체로 독일어라는 것은 딱딱하고 정감이 없는 개념어 일색이란 비판을 듣지만 때로는 매력이 있어 보이는 경우도 있다. 어쩌면 그 언어도 중국의 한자와 비슷한 구성법을 갖고 있을 때의 이야기이다. ‘Fernseh’라는 단어가 있다. ‘fern’은 멀다(遠), ‘seh’는 보다라는 뜻의 동사 ‘sehen’에서 나온 말로 ‘봄(視)’ 이란 뜻이니까 이 단어는 멀리서 보는 것이란 뜻의 텔레비전이 된다. 중국에서는 전기를 통해 멀리서 볼 수 있는 것이란 뜻으로 電視(전시)라는 말이 텔레비전의 번역어로 쓰인다. 같은 원리로 ‘Fernweh’가 있다. ‘weh’는 ‘불다, 전달하다’라는 뜻의 ‘wehen’에서 나온 말이니까 멀리 전달되는 그 무엇, 곧 ‘동경(憧憬)’이란 뜻이 된다. 그러면 ‘Fernweh’는 먼 데에 대한, 먼 곳에 대한 그리움이란 뜻이 된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유명한 여성 수필가 전혜린의 ‘먼 곳에의 그리움’이란 글이 생각이 나서이다. 먼 곳에의 그리움 그것이 헛된 일임을 안다 그러나 동경과 기대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무너져 버린 뒤에도 그리움은 슬픈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인생의 시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조선왕조 제10대 임금인 연산군 7년에 태어나 중종과 인종, 명종을 거치며 뛰어난 학문과 성실한 생활로 관직에서 승승장구하던 톼계 이황이 고향으로 물러가려는 뜻을 구체적으로 실행하기 시작한 것은 46살 때이다. 이 때에 이황은 그의 고향인 토계(兎溪)에 양진암(養眞庵)이라는 조그만 암자를 지어 자신의 학문연구의 처소로 삼는데, 이를 계기로 동네이름도 토계에서 퇴계로 바꾸고 스스로의 호(號)도 그것으로 한다. 토계(兎溪)라는 말은 토끼가 뛰어노는 골짜기라는 뜻이라면 퇴계(退溪)는 ‘물러가 있는 골짜기’라는 뜻이 되어 이 조그만 골짜기는 미물이 뛰어 노는 자연적인 공간에서 갑자기 사람, 그것도 높은 뜻을 지닌 선비가 주인공이 되는 인문적인 공간으로 변한다. 그리고는 지금부터 450년 전인 1569년 4월 퇴계는 서울에서부터 고향집으로 아주 내려간다. 거기서 터를 잡고, 중앙 정계의 소용돌이를 멀리하고, 자연 속에서 우주와 인간의 근본을 보다 철저히 찾아내고 이를 삶 속에서 어떻게 구현하는지를 몸으로 보여주었다. 뜻있는 분들이 이 귀향을 기리기 위해 재현단을 만들어 올해 4월에 서울에서부터 안동 도산 토계까지 걸으면서 선생의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은박지 그림으로 유명한 화가 이중섭(李仲燮, 1916~1956)을 우리는 기억하며 그의 작품을 좋아한다. 그런데 조선시대 중기에도 이중섭이라고 불리는 화가가 있었다. 바로 대나무 그림으로 유명한 이정(李霆, 1541~1622)이란 분이다. 이름이 이정인데 어떻게 이중섭이라고 하는가? 바로 그의 자(字), 곧 어릴 때의 이름이 중섭(仲燮)이었던 까닭이다. 조선시대에는 이름대신에 호를 많이 불렀지만 친한 사이에서는 자를 그대로 불렀으니까 이중섭이라고 해도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 조선시대 이중섭은 탄은(灘隱)이라는 호로 더 잘 알려져 있는데, 세종대왕의 현손, 곧 4대 손자 곧 고손이었다. 그는 시ㆍ서ㆍ화에 뛰어났고 특히 묵죽(墨竹), 곧 먹으로 치는 대나무 그림은 당대 최고로 이름을 떨쳤다. 간송미술관에 소장돼 있는 이 대나무 그림을 보면 그가 왜 이름을 떨쳤는지를 알 수 있다. 그림 가운데에는 진한 먹으로 그린 대나무가 한 그루 있고, 그 뒤로 연한 먹(淡墨)으로 그린 대나무 서너 그루와 화면 밑쪽에 거칠고 억센 필치의 바위가 있다. 이 그림은 우리가 흔히 보듯 꼿꼿한 대나무 줄기를 굵게 그려 넣는 그림들과는 달리 줄기도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국화의 향기가 은은하게 다가오는 시절이다. 국화의 색이 눈을 포근하게 만져주는 계절이다. 국화의 꽃술이 우리 마음을 보드랍게 감싸주는 때다. 지난 월요일은 음력 9월9일, 중국인들이 중양절이라고 부르는, 우리에게는 잊힌 계절의 분수령이다. 중국인들은 9라는 숫자를 매우 중요시하고 좋아해서, 9가 두 번 겹치는 9월 9일을 중양절(重陽節)이라고 하여 일찌기 당나라 때부터 이 날을 축하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한가위를 풍성하게 즐기고는 3주 뒤쯤 되는 중양절은 지나치지만, 중국 사람들은 중양절인 9월 9일엔 높은 산에 올라가 국화주를 마셨다는 전설이 있다. 