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1) 뭐가 자나갔을까? 눈 위에 뚜렷이 남은 이 자국은. 나무토막을 끌고 간 자리도 아니고 커다란 짐승이 지나간 자리는 더욱 아니니, 넓이로 보나 자국으로 보나 눈썰매 자리임이 틀림없다. 대설, 대한이 다 지나도록 눈 한 송이 구경할 수 없었으니 어린 마음에 얼마나 조바심이 났으랴. 분명 어린 자식의 보챔을 당해내지 못한 아비가 첫 눈이 내리자마자 동 트기를 기다려 이 솔밭에서 눈썰매를 끌었을 것이다. 첫 발자국을 찍지 못한 아쉬움도 잊은 채 썰매가 지나간 자리를 따라가 본다. 그 자리엔 아비의 사랑이 남아있고 아이의 웃음소리가 남아있고 옛 기억의 아련함이 남아있다. 그래, 그런 것이다. 지나갔다고 지나가는 것이 아니다. 세상 모든 것은 자국을 남긴다. 나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바람과 저 부드러운 새털구름조차도 지워지지 않는 자국을 남기며 자나간다. (2) 아직은 매서운 바람이 얼굴을 찔렀다. 고향땅 해주에는 벌써 남풍이 불어와 봄 내음이 가득하겠지만 북국 만주의 사월은 봄이라도 봄이 아니었다. 중절모를 고쳐 쓰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지나온 날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일사보국(一死報國, 한 목숨을 바쳐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1) 사방이 고요했다. 매미소리만 빼면 적막강산이었을 것이다. 어른들은 죄다 논밭으로 나가고 느티나무 숲을 가득 채우던 형아들의 웃음소리도 아직 학교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풀밭의 소도 더위에 지친 듯 다리를 펴고 앉아 되새김질만 하고 있었다. 강을 건너는 나그네조차 없어 사공은 주막 마루에서 졸고 있고 나룻배도 더운지 강물에 드러누워 등을 식히고 있었다. 먹을 거라곤 없었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주전부리거리라곤 없었다. 강가로 나가 물억새 싹을 뽑아 씹어도 보고 말*을 건져 씹어 봤지만 역시 맛이 없었다. “아이스 께끼!” 형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느티나무 그늘에서 혼자 비석치기를 하고 있을 때였다. 처음 보는 총각이 나무통을 둘러매고 널브러진 시간을 깨우며 마을을 훑고 다녔다. 처음 보는 사람에다 처음 듣는 물건을 팔러 다니는 모습이 하도 신기해 나는 까까머리 총각 뒤를 졸졸 따라 다녔다. 그 총각은 “배텃거리”를 돌고 “배기미” 마을을 거의 다 돌도록 그 신기한 물건을 하나도 팔지 못했다. “께끼”를 못 팔아 짜증이 났는지 뒤꽁무니를 따라다니는 내가 귀찮았는지 “께끼”장수는 발걸음을 돌렸다. 아이스 께끼가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절집 구경을 다니다 보면 바깥벽에 십우도(十牛圖)를 그려 넣은 절을 자주 볼 수 있다. 견성(見性)의 과정을 열 단계로 나누어 그림으로 나타낸 것인데, 그 열 폭의 그림이 지닌 뜻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한 동자승이 소를 찾아 집을 나선다. 소의 어지러운 발자국을 쫒아 가다가 소를 발견하고 코뚜레를 꿰어 길을 들인 뒤 소잔등에 올라타고 집으로 돌아온다. 집으로 돌아온 동자승은 소도 잊고 자신도 잊는 공(空)의 세계를 깨닫는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줄 알게 된 동자승은 어느새 고승이 되어 중생구제를 위해 저자거리로 나간다는 게 십우도의 줄거리이다. 여기서 소는 인간본성의 상징이다. 불가에서는 인간 모두가 부처의 본성을 타고 났다고 본다. 하지만 중생들은 그걸 잊고 산다는 것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 것을 자각하고 본 모습을 찾아야겠다는 마음이 들면 그것을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이라 하고 줄여서 ‘보리심’ 또는 ‘발심’이라 한다. 십우도의 철학적 사상은 맹자의 성선설(性善說)과 궤(軌)를 같이한다. 인간은 본디 착하게 태어났으나 살다보면 외부적 요인에 의해 악해 진다는 이론이다. 서양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무엇이 영혼인가? 과학의 범주인가, 그 밖의 영역인가? 