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서울역사박물관(관장 송인호)은 우당 6형제의 독립운동 <민국의 길, 자유의 길> 기획전을 연다. 전시 개막식은 8월 3일(목) 낮 3시 서울역사박물관 1층 기획전시실에서 열고, 오는 10월 15(일)까지 일반인에게 전시한다. 전시 개막식에는 이회영의 손자인 이종찬 전 국정원장, 이종걸 의원과 조광 국사편찬위원장, 김호섭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 등 100여 명이 참석할 예정이다. 이번 전시는 광복 72주년을 맞아 서울의 독립운동가인 우당 이회영 6형제의 독립운동을 조명하는 전시이다. 구시대의 끝자락에서 나라의 쇄신에 노력했고, 나라가 식민지로 전락하자 나라로부터 받은 모든 것을 바쳐 그 회복에 헌신하다 마침내 목숨까지 바친 6형제의 모습을 통해 우리 시대에 애국의 길이 무엇인지 묻는 계기가 될 것이다. 전시는 모두 4부로 ‘1부 시대가 요구하는 역할을 고민하다’, ‘2부 서간도에 올린 무장독립운동의 깃발’, ‘3부 이회영, 자유의 길을 찾아서’, ‘4부 자유의 나라에 살기 위하여’로 구성되어 있다. 시대가 요구하는 역할을 고민하다 1부에서는 개항 이후 급격한 변화 속에서 6형제의 역할에 대한 고민과 개항으로 유입된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이천만 동포의 만세운동 이어갈 부녀자 이끌어 만든 향촌회 조여 오는 왜경의 감시망 속에서도 군자금 모아 독립의 주춧돌 쌓은 임의 피눈물 광복의 꽃으로 활짝 피었어라 - 향촌회 이끌어 군자금 모은 “정찬성” 정찬성 (鄭燦成, 1886. 4.23 ~ 1951. 7) 애국지사는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은 독립운동가이다. “정찬성, 윤찬복, 최복길 이 세 사람은 특히 조선독립을 희망하는 마음이 간절하여 크게 조선독립의 기세를 드높여 상해임시정부를 원조할 목적으로 서로 협의하였다. 그리하여 재작년(1919) 음력 10월 9일 평남 순천군 제현면 문창리 예수교학교 내에서 모여 비밀리에 대한민국회 부인향촌회라하는 큰 단체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신자들로 부터 수십 명의 회원을 모집한 후 회원으로부터 회비 기타 의연금으로 합계 160여원의 돈을 모금하였다. 이 돈을 작년(1920) 음력 3월 23일 상해 임시정부의 총무인 차경신에게 보내 조선독립운동을 원조하였다. 부인향촌회에서 윤창복은 회장이 되고 정찬성과 최복길은 회계를 맡아대대적인 활동을 하였다.” 이는 정찬성 애국지사에 관한 <동아일보.1920 5. 29> 치 기록
[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님은 1919년 통진교회 전도사로 월곶지역 3.1만세 사건을 주도하여 옥고를 치루셨습니다. 민족해방을 몸으로 실천한 님의 민족혼을 기리기 위해 이 비를 만듭니다. 2003년 8.15 광복절 푸른언덕모임” 이는 김포시 월곶면 고막리, 푸른언덕교회 입구에 있는 이살눔(이살눔은 국가보훈처의 서훈 이름이고 다른 이름은 이경덕이다, 1886. 8. 7 ~ 1948. 8.13) 애국지사를 추모하는 기념비에 적힌 글이다. 이살눔 지사를 기리는 기념비를 보기 위해 기자는 어제(13일) 고막리 푸른언덕교회를 찾아갔다. 작은 규모의 시골 교회당은 신자가 많아 보이지 않았는데 마당에 차를 세우고 나니 조화자 전도사 (59살)가 찾아온 용건을 묻는다. 이살눔 지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러 왔다고 하니까 반가운 얼굴로 차 한 잔을 내오며 거의 찾지 않는 추모비를 어떻게 알고 찾아 왔느냐며 반긴다. “이 교회는 이살눔 지사님의 며느리인 강동재 여사께서 다니시던 교회입니다만 5년 전 80살로 돌아가셔서 지금은 그 집안에 대해 아는 바가 없습니다. 이살눔 지사님은 이곳 월곶의 3·1만세운동의 주동자이셨습니다. 그러한 활동에 대해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장덕준(秋松 張德俊)은 한국 최초의 순직기자였다. 한국신문편집인협회는 1964년 4월 30일 유공언론인 기념사업의 하나로 언론 발전에 공이 많은 언론인 다섯 분을 선정하여 신문회관에 초상화를 봉안하여 언론인들의 귀감이 되도록 하였다. 편집인협회는 앞서 ‘유공언론인 기념사업준비위원회’를 구성하여 한국 언론사에서 뚜렷한 공적을 남긴 언론인을 선정한다는 원칙을 정했다. 선정위원은 강영수, 곽복산, 김종규, 최석채, 천관우였다. 위원들은 심의 끝에 서재필(1864~1950, 독립신문 창간), 장지연(1864~1921, 황성신문 사장, 시일야방성대곡 집필), 양기탁(1871~1938, 대한매일신보 총무), 장덕준(1892~1920, 훈춘에서 독립군 취재 도중 일본군에 피살), 최병우(1924~1958, 대만 해협에서 취재도중 순직) 다섯 분을 선정하였다. 선정된 유공 언론인은 화가들에게 의뢰하여 제작한 초상화를 신문회관 강당에 봉안하였다. 장덕준의 초상화는 김인승(金仁承) 화백이 그렸다. 다섯 유공 언론인의 초상화는 한국신문회관 강당에 봉안되었다가 신문회관이 프레스센터로 개축된 뒤 현재는 프레스센터 19층 기자클럽에 걸려 있다. 세월이 흐
