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내가 죽는다고 조금도 어쩌지 말라. 내 평생 나라를 해 한 일이 아무 것도 없음이 도리어 부끄럽다. 내가 자나 깨나 잊을 수 없는 것은 우리 청년들의 교육이다. 내가 죽어서 청년들의 가슴에 조그마한 충격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소원하는 일이다." 이는 65살의 나이에 폭탄 의거로 순국의 길을 걸은 강우규(1855-1920) 의사가 사형 집행을 앞두고 남긴 말이다. 나라를 빼앗은 흉악한 일제에 온몸으로 저항한 것이야말로 나라를 위해 큰 일을 한 것이지만 강우규 의사는 겸손하게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청년들의 교육’을 걱정했다. 그러한 강우규 의사의 숭고한 나라사랑 실천 행동 뒤에는 탁명숙(1900-1972)이라는 여성독립운동가가 있었지만 이를 아는 이는 드물다. 그런가하면 핏덩이 갓난아기를 남겨두고 독립운동에 뛰어든 박치은(1886-1954)애국지사도 있다. 박치은 애국지사는 남편 곽치문(1882-1922)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다 잡혀 감옥에 들어갔는데 핏덩이 갓난아기를 둔 몸이었다. 철창 밖에서 젖이 먹고 싶어 우는 아기를 일제는 끝내 면회시켜주지 않아 눈앞에서 아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꽃샘바람이 아직 옷깃을 여미게 하는 가운데 어제(27일) 늦은 3시, 서울교육박물관(정독도서관 내)에서는 ‘신여성 김란사 -시대를 앞서간 여성의 위대한 이야기-’라는 제목의 아주 특별한 전시회 개막식이 있었다. 김란사(金蘭史, 1872~1919, 그간 남편 성을 따라 하란사(河蘭史)로 부름)란 이름이 다소 생소하게 들릴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김란사는 당시로는 드문 미국 유학길에 올라 한국 최초의 문학사 학위를 받았을 뿐 아니라 이화학당 교사 시절 유관순에게 ‘조선을 밝히는 등불이 되어다오.’라며 민족혼을 심어준 인물이다. 특히 미국 유학에서 갈고 닦은 영어 실력과 이화학당에서 보여준 민족교육 활동 등이 인정되어 고종황제로부터 1919년 6월 파리강화회의(1919년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을 위하여 승전국들이 파리에서 개최한 강화 회의로 전쟁에 대한 책임과 영토 조정,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조치 등을 협의함)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여 ‘한국의 독립 승인’을 받아오도록 명을 받은 인물이었다. 그러나 1919년 1월21일 일제의 독살로 알려진 고종의 갑작스런 승하가 있었고 이어4월김란사 역시 북경에서 독살로 의심되는 죽음을 당하게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빼앗긴 고국 되찾으려 호랑이 사감 되어 다독이던 그 굳은 의지 고종황제와 엄비조차 신임하던 우국의 여인 어느 친일분자의 독약에 뜻 못 펴고 이역땅 북경에서 눈 감았네 아! 슬프도다 그 장대한 뜻 펴지 못함이“ 이윤옥 시인이 《서간도에 들꽃 피다 2, 2012, 도서출판 얼레빗》에서 노래했던 “이화동산에서 독립정신 키운 호랑이 사감 하란사” 시에 나오는 대목이다. 이 시에서 노래했던 하란사는 요즘 새롭게 알려진 본명이 <김란사> 애국지사다. 서울시교육청정독도서관(관장 김희선) 부설 서울교육박물관에서는 3ㆍ1절을 기념하여 독립운동가이며 우리나라 여성 최초의 미국유학생으로 인문계 최초의 학사 학위를 받은 김란사의 일생을 통해 진정한 나라 사랑의 의미를 보여주고자 오는 27일부터 12월 31일까지 특별전을 연다. 김란사 애국지사가 이화학당에 입학할 당시 기혼여성이라 하여 두 번이나 거절당했다. 그러자 김 지사는 밤에 프라이 학장을 찾아가 촛불을 훅하고 끄면서 “우리가 깜깜한 게 이 등불이 꺼진 것과 같으니 우리에게 밝은 학문의 빛을 열어주시오.”라고 하여 입학할 수 있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다. 김 지사는 부유한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그림들의 이미지가 선명하게 각인되었습니다. 한국어로 쓴 시이기에 의미를 알기는 어렵지만 그림 하나하나가 말해주는 무언의 목소리를 들어보려고 노력했습니다. 한국화의 강렬한 색채로 그려낸 여성독립운동가에 대한 이미지를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귀국해서 여성독립운동가에 대해 공부해볼 생각입니다.” 