육체의 존재로 존재하는가, 육체 없이도 존재하는가? “서울 물을 먹더니 신수가 훤해 졌소이다. 그려” 방송원고 준비에 골몰하고 있을 때였다. 찬바람이 불어와 <한일 월드컵>의 뒷예기 마저 식혀버려, 사람들의 입에서 월드컵 예기가 거의 사라진 시월의 어느 날이었다. 그 때 나는 엘피(LP) 카페를 운영하랴, 방송 진행하랴, 원고 작성하랴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단하! 어떻게 알고?” 가슴이 철렁했다. “형이 뛰어 봤자 부처님 손바닥이지. 낄낄” 그는 늘 자기가 신통력이 있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런 그가 정말로 신통술을 부렸는지, 십 년도 훨씬 넘은 지금 기별 한 번 없이 내 앞에 나타난 것이다. 깡마른 몰골에 땟국이 흐르는 건 그의 본 모습이니 놀랄 일이 아니었으나, 흰 두루마기 차림에다 삿갓까지 보태고 나타났으니 내 눈은 얼음판에 자빠진 소 눈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그의 손엔 여전히 오죽대금이 들려져 있었고 바람 따라 구름 따라 주유천하(周遊天下)하면서 산다고 했다. 강산이 변하도록 못 봤으니 궁금한 것도 많고 할 말도 많았지만, 그날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아마 그는 걸어서 갔을 것이다. 사막보다 뜨거운 호수 바닥을, 진흙비늘이 이는 마른바닥을 먼지를 일으키며 걸었을 것이다. 화살 같은 햇살이 쏟아져도 소주 한 병 쯤은 허리춤에 차고 갔을 것이다. 사바세계의 끝에서 얼마나 망설였을까? 내가 꿈속을 걸어왔는가. 이제 꿈에서 깨려는가, 다시 긴 꿈을 꾸려는가. 그는 꿈에서 깨는 대신, 머릿속에 담아 두었던 수많은 이야기와 평생 동안 술통 역할을 해준 육신을 남겨두고 긴 꿈의 세계로 건너가고 말았다. “반듯이 누어 편안히 갔더래. 심장마비겠지.” “건강검진도 안했나?” “일부러 안했겠지. 바라던 대로 됐지 뭐.” 그 때는 잘 몰랐다. 주위의 한숨소리에 같이 가라앉았고 가족들의 울음소리에 슬픈가보다 했다. 가끔 희뿌연 천장만 멀뚱히 쳐다볼 뿐, 나는 그렇게 약간 모자란 사람처럼 그의 장례식을 다녀와 일상으로 돌아갔다. 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어두침침한 조명 사이로 (최)헌이 형도 보이고 (김)정호 형도 보였다. 드럼을 치며 노래를 부르는 이는 종태 형이었다. 평소보다 얼굴이 화사하고 노래도 훨씬 좋았다. “아, 참! 종태 형은 죽었지!” 내 꿈에 그가 온 것인가, 내가 그의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창(窓)에 걸린 계절은 가을이 물드는 그림엽서였다. 태양광을 내뿜던 샐비어 화단에 군데군데 흑점이 생겨나고 하늘대는 코스모스 너머 옥구들판에선 낱알 익는 내음이 잠자리 날개에 얹혀왔다. “어이, 미스터 킴. 저 친구 마이크 아냐? 몇 시간 째 저렇게 ‘타운‘을 서성이고 있네.” 느티나무 언덕이 바라다 보이는 창가에서 장부 정리를 마친 클럽주인이 자리를 털며 무성의 한 듯 한마디 내 던졌다. 구월의 바람은 오렌지색이었다. 지평선에 걸린 가을 해가 들바람을 물들여 놓아 금은방이며 세탁소며 약국, 클럽들... 바람이 닿는 곳은 여지없이 오렌지 바다 속에 잠겼다. “마이크!” “오우 브레드, 마이 브라더!” 마이크를 찾아낸 곳은 비행장 관제탑이 성냥개비만 하게 내려다보이는 느티나무 언덕 꼭대기였다. 그는 나를 만난 반가움에 잠시 입가에 미소가 번지기도 했지만 금 새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하였다. 오늘이 한국에서의 마지막 외출이라며 다음 주엔 미국으로 가야한다며, 그래서 “써니”의 흔적을 찾아 눈 사진 찍고 있다며 내 품을 깊숙이 파고들어와 울음을 터뜨렸다. 그의 눈물은 이내 걸쭉한 범벅이 되었고, 목구멍에선 증기 기관차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추억을 주우며 걷는다. 이 길엔 그동안 떨어진 낙엽보다 많은 사람들이 발자국을 남겼으며 저 마다 이런 저런 기억들을 간직한 채 사라져 갔으리라. 나 또한 그 무리 속의 하나로 이 길에 수많은 발자국을 남겼으며 곳곳에 추억 이라는 기억들을 심어두었다. “저기가 국제극장이 있던 자리지. 저 옆은 코메디언 장고웅의 레코드점이 있었고, 여기는 현대건설 사옥이 있던 자리, 이 골목으로 들어가면 미리내 분식. 서울 시내 여고생 치고 안 가본 학생이 없는 명소였지.” 한 걸음 한 걸음 발길을 옮길 때 마다 기억의 비늘들이 반짝이며 일어난다. 