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소쇄원(瀟灑園)이란 이름은 이제는 유명해서, 모를 사람이 없을 정도다. 그러나 거기를 찾는 사람들은 말로만 듣던 것과는 달리 규모가 너무 작다고 실망을 하고 돌아서기도 한다. 그런데 그런 분은 명승 제40호 소쇄원에 대한 진정한 감상을 하지 못하고 돌아 나오는 것이 된다. 바로 우리나라의 민간 정원문화를 대표하는 걸작으로서 전라남도 담양군 남면 지곡리 작은 계곡을 따라 만들어진 정원이다. 그런데 단순히 정원으로만 본다면 다소 작아 보이지만 이곳은 조선시대 선비들이 모여서 자연을 벗하며 인생의 원리를 탐구하고 인간의 멋진 세계를 찾아보려는 만남의 장이었다. 1520년대 후반에 호를 소쇄옹(瀟灑翁)이라고 하는 양산보(梁山甫; 1503∼1557)가 이 정원을 만든 이후 수많은 선비들이 이곳을 찾아 계곡과 물과 바람과 나무와 자연을 벗하며 멋진 경계를 시로 읊기도 했다. 소쇄원에 들어서면 계곡을 따라 먼저 광풍각(光風閣)이 있고 그 위에 제월당(霽月堂)이란 조그만 집이 있다. 광풍각은 소쇄원 건물 가운데 가장 낮은 자리에 지은 것으로 너럭바위로 흘러내린 물이 십장폭포로 떨어지는 소리를 제대로 듣기 위한 것이고, 제월당은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여러분은 청량산을 아시는가? 경상북도 도립공원으로 지정돼 있지만, 대규모 위락시설이나 숙박시설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산이 아주 크거나 높은 것도 아니다. 그 산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나라에서 깊은 두메산골로 알려진 경북 봉화에 있다. 봉화하면 춘양목으로 유명한데, 그만큼 산이 깊어서 우리나라 전래의 소나무 가운데 최고의 것들이 남아있는 셈이고. 그만큼 깊은 두메산골이라는 뜻이 된다. 그런데도 청량산을 아신다면 당신은 산 또은 절과 그 분위기, 역사를 웬만큼 좋아하는 분이 아닐 수가 없다 . 최근 이 청량산이 뉴스를 탔다. 바로 지난 달 중순 경북 봉화군이 지난 5월부터 청량산 안에 있는 김생암지라는 한 굴을 발굴조사했는데, 230㎡에 달하는 이 굴 안, 자연암반을 굴착해 만들어진 바위그늘 아래에 인공축대와 기단이 조성되어 있었음을 파악했다는 것이다. 이 김생암지는 신라말의 명필 김생이 머물렀다는 전설이 있는 곳인데 과연 그 안에서 토기조각, 자기조각 기와조각 등 고려시대 전기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유물이 발견되었고, 특히 ‘淸凉 (청량)’과 ‘山寺 (산사)’라는 글씨가 새겨진 기와를 비롯해 ‘金生寺 (김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어디까지 가는 찬데요?」 「은비령으로 가는 찹니다」 「은비령요?」 사내는 그런 지명이 여기 어디 있느냐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여기 살아도 모르지요? 은비령이라고.」 「처음 듣는데요, 은비령이란 얘긴.」 「한계령에서 가리산으로 가는 길 말입니다.」 「아, 거기 우풍재 내려가는 길 말이군요. 한계령 꼭대기에서 다시 인제 쪽으로 내려가는 샛길 말이지요...」 소설의 주인공은 이렇게 추억이 어린 은비령을 찾고 있었다. 이순원의 소설 《은비령》이다. <은비령>, 신비롭게 깊이 감추어진 땅이라는 뜻의 은비령, 지도에도 없는 이름이니 어찌 그 곳이 거기인줄을 알았으랴? 그러나 역시 운명의 힘은 무서운 것, 나는 무엇에 홀린 듯,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은비령에 발을 들여놓고 말았다. 휴가를 받기가 어려워 계곡에서의 피서를 포기하고 집에 박혀 솔잎향을 안주로 하고 솔바람을 타고 오는 거문고 소리를 술인양 들어마시려던 처량한 이 사람은, 사상 최대의 구조개편입네, 그야말로 혁명입네, 하며 회사 내의 술렁거리는 소리를 뒤로하고 일약 강원도를 향해 달렸다. "이제 취재부서의 팀장으로 나가면 좀처럼 마음 놓고 쉴 수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사상 최장의 장마', '사상 최악의 무더위'... 