[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어제는 제 62회 현충일이었다. ‘현충(顯忠)’을《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충렬을 높이 드러냄. 또는 그 충렬”이라는 다소 어려운 내용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어린아이 눈높이로 말한다면 ‘나라를 지키다 숨진 분들을 추모하는 일’ 을 말한다. 이곳에는 6.25 참전 용사들도 잠들어 있지만 일제강점기에 독립을 위해 헌신한 분들도 잠들어 있다. 여성독립운동가 조충성(曺忠誠, 1896. 5.29 ~ 1981.10.25) 애국지사도 이곳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영면 중이시다. 그런데 무덤이 아니라 납골 형태로 모셔져 있다. 국립묘지라고 하면 돌비석이 있는 무덤을 연상하겠지만 국립묘지라고 해서 매장을 할 수 있는 공간이 한없이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국립서울현충원은 1985년 묘역이 만장(더 이상 공간이 없음)됨에 따라 서울에 고인을 모시기를 희망하나 장소가 없어 대전현충원에 안장하는 유족들의 불편함을 개선하기 위해 2003년 말부터 공사에 착수하여 1년 8개월간의 공사 끝에 "충혼당"(3층 건물, 연건평 4,791.6㎡, 157억 원 투입)을 세워, 2006년 3월부터 운영하고 있다. 조충성 지사는 1981년 타계하셨지만 2015년 1월 15일
[우리문화신문= 이윤옥기자] 여성독립운동가 조용제 (趙鏞濟, 1898. 9.14~1948. 3.10) 애국지사는 ‘대한민국’ 이라는 국호를 처음 지은 독립운동가 조소앙 선생의 누이동생이다. 조용제 지사는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에 커다란 공헌을 한 집안 출신으로 무려 12명의 독립운동가가 배출되었다. 조용제 지사는 경기도 양주 출신으로 아버지 조정규, 어머니 박필양의 6남 1녀 가운데 외동딸로 태어났다.아버지 조정규 선생은 정3품 통정대부(通政大夫) 조성룡의 외아들로 학덕을 겸비한 함안 조 씨 가문의 선비였다. 함안 조씨 시조 조정(趙鼎)은 왕건(王建)을 도와 고려통일에 큰 공을 세운 개국벽상공신(開國壁上功臣)이다. 조용제 지사의 오라버니 조소앙은 일본유학을 마치고 1919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수립에 참가하는 등 활발한 독립운동을 하고 있었다. 그러한 오라버니의 영향으로 중국으로 건너간 조용제 지사는 한국독립당에 입당하여 오라버니 조소앙 선생과 함께 독립운동에 힘썼다. 한국독립당은 1930년 1월 25일 중국 상해에서 조직된 민족주의 계열의 대표적인 독립운동 정당으로 결성 이후 1935년 9월, 재건과 통합(1940. 5)의 변천과정을 거치면서 탄탄한
[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송정헌 애국지사(1919~2010)는 중국인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하여 1990년 대한민국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1990년)을 받은 분이다. 송정헌 지사는 중국 항주에서 태어나 1937년 강서성 노산구강 폐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 할 때 훗날 남편이 되는 유평파 지사의 형 유진동 선생을 만났다. 중국 절강성 항주(浙江省 杭州)는 아름다운 서호를 끼고 있는 뛰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곳으로 소주(苏州)와 더불어 한국에도 널리 알려진 곳이다. 중국인들은 ‘소주에서 태어나 한주에서 사는 것이 인간의 행복’이라고 말할 정도로 사람살기 좋은 곳이며 소동파와 같은 대시인이 이곳에서 시를 읊었던 곳이다. 송정헌 지사가 평생의 반려로 삼은 한국인 독립운동가 유평파 지사를 만난 것은 그의 형 유진동 선생을 만난 인연으로 이어진다. 유진동 선생은 임시정부 백범 김구 주석의 주치의로 1928년 중국 상해 동제(同濟)의과대학에 다닐 때부터 한인학우회를 결성, 서무위원으로 활동하며 김구 주석을 도와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송정헌 지사와의 인연은 송 지사가 근무하던 병원장으로 유진동 선생이 부임하면서 동생인 유평파 지사를 소개하여 송정헌, 유평파 독립운동가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신언준 (1904~1938) 선생은 평남 평원(平原) 사람으로 1923년 중국으로 건너가 항주영문전수학교(杭州英文專修學校)·영송국립정치대학(英淞國立政治大學) 법률과 및 동영대학(東英大學) 법과를 졸업하였다. 