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민족혼이 담긴 항일음악을 집대성한 자료집이 처음으로 나왔다. 민족문제연구소(소장 임헌영)가 기획하고 작년 12월 세상을 뜬 노동은 전 중앙대 교수가 책임 집필한 《항일음악 330곡집》이 바로 그것이다. 항일음악이란 일제침략을 반대하며 국권회복과 독립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노래로 군가, 혁명가, 투쟁가, 애국가, 계몽가, 망향가, 추도가 같은 여러 형태로 보급됐다. 노동은 교수가 동학농민혁명 시기부터 해방에 이르기까지 국내와 만주 및 중국 관내, 러시아 원동지역, 하와이와 미국 본토, 멕시코 등지에서 불렀던 항일 노래를 총망라하여 정리하였으며 글을 쓰는 데만 5년여의 시간이 걸렸다. 민족문제연구소와 한국음악연구소의 연구원들도 작업에 힘을 보탰다. 《항일음악 330곡집》에는 그간 잘 알려져 있던 민족주의 계열은 물론 사회주의 계통의 항일운동가들도 포함됐으며, 특히 새로이 발굴한 100여곡도 수록됐다. 채보 복원 등의 방식으로 330곡 전부 악보를 실었으며, 작사 작곡자의 실명 여부, 가사 원문과 출전, 원곡과 출전, 노래의 성격과 유래, 보급지역, 음악적 특성 등에 대한 해설도 덧붙였다. 이 《항일음악 330곡집》은 연대별로 ①
[우리문화신문=이한영 기자] KBS 1TV는 오늘(14일) 밤 11시 40분 독립운동가 이상설 서거 100년을 추모하며 특집 다큐멘터리 '이상설의 길을 걷다'를 방송한다. KBS는 "이상설을 헤이그 특사의 한 사람으로만 기억하는 사람이 많지만 그는 항일 독립투쟁의 첫길을 연 선구자였다."며 "다큐에서는 100년 전 이상설이 걸었던 광야의 길들을 후손과 함께 되짚어가며 한 거인이 온 생애를 바쳐 위태로운 시대에 던졌던 희망의 메시지를 되새긴다."고 밝혔다. 다큐멘터리에는 이상설의 유일한 직계 후손인 외손녀 이현원 씨, 그의 손주인 이유진 씨와 이민규 군이 출연한다. 또 연해주 항일운동의 대부로 불린 최재형 선생의 손자 최발렌틴 씨,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의 주역이었던 홍범도 장군의 손녀 김알라 씨, 조선족 역사학자 이광평 씨가 각자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전한다. 다큐에서는 또 이상설이 사실은 간도에 서전서숙을 설립한 교육자이자 수학자였다는 사실도 알 려준다. 이상설이 모든 경비를 대며 무상교육을 한 서전서숙의 정신은 명동학교, 창동학교, 신흥강습소, 한민학교 등으로 이어져 광복을 위한 항일 전사들을 길러냈다. 또 고종황제의 밀명을 받아 헤이그 특사로 나
[우리문화신문= 윤지영 기자] 윤봉길의사가 남긴 유품 가운데 회중시계가 있다. 보물 제568-2호로 지정된 윤의사의 시계는 멈췄지만, 그의 정신은 멈추지 않고 우리 겨레의 시계로 영원히 살아있는 것은 아닐까? 윤봉길의사는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사량리에서 태어나, 덕산보통학교와 오치서숙에서 공부하였고 19세 때 고향에 야학을 세워 농촌계몽운동을 시작했다. 20세 때 각곡독서회를 조직하고 『농민독본』을 편찬했으며, 22세 때 월진회를 조직, 농촌운동을 정열적으로 전개하였다. 윤봉길의사는 국내에서 독립운동이 어려워지자 23세때 중국으로 망명하여 1931년 김구선생의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였다. 그 뒤 항일 투쟁을 계속하다가 1932년 4월 29일 혼자 일본의 상해사변 전승축하회가 열리던 상해의 홍구공원에 폭탄을 던져 일본군총사령관 시라가와 등 일본의 군수뇌부를 제거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 자리에서 체포된 윤봉길 의사는 군법재판 단심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1월 일본으로 이송되어 1932년 12월 19일 일본 오사카 위수 형무소에서 24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윤봉길의사가 남긴 유품은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139번지 충의사에