매년 여름이면 우리는 이런 말을 서슴없이 한다. 올 여름엔 장마도 있었고 무더위는 진행형이라거 여름이 힘든 것은 사실이지만, 난 늘 사람들이 "정말 올 여름엔 왜 이러는거야?"라던가 "지구가 미쳤어!" 라던가 "봄 가을이 없어지니 여름 겨울만 너무 길어 힘드네." 라던가 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그냥 푸념으로만 여기고 싶은 마음이 있다. 사람들이란 존재는 다소는 지난 일에 대해서는 무뎌지고 당장 눈 앞에 펼쳐지는 현상은 마치 생전 처음 이 세상이 오고 있는 듯 얘기하는 것이 조금은 경망스럽지 않느냐는 생각에서 기인된 마음이라고 할까? 그렇지만 더운 것은 사실이었다. 더운 여름에 어쨌든 출근하는 사람들은 사무실이 있어서 그 속에서 에어컨 바람을 쐬며 살았는데 집에서 여름을 나는 사람들은 아무래도 더위와 직접 맞대고 사는 수 밖에 없는 지라 더욱 더위가 몸으로 느껴진다. 장마가 계속되는 동안에도 더위가 없었던 것이 아님에, 나도 모르게 내 손이 책상 서랍을 열고 그 안에 넣어두었던 부채를 찾는다. 하로동선(夏爐冬扇)이 아니라 하선동로(夏扇冬爐) 현상이라고나 할까? 이제 에어컨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가운데 집집마다 더위에 지쳐 터져 나오는 신음소리가 천지를 진동한다. 이럴 때에 더위를 피하는 방법으로는 시원한 계곡 물에 발을 담근 채로 갖고 간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시는 것이 으뜸일 것이다. “복더위 찌는 날에 맑은 계곡 찾아가 옷 벗어 나무에 걸고 풍입송 노래하며 옥 같은 물에 이 한 몸 먼지 씻어냄이 어떠리.” ‘해동가요’를 펴낸 조선 영조 때 가객 김수장의 시조다. 그러나 '복날에 시내나 강에서 목욕을 하면 몸이 여윈다.'는 속설이 있어서 물에 들어가는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는 만큼 뭔가 다른 방도를 찾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그래서 생각나는 것이 시원한 바람을 쐬는 것이다. 옛날 우리 조상들은 무더위가 극심하면 바람이 잘 부는 나무그늘에 갔다고 한다. 옛날에는 활엽수가 우거진 곳보다는 침엽수, 곧 소나무가 있는 곳이 더 바람을 잘 전해주어 시원했던 것 같다. 그런 곳에서 나오는 시원한 바람, 곧 소나무 숲에서 솔잎사이로 부는 바람이 이른바 ‘풍입송(風入松)’이다. 옛 사람들은 이러한 풍입송의 경지를 무척 즐겼던 것 같다. 앞머리 김수장의 시조에서 무심코 지나쳤던 풍입송이란 단어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지다이(영주)의 장례식이 끝난 어느 날이었다. 아수친마님(박씨부인)에게 지출장부를 들고 왔던 안현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수친의 얼굴이 굳어졌다. “박연폭포가 떨어지던 고모못을 잊었습니까? 이렇게 가을바람이 불면 젊은 부부들이 채련가(採蓮歌)를 부르며 연밥을 따지 않았습니까? 연꽃은 붉고, 연잎은 넓적하고 연밥은 많고 많았지요. 나는 노를 잡고 당신은 소쿠리를 들고 연잎 속으로 배를 저어 가지 않았습니까?”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가요?” “저는 아직도 돌아오는 돛대에 어리던 그 달빛이 눈에 선합니다. 아내가 부르던 채련가도 전부 기억할 수 있습니다. 아내는 예뻤고 노랫소리도 곱고 빼어났지요. 요즈음도 잠자리에 누우면 그 노래가 귓전에 들립니다. 그러면 연뿌리 끊기듯 애간장이 끓고 연밥알인양 눈물이 방울방울 흐릅니다.” 왜 이 구절이 다시 생각나는 것일까? 경남 함안에서 발견된 고려시대 연꽃 씨앗이 700년 만에 꽃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생각난 것은 소설가 이인화가 쓴 《시인의 별(부제:채련가, 주석 일곱 개)》라는 소설의 이 구절이었다. 2000년 제24회 이상문학상의 당선작이다. 