일찍이 비장방(費長房)이라는 사람이 그의 제자였던 여남의 환경(桓景)에게 "9월 9일 자네의 집에 큰 재난이 닥칠 것이니 빨리 집으로 돌아가 집안사람들에게 붉은 주머니에 수유(茱萸)를 넣어 어깨에 메고 높은 산에 올라 국화주를 마시면 이 재난을 면할 것이다."라고 하자 환경이 그 말대로 하였다가 집으로 돌아와 보니 과연 집안의 개, 돼지, 닭, 양들이 모두 죽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날에 가슴에 수유 가지를 꽂고 높은 산에 올라 국화주를 마시는 습관이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이상적인 인간상을 가리키는 말로 ‘선비’라는 말 이상은 없다고 하겠다. 행실이 바르고 근검절약하며 재물을 밝히지 않고 이웃을 사랑하고 임금에 대해서는 충성을 하되 바른 말을 할 때에는 목숨을 내걸고 하고 자신이 공부한 바른 이치를 세상에 펴서 모든 이들이 고루 공평하게 잘 살도록 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개념은 물론 공자가 처음 만들어 낸 것이다. 《논어》, 《맹자》, 《중용》, 《대학》 등 사서(四書)와 《주역(周易 또은 易經)》, 《서경(書經)》, 《예기(禮記)》 등 3경을 포함해 이른바 사서삼경(四書三經) 가운데서 《예기(禮記)》라는 책은 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지키고 따라야 할 예법에 대해 공자의 말을 빌어 길고 자세하게 설명을 하고 있는데 그 중에 「유행(儒行)」편이 나온다. 유(儒)라는 단어를 ‘선비’라고 풀 수 있다면 유교라는 것은 선비가 되어 선비의 도를 행하는 길을 열어주는 가르침 혹은 종교라 할 수 있을 것인데 거기서 선비의 길을 아주 소상하게 일러주고 있다. “선비는 오늘날 세상을 살면서도 옛 사람들을 되돌아봅니다. 이 세상에서 행하여서 후세 사람들에게 본보기가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9월이 하순으로 접어들면서 뜨겁던 여름 기운이 서늘한 가을 기운에 밀려 확실히 서늘하게 내려간 것은 물론 바람의 방향이 달라졌다. 옛날 동양에서는 사방팔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대해 각각 이름을 붙이고 구분을 했단다. 이른바 팔풍(八風)이다. 일 년 365일은 대략 45일을 기준으로 철이 바뀐다고 보겠는데 입춘에는 북동풍이 분다고 보고 이를 조풍(條風)이라고 했고 45일 후인 춘분에는 동풍이 부는데 이를 명서풍(明庶風)이라고 불렀다. 춘분 후 45일이 지나면 입하가 되고 이때는 동남풍인 청명풍(淸明風)이 불어온다. 또 45일이 지나면 하지인데 이때는 마파람이라고 하는 경풍(景風)이 남쪽에서 불어온다. 다시 45일이 지나면 입추가 되니 이때는 서늘한 바람인 양풍(凉風)이 서남쪽에서 불어온다. 다시 45일이 지나면 추분이 되는데 이때는 창합풍(閶闔風)이 서쪽에서부터 불어온다고 했다. 창(閶)은 큰 문이고 합(闔)은 작은 문짝이니 아마도 이제는 찬바람에 문을 닫아야 한다는 뜻일 게다. 추분 이후 45일이 되는 입동에는 서북쪽에서부터 부주풍(不周風)이 불어오고 다시 45일 후인 동지에는 북쪽에서부터 광막풍(廣莫風)이 불어온다고 했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북쪽의 이민족 여진족의 금(金)나라에 의해 송(宋)나라가 망하고 남은 세력이 다시 지금의 항주로 근거지를 옮겨 다시 송나라(역사에서는 남송이라고 부름)를 세운 무렵에 태어난 주희(朱熹 1130~1200)는 왜 나라가 이처럼 이민족의 침입에 시달리게 됐는가를 깊이 생각하다가 그것이 불교와 도교 때문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위진(魏晋)남북조와 수(隋),당(唐)시대를 거치면서 유학은 침체되고 불교(佛敎)와 도가(道家)가 유학을 압도하게 되는데, 이들은 군신(君臣) 부자(父子)라는 사회적 관계를 부정하고 오로지 마음의 평안을 구하고자 하며, 도덕이라는 추상적인 개념만을 강조하다 보니 결국 인의까지도 망가지므로 해서 사회의 기강이 무너지고 천하가 어지러워진다는 생각이었다. 한때 불교와 노자의 학문을 열심히 공부했으나 24살 이후 유학만이 이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으며 유학에 복귀한 주희는 11세기 북송(北宋)의 대표적인 학자 주돈이와 정호ㆍ정이 형제 등의 학문을 이어받아 새로운 유학을 연다. 