추억이란 이런 것인가. 이토록 아련히 아려오는 것인가. 1980년대. 이 땅이 송두리째 거대한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던 때. 그 때 나는 무엇에 그리도 목이 말랐을까. 일과가 끝나면 명동에서 종로로, 종로에서 광화문으로, 무교동으로 바람난 수캐처럼 무턱대고 쏘다녔었다. 마시면 마실수록 목이 타는 바닷물처럼 아무리 밤거리를 헤매고 다녀도 그 막연한 목마름은 가시질 않았다. 그 방황의 끝은 구도(求道)라는 거창한 명분을 걸고 이 거리를, 이 도시를 떠나는 것이었다. 아마 그 때 나는 세상의 바닷물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미스터 김. 이 음반은 저의 가장 친한 친구 오빠의 첫 번째 앨범이에요. 제 마음을 담아 선물로 드리고 가니 즐겨 들으셨으면 해요. 그간의 후의에 감사드리고 정녕 이 공간을 잊지 못할 거 에요. 부디 안녕히 ㅡ알렉스> 그녀의 눈엔 이야기가 많았다. 채 서른도 안돼 보이는데도 눈 속 가득 잔잔한 사연들을 담고 있었다. 알렉산드라 니예! 주변 사람들은 그냥 "알렉스"라 불렀다. 석별의 선물을 내게 전하는 알렉스의 눈엔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 보다 사연이 하나 더 보태져 있었다. 그녀가 우리 가게에 처음 온 날이 두어 해전 금요일 밤이었다. 서울 바닥에 외국인들의 취향에 맞는 카페가 널리고 널렸겠지만 나의 공간을 사랑하는 외국인들이 제법 많았다. 금요일 밤이면 외국인들이 내국인보다 많을 정도였다. 그들은 들어올 땐 각자의 무리가 나뉘어 들어오지만 금 새 친숙해져 한 무리를 이루는 게 다반사였다. 그 가운데 총 두목(?) 격인 데이브(Dave)란 사내가 항상 분위기를주도 하였는데, 신참 강사가 오면 한국생활에 적응 하게끔 팔을 걷어붙이고 조언과 후원을 마다하지 않았다. 새 친구가 오면 나에게 소개 시키는 것도 그의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저것 좀 보아요. 수양버들의 신명나는 춤사위를. 들리나요? 저 소리가. 우산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보다 또렷이 다가오는 연두 빛의 소리가. 어느새 바위마다 이끼가 푸르러 녹색 융단을 덮어썼고, 생강나무 가지에는 노란 병아리 떼가 비를 맞고 떨고 있습니다. 당신은 지금 쯤 유리창에 그어지는 빗금들을 바라보며 시를 쓰거나 기타를 치며 내 생각을 하겠지요. 나는 이 그림, 한 폭의 파스텔화를 당신에게 전하며 개구리 자맥질하는 개울을 따라 산길을 걷습니다. 이제 이 비가 그치고 나면 참꽃이며 산벚이며 개살구 꽃들이 앞 다투며 피어나 산허리를 가득 메울 테고 초록봉은 꽃 위로 두둥실 떠오르겠지요. 그때도 그랬습니다. 봄꽃들이 뿜어내는 향기가 세상을 뒤덮던 화사한 봄날 이었습니다. 다시는 내 삶에 화폐의 소용가치가 없을 것 같기에 있는 돈 몽땅 털어서, 다시는 술을 입에 대지 않을 것 같았기에 밤새 술이란 술은 죄다 퍼마시고 산사로 향했습니다. 산새들이 노래하고 산유화가 만발해도, 하늘엔 동화 같은 섬들이 도란도란 떠다녀도 눈길 한번 주지 않고 걸었습니다. 그땐 그랬습니다. 새로운 아침을 맞는 게 끔찍했고 꽃분홍 하늘을 보면 짜증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추억의 LP여행" 담당자께 봄비가 내렸나요? 남풍이 불던가요? 한강 물은요? 대동강 물도 풀린다는 경칩이 코앞이니 한강 물이야 당연히 풀렸겠지요. 서녘 하늘에 꽃노을이 지던가요? 종달새가 날던가요? 그렇다면 봄이 오는 겁니다. 내가 그렇게도 그리워하는 고국의 봄이. 봄비가 내립니다. 남풍도 불고요. 산허리까지 눈이 녹고 눈 녹은 물이 넘쳐 콜로라도 강으로 흘러들면, 그랜드 캐년의 석양이 한껏 부풀어 오르고 늑대의 외로운 울음소리가 밤하늘을 가르면 이곳에도 봄이 오는 겁니다. 머나먼 이국의 봄이. 벌써 30년이란 세월이 흘렀네요. 지구를 반 바퀴 돌아 미국 땅 하고도 콜로라도로 떠나온 지가. 로키산이 훤히 바라다 보이는 테라스에서 봄을 쬡니다. 아아, 보드런 햇살이 얼굴을 어르네요. 눈을 감습니다. 흔들의자에 머리를 기대며 30년 전 이태원의 어느 클럽으로 되돌아 갑니다. 그 때도 봄날이었습니다. 북악스카이웨이 개나리 덤불에 노란 물이 들기 시작하던 봄날이었습니다. 나라는 온통 올림픽 준비로 들떠 있었고 나 역시 오랜만의 외박에 들뜬 마음으로 부대 정문을 나섰습니다. "철학자 카투사"라 불리던 나는 그날도 왁자지껄한 동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