가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진흙에서 나왔으면서도 물들지 아니하고 맑은 물에 씻기어도 요염하지 아니하니 줄기의 속은 통하고 겉은 곧아서, 덩굴이나 가지 치지 않으며, 향기는 멀수록 더욱 맑으며, 맑고 우뚝하게 서 있는 모습이란 멀리서 바라볼 수는 있으되 함부로 가지고 놀 수도 없는……. 송나라 때의 신유교철학, 곧 성리학의 비조라고 할 염계(濂溪) 주돈이(周敦頤 1017~1073)가 <애련설(愛蓮說)>이란 글에서 묘사한 연꽃의 아름다움은 시대를 내려오면서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 여전히 회자되고 있는데, 주돈이는 꽃의 덕을 견줘 설명하면서도 국화는 꽃 중의 숨은 선비요 모란은 꽃 중의 부귀함인데 연꽃은 꽃 중의 군자로다 라고 해서 많은 사람들은 부귀공명을 좇아 모란을 좋아할 것이지만 도연명은 홀로 국화를 좋아했고, 자신은 이제 연꽃을 좋아한다고 연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 주돈이란 분이 원래 “인품이 매우 고결하고 마음결(胸懷)이 쇄락(灑落:깨끗)하여 광풍제월(光風霽月)과 같다.”는 평을 서예가인 황정견(黃庭堅)으로부터 들은 분이다. 여기서 ‘광풍제월’이란 말은, 글자그대로 비가 갠 뒤의 바람과 달처럼, 마음결이 명쾌하고 집착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웃는 도깨비 - 신영훈 어릴 적에 동리 노인들 옛이야기가 생각난다. 곰의 불알로 북을 지으면 그 소리가 벽력같아서 전장(戰場)의 요괴가 달아나고 군신(軍神)이 이쪽 편이 되어 승전하게 되므로 그 북을 귀하게 여겼다는 것이다. 전장에서 북을 휘몰아 제쳐 치면 그 소리가 울려 퍼져 군사들의 마음을 흥분시켜 지쳐 들어가는 발길에 힘을 주게 되고 예기(銳氣)가 충천(衝天)하여 접전(接戰)의 이(利)가 재아(在我)하게 되므로 저절로 승리는 이쪽에 온다. 반대로 북채에 힘이 빠져 겨우겨우 두드린다면 군사들은 사기(士氣)가 떨어져 패하기 일쑤라는 것이다. 노인들의 이야기는 역사의 한 장면을 상기시킨다. 충무공 이순신이 친히 북채를 검어쥐고 다그쳐 지쳐 들어가도록 요란스럽게 북을 두드려 사기를 높이던 기록을 거론한다. 유탄에 맞아 쓰러지도록 독전(督戰)하던 그 북소리의 울림은 결국 왜수군을 참패시켰고 중국 장군의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북소리, 그것은 하나의 집단최면으로 유도하는 마(魔)의 소리인지도 모른다. 인디언이나 토인족(土人族)들이 기분 나쁘게 두드리는 장면 뒤에 주인공들이 생포되던가 제물로 바쳐진다던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평소 가깝게 지내는 황평우 전 은평한옥박물관장이 지난 일요일에 어디를 가야 한다고 하더니 나중에 사진을 하나 보내준다. 병상에 누워계신 분을 문병하는 사진이었다. 한옥전문 건축가이신 신영훈 선생님이란다. 신영훈 선생님은 많은 분들이 잘 알고 있지만 우리나라 한옥 건축의 큰 기둥이셨다. 특히나 한옥 건축의 해설분야에서는 그 구수한 말씨와 알기 쉬운 설명으로 많은 팬들을 갖고 계셨다. 황평우 관장은 신영훈 선생님이 자기를 건축문화인으로 이끌어주신 분이라고 말한다. 나는 신영훈 선생님이 나를 '민학'의 길로 이끌어주신 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그 분이 젊을 때의 동글동글하고 온화하고 인자하신 얼굴을 다른 데로 보내시고 여윈 모습으로 누워계신 것을 보는 것은 정말로 살아있는 후배들로서는 괴로운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라는 것, 인간이라는 것, 살아있는 것의 운명이 곧 탄생과 죽음일진데 그것을 어이 거부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황평우 관장과 카톡을 하면서 나는 이제 우리들이 선생님을 기억해 줄 차례라고 말해주었다. 그 사진을 보고 신영훈 선생님과의 인연을 다시 회고해 보았다. 80년대 초인 1983년 KBS의 문화부 기자였던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