대학 재학시절부터 상해청년동맹회(上海靑年同盟會)를 발기하고, 상해(上海) 한인학우회(韓人學友會)의 집행위원과 동 수보위원(修補委員)으로 활동하면서 민족독립운동에 가담하였다. 1927년 상해(上海) 임시정부(臨時政府)요인인 안창호(安昌浩)가 중국의 각지에서 조선 독립을 호소할 때 이를 보좌하여 교섭 및 서무와 중국어·영어의 통역을 담당하였다. 흥사단(興士團)의 간부로서 독립운동에 관계하는 문서작성을 담당하는 한편, 흥사단 제17차 원동대회(遠東大會) (1931. 1. 7)에서는 연사로 강연하였고, 동년 6월 7일 여운형(呂運亨)이 단장이었던 상해교민단의사회(上海僑民團議事會)에서 인성학교(仁成學校)의 학감으로 당선되어 독립운동가들의 자녀교육을 맡았다. 1929년 1월 1일 이래로 동아일보에 재직중 상해와 남경 특파원으로 뽑혀 프랑스 조계내에 거주하면서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의 조국독립을 위한 활동상황과 그 밖에 독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송상도(宋相燾)의 《기려수필(騎驢隨筆)》에는 망국의 순간! 자결한 우국지사들이 18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벼슬한 선비로서 치욕과 통분 끝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지요. 나라가 망하는 순간! 벼슬 한 번 하지 않고 글공부에만 매달린 전라도 산골의 매천 선생도 치욕과 통분 끝에 자결합니다. 절명시(絶命詩)와 함께 자제들을 모아 놓고 매천 황현은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기셨지요. 조선 왕조가 선비의 나라인데 선비를 길러낸 지 5백년 나라가 망하는 순간 선비 한 명도 죽지 않는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하지 않는가!" 마찬가지로 이육사 당신의 친척 이만도, 이중직 등 안동의 선비들도 나라가 망하는 때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그분들은 당신의 할아버지 이중직과 함께 개화기 계몽운동을 펼쳤던 안동의 선각자들이셨지요. 당신은 6살 때 할아버지 이중직에게 소학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열두 살 즈음엔 새벽 1시가 되도록 중용, 대학을 읽으며 유교의 전통규범을 배웠습니다. 당신은 퇴계 이황의 14대 손이자 안동 선비 마을의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였지요. 엄격한 선비정신이 인격 속에 내면화된 모습은 당신이 쓴 수필 《계절의 오행》 속에 이런 구절로 나옵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독립운동가 후손으로 자랑스러운 점을 들라하면 제 자신의 뿌리가 한국인이라는 점입니다. 특히 부모님이 한국의 독립을 위해 큰 노력을 했다는 것이 가슴 뿌듯하며 실제로 그러한 노력의 결과 독립을 실천했다는 사실은 자손으로서 영광스러운 일이지요” 박신애 애국지사의 따님인 에스더 천 씨는 2015년 항일영상역사재단과의 대담에서 이렇게 말했다. 하와이로 건너가 하와이 대한부인구제회를 중심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이하 임시정부)의 활동을 지원하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던 박신애(1889~1979) 지사는 1920년대 말 임시정부 주석 김구로부터 재정부족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는 한 통의 편지를 받게 된다. 당시 사탕수수 노동자로 하와이 땅을 밟은 사람들의 삶이 그렇게 넉넉하고 여유롭지는 않았지만 임시정부가 재정적으로 큰 어려움에 봉착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박신애 지사를 비롯한 여성들은 허리띠를 졸라매는 고통을 감내하면서 독립자금을 모아 임시정부에 보냈다. 어려움 속에서도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보내준 하와이 여성독립운동가들의 고마움을 백범 김구는 그의 자서전에 잊지 않고 그 이름 석 자를 남겼다. “나의 통신(하와이 동포들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