오오사토 히로아키 (大里浩秋, 일본 가나가와대학 명예교수) 교수의 ‘불굴의 항일여성독립운동가 33인 시화전’을 둘러본 소감은 간략했으나 ‘생각해보지도 않았던 전시회’를 본 소감치고는 정확하게 본 듯하다. 오오사토 교수는 전날인 22일 인천대학교에서 열린 ‘중국관행연구포럼’에서 <일본 외국인 거류지 연구회의 활동>을 알리기 위해 방한했으며 짬을 내어 인천관동갤러리에서 열고 있는 항일여성독립운동가 시화전을 보게 되었다고 했다. 어제(24일, 금요일)부터 인천관동갤러리(관장 도다 이쿠코)에서는 제98주년 3·1절 기념 “불굴의 여성독립운동가 33인 시화전” 이 한 달간 예정으로 전시에 들어갔다. 시화전이나 그림전에서 흔히 하는 ‘개막식’ 같은 행사 없이 조촐하게 ‘불굴의 항일여성독립운동가를 그린 그림 33점이 갤러리에 걸렸다. 개막식이라고
[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권병덕 선생은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분으로 충청북도 청주 사람이며, 천도교인이다.18세에 동학교도가 되고, 1894년(고종 31)의 동학혁명 때 손병희(孫秉熙)와 함께 6만명의 교도를 이끌고 호응했으나 관군에 의하여 진압 당한 후 전국 각처를 방랑하였다. 1908년(융희 2) 일본에서 귀국한 손병희가 천도교를 일으키자 이에 입교하여 전제관장(典制觀長)·이문관장대리(理文觀長代理)·금융관장(金融觀長)·보문관장(普文觀長) 등을 역임하였다. 1919년 2월 25일경 천도교의 기도회 종료보고와 국장참배를 위해 상경한 그는 손병희·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 등을 만나, 3·1독립만세운동계획을 듣고 이에 찬동하여 민족대표로서 서명할 것을 동의하였다. 이 달 27일 최린(崔麟)·오세창·임예환(林禮煥)·나인협(羅仁協)·홍기조(洪基兆)·김완규(金完圭)·나용환(羅龍煥)·홍병기(洪秉箕)·박준승(朴準承)·양한묵(梁漢默) 등의 동지와 함께 김상규(金相奎)의 집에 모여서 독립선언서와 기타 문서의 초안을 검토하였으며, 이들과 함께 민족대표로서 성명을 올리고 날인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경 인사동에 있는 태화관(泰華館)에서 민족대표 33인으로 서
[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허형식 장군님! 저는 허 장군님이 태어나신 경북 선산군 구미면 임은마을과 조금 떨어진 원평동 장터마을 출신입니다. 허 장군님께서 어린 시절 고향집에서 금오산을 바라보며 꿈을 키웠듯이 저 역시 그랬습니다. 제 어린 시절 할아버지는 금오산인으로 고려 말 야은(冶隱) 길재(吉再), 조선시대 사육신 하위지(河緯地)‧생육신 이맹전(李孟專), 그밖에도 김숙자(金叔滋)‧김종직(金宗直)‧정붕(鄭鵬)‧박영(朴英) 등 숱한 지조 높은 선비들의 충절 이야기를 귀에 익도록 일러주셨습니다. 아마 장군님께서도 어린 시절 집안 어른으로부터 금오산 출신 선비들의 행적을 많이 듣고 자랐을 것입니다. 저는 그런 고장이 왜 근현대사에서는 충절의 인물이 없는지 한동안 절망 속에 지냈습니다. 그런 가운데 1999년 8월, 임시정부 국무령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 선생 후손 이항증(李恒曾) 선생과 일송(一松) 김동삼(金東三) 선생의 후손 김중생(金中生) 선생의 안내로 중국대륙에 흩어진 항일유적지를 답사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8월 4일) 헤이룽장성 하얼빈 동북열사기념관에서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군장 겸 총참모장 ‘허형식(許亨植)’ 장군님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문화신문= 김영조 기자] 능금 골 열아홉 처녀 / 사진 들고 떠난 하와이 / 물 설고 말 설은 이국땅서 / 받은 설움 물리치고 / 고난의 순간마다 / 태평양 넘어 / 광복의 빛 그리며 / 가시밭길 헤쳐 나온 / 임의 발자국 - 이윤옥 시인의 <태평양 넘은 광복의 빛 '이희경’> 가운데- 일제강점기, 한국 여성들의 독립의 함성은 멀리 하와이부터 드넓은 중국 땅과 일본에 이르기까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들려왔다. 이러한 항일여성독립운동가들은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자로부터, 의병, 기생, 해녀, 학생, 의사, 교육가 등 직업의 귀천을 불문하고 독립운동에 온 몸을 바쳐 뛰었다. 그러나 불굴의 의지로 독립운동에 뛰어든 여성들에 대해 우리는 거의 알지 못하고 지내왔으며 올해 98주년을 맞이하는 3·1절에도 여전히 우리는 그들의 헌신과 희생의 삶에 대해 잘 모른다. 이러한 사실을 알리고자 이윤옥 시인은 시집 《서간도에 들꽃 피다, 전 6권》을 통해 숭고한 삶을 살다간 여성독립운동가들을 널리 알려오고 있다. 이번에 제98주년 3・1절을 맞아 한국화가 이무성 화백은 이 이윤옥 시인의 시에 시화를 그린 작품 33점을 선보인다. 이번 시화전은 노동자 민족차별에