그 유학은 과거처럼 경전의 해석을 중요시하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며, 경전과 성현의 말씀을 다시 새겨 우주의 원리를 새롭게 규명하고, 이를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소쇄원(瀟灑園)이란 이름은 이제는 유명해서, 모를 사람이 없을 정도다. 그러나 거기를 찾는 사람들은 말로만 듣던 것과는 달리 규모가 너무 작다고 실망을 하고 돌아서기도 한다. 그런데 그런 분은 명승 제40호 소쇄원에 대한 진정한 감상을 하지 못하고 돌아 나오는 것이 된다. 바로 우리나라의 민간 정원문화를 대표하는 걸작으로서 전라남도 담양군 남면 지곡리 작은 계곡을 따라 만들어진 정원이다. 그런데 단순히 정원으로만 본다면 다소 작아 보이지만 이곳은 조선시대 선비들이 모여서 자연을 벗하며 인생의 원리를 탐구하고 인간의 멋진 세계를 찾아보려는 만남의 장이었다. 1520년대 후반에 호를 소쇄옹(瀟灑翁)이라고 하는 양산보(梁山甫; 1503∼1557)가 이 정원을 만든 이후 수많은 선비들이 이곳을 찾아 계곡과 물과 바람과 나무와 자연을 벗하며 멋진 경계를 시로 읊기도 했다. 소쇄원에 들어서면 계곡을 따라 먼저 광풍각(光風閣)이 있고 그 위에 제월당(霽月堂)이란 조그만 집이 있다. 광풍각은 소쇄원 건물 가운데 가장 낮은 자리에 지은 것으로 너럭바위로 흘러내린 물이 십장폭포로 떨어지는 소리를 제대로 듣기 위한 것이고, 제월당은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여러분은 청량산을 아시는가? 경상북도 도립공원으로 지정돼 있지만, 대규모 위락시설이나 숙박시설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산이 아주 크거나 높은 것도 아니다. 그 산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나라에서 깊은 두메산골로 알려진 경북 봉화에 있다. 봉화하면 춘양목으로 유명한데, 그만큼 산이 깊어서 우리나라 전래의 소나무 가운데 최고의 것들이 남아있는 셈이고. 그만큼 깊은 두메산골이라는 뜻이 된다. 그런데도 청량산을 아신다면 당신은 산 또은 절과 그 분위기, 역사를 웬만큼 좋아하는 분이 아닐 수가 없다 . 최근 이 청량산이 뉴스를 탔다. 바로 지난 달 중순 경북 봉화군이 지난 5월부터 청량산 안에 있는 김생암지라는 한 굴을 발굴조사했는데, 230㎡에 달하는 이 굴 안, 자연암반을 굴착해 만들어진 바위그늘 아래에 인공축대와 기단이 조성되어 있었음을 파악했다는 것이다. 이 김생암지는 신라말의 명필 김생이 머물렀다는 전설이 있는 곳인데 과연 그 안에서 토기조각, 자기조각 기와조각 등 고려시대 전기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유물이 발견되었고, 특히 ‘淸凉 (청량)’과 ‘山寺 (산사)’라는 글씨가 새겨진 기와를 비롯해 ‘金生寺 (김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어디까지 가는 찬데요?」 「은비령으로 가는 찹니다」 「은비령요?」 사내는 그런 지명이 여기 어디 있느냐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여기 살아도 모르지요? 은비령이라고.」 「처음 듣는데요, 은비령이란 얘긴.」 「한계령에서 가리산으로 가는 길 말입니다.」 「아, 거기 우풍재 내려가는 길 말이군요. 한계령 꼭대기에서 다시 인제 쪽으로 내려가는 샛길 말이지요...」 소설의 주인공은 이렇게 추억이 어린 은비령을 찾고 있었다. 이순원의 소설 《은비령》이다. <은비령>, 신비롭게 깊이 감추어진 땅이라는 뜻의 은비령, 지도에도 없는 이름이니 어찌 그 곳이 거기인줄을 알았으랴? 그러나 역시 운명의 힘은 무서운 것, 나는 무엇에 홀린 듯,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은비령에 발을 들여놓고 말았다. 휴가를 받기가 어려워 계곡에서의 피서를 포기하고 집에 박혀 솔잎향을 안주로 하고 솔바람을 타고 오는 거문고 소리를 술인양 들어마시려던 처량한 이 사람은, 사상 최대의 구조개편입네, 그야말로 혁명입네, 하며 회사 내의 술렁거리는 소리를 뒤로하고 일약 강원도를 향해 달렸다. "이제 취재부서의 팀장으로 나가면 좀처럼 마음 놓고 쉴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