[우리문화신문=이한영 기자] 진천 출신의 민족독립운동가 보재 이상설 선생(1870∼1917)의 삶이 지상파 다큐멘터리로 재조명된다. 6일 진천군에 따르면 보재 이상설 선생 순국 100주년 기념 다큐멘터리 '이상설의 길, 희망을 깨우다'가 KBS 1TV를 통해 오는 14일 오후 11시 40분에 전국 방송을 통해 시청자 곁으로 찾아간다. 이번에 전파를 타게 될 '이상설의 길, 희망을 깨우다'는 진천군에서 보재 이상설 선생 순국 100주년을 겨냥해 야심 차게 준비한 것으로 알려졌다. 군 관계자는 "프로그램의 내실 있는 제작을 위해 KBS 관계자와 지난 6개월 동안 밀도 있는 협의를 진행했다"며 "이상설 선생의 주 활동 무대였던 중국 러시아 등지의 현장 취재를 통해 가슴 아픈 역사의 현장을 안방에 생생히 전할 수 있을 것"이라 말했다. 보재 이상설 선생은 충북 진천 출신으로 일제 식민 통치 초기, 독립운동의 대부 역할을 맡으며 해외 독립운동근거지를 개척한 위대한 독립운동가이자, 민족교육자다.그는 중국 밀산 시에 '한흥동'을 개척했고 신한혁명당을 결성해 거시적인 광복 전략을 세웠던 지략가였다. 또 근대 수학 등 근대학문의 선구자이기도 했다. 이상설 선생은 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서울역사박물관(관장 송인호)은 우당 6형제의 독립운동 <민국의 길, 자유의 길> 기획전을 연다. 전시 개막식은 8월 3일(목) 낮 3시 서울역사박물관 1층 기획전시실에서 열고, 오는 10월 15(일)까지 일반인에게 전시한다. 전시 개막식에는 이회영의 손자인 이종찬 전 국정원장, 이종걸 의원과 조광 국사편찬위원장, 김호섭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 등 100여 명이 참석할 예정이다. 이번 전시는 광복 72주년을 맞아 서울의 독립운동가인 우당 이회영 6형제의 독립운동을 조명하는 전시이다. 구시대의 끝자락에서 나라의 쇄신에 노력했고, 나라가 식민지로 전락하자 나라로부터 받은 모든 것을 바쳐 그 회복에 헌신하다 마침내 목숨까지 바친 6형제의 모습을 통해 우리 시대에 애국의 길이 무엇인지 묻는 계기가 될 것이다. 전시는 모두 4부로 ‘1부 시대가 요구하는 역할을 고민하다’, ‘2부 서간도에 올린 무장독립운동의 깃발’, ‘3부 이회영, 자유의 길을 찾아서’, ‘4부 자유의 나라에 살기 위하여’로 구성되어 있다. 시대가 요구하는 역할을 고민하다 1부에서는 개항 이후 급격한 변화 속에서 6형제의 역할에 대한 고민과 개항으로 유입된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이천만 동포의 만세운동 이어갈 부녀자 이끌어 만든 향촌회 조여 오는 왜경의 감시망 속에서도 군자금 모아 독립의 주춧돌 쌓은 임의 피눈물 광복의 꽃으로 활짝 피었어라 - 향촌회 이끌어 군자금 모은 “정찬성” 정찬성 (鄭燦成, 1886. 4.23 ~ 1951. 7) 애국지사는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은 독립운동가이다. “정찬성, 윤찬복, 최복길 이 세 사람은 특히 조선독립을 희망하는 마음이 간절하여 크게 조선독립의 기세를 드높여 상해임시정부를 원조할 목적으로 서로 협의하였다. 그리하여 재작년(1919) 음력 10월 9일 평남 순천군 제현면 문창리 예수교학교 내에서 모여 비밀리에 대한민국회 부인향촌회라하는 큰 단체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신자들로 부터 수십 명의 회원을 모집한 후 회원으로부터 회비 기타 의연금으로 합계 160여원의 돈을 모금하였다. 이 돈을 작년(1920) 음력 3월 23일 상해 임시정부의 총무인 차경신에게 보내 조선독립운동을 원조하였다. 부인향촌회에서 윤창복은 회장이 되고 정찬성과 최복길은 회계를 맡아대대적인 활동을 하였다.” 이는 정찬성 애국지사에 관한 <동아일보.1920 5. 29> 치 기록
[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님은 1919년 통진교회 전도사로 월곶지역 3.1만세 사건을 주도하여 옥고를 치루셨습니다. 민족해방을 몸으로 실천한 님의 민족혼을 기리기 위해 이 비를 만듭니다. 2003년 8.15 광복절 푸른언덕모임” 이는 김포시 월곶면 고막리, 푸른언덕교회 입구에 있는 이살눔(이살눔은 국가보훈처의 서훈 이름이고 다른 이름은 이경덕이다, 1886. 8. 7 ~ 1948. 8.13) 애국지사를 추모하는 기념비에 적힌 글이다. 이살눔 지사를 기리는 기념비를 보기 위해 기자는 어제(13일) 고막리 푸른언덕교회를 찾아갔다. 작은 규모의 시골 교회당은 신자가 많아 보이지 않았는데 마당에 차를 세우고 나니 조화자 전도사 (59살)가 찾아온 용건을 묻는다. 