[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땅이 크고 사람이 많은 나라가 /큰 나라가 아니고/땅이 작고 사람이 적어도/위대한 인물이 많은 나라가/ 위대한 나라가 되는 것이다. 이는 남궁 억(1863~1939)선생이 1907년 4월 20일 종로 ymca 강당에서 한 「생존경쟁(生存競爭)」이라는 제목의 연설문의 한토막이다. 선생은 강원도 홍천 출신으로 1884년에 영어학교인 동문학(同文學)을 수료하고 서울 총해관(總海關)의 견습생으로 있다가 1886년에 내부 주사(主事)가 되고, 1887년에 전권대신 조민희(趙民熙)의 수행서기관으로 영국,러시아,독일의 순방 길에 올라 홍콩까지 갔으나 청국정부의 간섭과 방해로 2년간 홍콩에 체재하다가 소환되어 돌아왔다. 1889년에는 칠곡부사(漆谷府使)를 역임하였다. 1894년 갑오경장 내각이 수립되자 승진하여 1893년에 내부 토목국장으로 임명되어 종로와 정동 일대 및 육조(六曺) 앞 남대문 사이의 도로를 정비하는 동시에 파고다공원을 세웠다. 1896년 2월 아관파천(俄館播遷)이후에는 관직을 사임하고, 1896년 7월 서재필(徐載弼)?이상재(李商在) 등과 함께 독립협회(獨立協會)를 창립하여 중앙위원?서기?사법위원?평의원 등에 선출되었으며 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서울시가 국가보훈처와 협력해 현 서대문구의회 자리에 국내 최초ㆍ유일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관' 건립을 추진한다. '3ㆍ1운동 100주년'이자 '대한민국 건국 100주년'인 오는 2019년 개관이 목표다. 서울시는 기념관을 중심으로 그 즈음 복원을 마치는 딜쿠샤를 비롯해 독립문, 구 서대문형무소 등 일대 명소를 연결하는 '독립운동 유적 단지'를 조성한다. 지하철 안국역은 프랑스 파리의 '기 모케(Guy Moquet)' 테마역처럼 독립운동 테마역사로 조성한다. 종로에서 북촌으로 이어지는 삼일대로는 3ㆍ1운동 대표가로로, 남산 예장자락은 일제의 남산 침탈 흔적을 알 수 있는 역사탐방로인 남산국치(南山國恥)의 길을 각각 조성한다. 독립운동을 한 자손들이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생활할 수 있도록 지원을 확대한다. 서울시립대 등록금 전액 면제 대상도 5대손까지(기존 2대손) 확대하고 후손이 없어 방치되어 있는 독립유공자 묘지를 발굴하여 지원한다. 아울러, 나라를 위해 헌신했지만 현재 어렵게 생활하고 있는 국가유공자에 대한 지원을 확대한다. 매년 74억 원을 추가 투입해 생활보조수당을 신설하고 보훈단체에 대한 지원도 대폭 확대해 나간다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여성독립운동가의 발자취를 찾아 나선 어느 날, 저는 빛바랜 책 한권과 만났습니다. ‘여류독립운동가의 수기’로 안내된 책의 표지에는 『두 감나무 고목에 활짝 핀 무궁화』 제목이 굵은 글씨로 적혀 있었지요. 떨리는 손으로 첫 장을 펼치는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습니다.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시선이 고정되었지요. 그 때가 선생님과의 첫 만남이었습니다. 펼쳐든 첫 페이지의 인사말씀에는 선생님이 24살에 신사참배 문제로 교사생활을 그만두었던 내용과 25살 때부터 형무소를 전전하며 감내해야 했던 옥고 생활의 이야기가 간략하게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사실 선생님을 만날 목적으로 마산을 찾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부산경남지역 여성독립운동가의 행적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부산 일신여학교에서 수학하며 신교육을 받았던 여성들의 다수가 독립운동에 투신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흔적을 쫓아가다보니 일신여학교 출신으로 마산의 신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했던 김두석 선생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선생님은 신사참배를 강하게 거부했던 교사로 지역 학생들에게 의로움이 무엇인가를 각인시켰던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일본경찰이 주시하는 자리