이살눔 지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러 왔다고 하니까 반가운 얼굴로 차 한 잔을 내오며 거의 찾지 않는 추모비를 어떻게 알고 찾아 왔느냐며 반긴다. “이 교회는 이살눔 지사님의 며느리인 강동재 여사께서 다니시던 교회입니다만 5년 전 80살로 돌아가셔서 지금은 그 집안에 대해 아는 바가 없습니다. 이살눔 지사님은 이곳 월곶의 3·1만세운동의 주동자이셨습니다. 그러한 활동에 대해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장덕준(秋松 張德俊)은 한국 최초의 순직기자였다. 한국신문편집인협회는 1964년 4월 30일 유공언론인 기념사업의 하나로 언론 발전에 공이 많은 언론인 다섯 분을 선정하여 신문회관에 초상화를 봉안하여 언론인들의 귀감이 되도록 하였다. 편집인협회는 앞서 ‘유공언론인 기념사업준비위원회’를 구성하여 한국 언론사에서 뚜렷한 공적을 남긴 언론인을 선정한다는 원칙을 정했다. 선정위원은 강영수, 곽복산, 김종규, 최석채, 천관우였다. 위원들은 심의 끝에 서재필(1864~1950, 독립신문 창간), 장지연(1864~1921, 황성신문 사장, 시일야방성대곡 집필), 양기탁(1871~1938, 대한매일신보 총무), 장덕준(1892~1920, 훈춘에서 독립군 취재 도중 일본군에 피살), 최병우(1924~1958, 대만 해협에서 취재도중 순직) 다섯 분을 선정하였다. 선정된 유공 언론인은 화가들에게 의뢰하여 제작한 초상화를 신문회관 강당에 봉안하였다. 장덕준의 초상화는 김인승(金仁承) 화백이 그렸다. 다섯 유공 언론인의 초상화는 한국신문회관 강당에 봉안되었다가 신문회관이 프레스센터로 개축된 뒤 현재는 프레스센터 19층 기자클럽에 걸려 있다. 세월이 흐
[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어제는 제 62회 현충일이었다. ‘현충(顯忠)’을《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충렬을 높이 드러냄. 또는 그 충렬”이라는 다소 어려운 내용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어린아이 눈높이로 말한다면 ‘나라를 지키다 숨진 분들을 추모하는 일’ 을 말한다. 이곳에는 6.25 참전 용사들도 잠들어 있지만 일제강점기에 독립을 위해 헌신한 분들도 잠들어 있다. 여성독립운동가 조충성(曺忠誠, 1896. 5.29 ~ 1981.10.25) 애국지사도 이곳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영면 중이시다. 그런데 무덤이 아니라 납골 형태로 모셔져 있다. 국립묘지라고 하면 돌비석이 있는 무덤을 연상하겠지만 국립묘지라고 해서 매장을 할 수 있는 공간이 한없이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국립서울현충원은 1985년 묘역이 만장(더 이상 공간이 없음)됨에 따라 서울에 고인을 모시기를 희망하나 장소가 없어 대전현충원에 안장하는 유족들의 불편함을 개선하기 위해 2003년 말부터 공사에 착수하여 1년 8개월간의 공사 끝에 "충혼당"(3층 건물, 연건평 4,791.6㎡, 157억 원 투입)을 세워, 2006년 3월부터 운영하고 있다. 조충성 지사는 1981년 타계하셨지만 2015년 1월 15일
[우리문화신문= 이윤옥기자] 여성독립운동가 조용제 (趙鏞濟, 1898. 9.14~1948. 3.10) 애국지사는 ‘대한민국’ 이라는 국호를 처음 지은 독립운동가 조소앙 선생의 누이동생이다. 조용제 지사는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에 커다란 공헌을 한 집안 출신으로 무려 12명의 독립운동가가 배출되었다. 조용제 지사는 경기도 양주 출신으로 아버지 조정규, 어머니 박필양의 6남 1녀 가운데 외동딸로 태어났다.아버지 조정규 선생은 정3품 통정대부(通政大夫) 조성룡의 외아들로 학덕을 겸비한 함안 조 씨 가문의 선비였다. 함안 조씨 시조 조정(趙鼎)은 왕건(王建)을 도와 고려통일에 큰 공을 세운 개국벽상공신(開國壁上功臣)이다. 조용제 지사의 오라버니 조소앙은 일본유학을 마치고 1919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수립에 참가하는 등 활발한 독립운동을 하고 있었다. 그러한 오라버니의 영향으로 중국으로 건너간 조용제 지사는 한국독립당에 입당하여 오라버니 조소앙 선생과 함께 독립운동에 힘썼다. 한국독립당은 1930년 1월 25일 중국 상해에서 조직된 민족주의 계열의 대표적인 독립운동 정당으로 결성 이후 1935년 9월, 재건과 통합(1940. 5)의 변천과정을 거치면서 탄탄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